소설리스트

69화 (69/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9화

새삼 제 처지에 환멸이 났다. 조건으로 재고 따져 가며 팔려가듯 결혼을 이야기하는 현실이 끔찍했다. 비록 속아서 온 자리라지만, 제 연인을 두고 이런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로 제 도덕심에 흠집이 나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하필 그 상대가 연희라니. 그 누구도 아닌 수진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설마 알고 그러신 걸까?’

그동안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 회장이라면 이미 수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해 왔다. 당장 저부터도 어지간한 임원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캐낼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곧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한 사람을 상처 주기 위해 벌일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 한 회장에게 가장 필요한 부품이 연희였을 뿐. 지금으로서는 이 기막힌 우연을 탓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표정을 굳힌 준성이 조심스럽게 연희의 팔을 떼어 냈다. 그 순간 연희가 슬쩍 미간을 좁혔지만, 준성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떤 감정도 없는 차가운 시선이 연희의 얼굴을 향했다.

“아까 말 정정할게.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 있어.”

한순간 미소를 지웠던 연희가 곧 경련하듯 입가를 늘여 보였다.

“그래? 되게 의외다. 너한테 그런 사람이 다 있다고? 누구야? 혹시 내가 알 만한 사람?”

“그것까지 너에게 말해 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끼어들 여지조차 없이 냉정하게 잘라 내 버린다. 무너지듯 일그러지는 여자의 얼굴 따윈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오늘의 일을 어떻게 수진에게 알려야 할까.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전해야 그녀가 상처를 덜 받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었다. 잠시 시선을 내리고서 치미는 한숨을 삼킨 준성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난 평생 결혼할 마음 없어. 그러니 이 약혼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해 줬으면 좋겠다. 최대한 수습해 볼 테니까 너도 그렇게 전해 드려.”

단칼에 거절당한 여자를 배려해 줄 마음조차 없는지, 제 할 말만 내뱉은 남자는 형식적인 인사말도 없이 돌아서 버렸다. 그런 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 혹은 동기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신사적이고 배려 깊은 면모를 보이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 무섭도록 냉정해지는 남자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이런 남자의 태도는 유명했다.

의례적인 친절에 혹시나 하고 덤벼들었다가 차갑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반응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여학생들이 수도 없었고,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 그에게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굳이 더 다가서지 않았던 건, 그렇게 차인 여자들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애초에 제게 먼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는 처음이라 더 조심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이젠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아니. 나 그렇겐 못 하겠는데?”

저만치 멀어진 남자가 흘깃 뒤를 돌아봤다. 감정 없이 굳은 얼굴조차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외국에 나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음에도 눈앞의 이 남자만큼 탐나는 존재는 없었다. 늘 최고를 원해 온 그녀에게 이 남자는 가장 완벽한 트로피였다.

그녀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래. 그 여자가 누군지 물은 건 내가 실수했어. 그건 네 사생활일 테니까. 그런 것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아직까지는.”

“…….”

“우린 어차피 원하는 사람이랑 결혼 못 해. 그 여자가 너랑 결혼이 가능할 정도의 조건이었다면 애초에 내게 이런 제안도 안 왔겠지. 그 말은 곧 회장님을 만족시킬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뜻이고. 그렇지?”

감정 없이 메말라 있던 시선에 일순 안광이 일었다. 제대로 정곡을 찔렀음을 확신한 연희가 느긋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리가 싫다고 하면 여기서 중단하는 거야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러면 뭐 해? 집안과 상대만 바뀔 뿐 또 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

“괜한 헛수고 하지 말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협조할 마음 없으면 그냥 신경 꺼 줘.”

짧게 대꾸한 준성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남자가 눈앞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연희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왼손의 반지를 숨긴 것도 어떤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단 그냥 본능 같은 거였다.

다음 순서는 당장 뭐라도 터뜨릴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수혁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부탁이니 가만히 있어 달라고.

꼭 말해야 할 일이고, 숨기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와의 약혼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는 친구의 앞에서 사실 그 남자가 내 남자라고. 이미 깊은 사이가 되었다는 설명을 제정신으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연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실은 무슨 말이 오간 건지, 식사는 어떻게 한 건지 반쯤은 기억이 희미했다. 들뜬 감정에 취한 연희가 제 어색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해서.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뭐였는지 묻지 않아 줘서. 함께 있는 순간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겼다 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 어떡할래? 네가 힘들면 나라도 대신 말해 줘?

그날 저녁.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온 수혁이 무슨 전쟁터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하게 꺼낸 말이었다. 연희와 헤어지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도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붙잡는 걸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잘라 냈었다. 그땐 두말없이 물러나 주더니 정작 헤어져서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나 보다.

‘네가 그걸 왜? 말하려면 내가 해야 맞지.’

― 그렇기야 하지. 하…… 참나. 일이 꼬여도 어쩜 이렇게 엿같이 꼬이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정확히 제 심정을 짚는 말이 순수하게 우스웠다. 잘도 웃음이 나오느냐고 타박하던 수혁은 잠시 후에 또다시 툭 던지듯 물었다.

― 준성이는 뭐래? 이야기는 해 봤어?

‘아니, 아직. 어차피 지금은 그런 걸 이야기할 타이밍도 아니잖아.’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가장 묻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중요한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는 사람을 붙잡고 할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부를 묻는 메시지만 주고받은 것이 끝이었다.

― 그래도 준성이한테는 아닐걸. 그놈한테 너랑 연애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싱거운 소리라 웃어넘기고 전화를 끊었다. 적어도 그가 제게 일부러 이 건을 숨기고 있지는 않았을 거란 뉘앙스였다. 그 점에 대해선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수혁의 말대로 상황이 너무 꼬여 있는 게 문제일 것이다.

설령 그가 이 약혼 건에 대해 진즉부터 알고 숨기고 있었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연희와 약혼이라니.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그 상대라니.

그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 같아도 절대 말 못 하지.’

그렇게 침묵하는 사이,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어김없이 날은 밝았다.

이틀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드디어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각성제라도 잔뜩 들이마신 것처럼 시큰한 눈을 부릅뜨며 출근했다. 종일 멍한 머리로 일을 하는 짬짬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지 말지를 고민하다 내려놓기를 몇 번.

“후우. 종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을 때였다.

“주임님, 주임님. 소식 들으셨어요?”

“어? 왜, 무슨 일인데?”

갑자기 유리가 호들갑스럽게 저를 부르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일이 있어 본관에 다녀올 거라며 나섰던 그녀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진그룹의 행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라 내심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오늘 디너쇼에 오를 가수분이 공연 못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금 연회팀 난리도 아니에요. 리허설 준비도 다 마쳤는데 대기실에 박혀서 나오질 않는대요.”

그런데 들려온 말은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건지, 되물을 새도 없이 급히 본관 연회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창 행사 준비로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 리셉션 홀에 도착한 수진은 곧 익숙한 얼굴의 연회팀 막내 직원을 발견했다.

“주현 씨, 무슨 일이에요? 왜 리허설 진행이 안 되고 있는 거예요? 공연을 못 하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주임님. 그게요.”

가수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그의 매니저를 통해 공연 전엔 해산물이 든 음식을 피한다는 사실을 전달받았지만, 연회팀에서는 단순한 기호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공연 전의 징크스와 관련된 것임을 알아낸 수진은 다시 연회팀을 찾아 꼭 신경 써 달라며 신신당부를 해 뒀다.

이후 연회팀에서는 영진그룹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해 가수의 식사를 특별히 준비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돌아온 답은 알아서 할 일에 과한 간섭은 사양하겠다는 내용뿐이었다. 강경한 반응에 연회팀에서는 어련히 잘하겠거니 믿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담당자는 호텔 내 레스토랑을 통해 어떤 주의 사항도 전달하지 않은 평범한 식사를 주문해 왔다는 게 짧게 이어진 설명의 요지였다.

“그래서요? 설마 확인 없이 그대로 식사가 나간 거예요?”

“네. 설마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죠. 가수분께서도 의심 없이 드시다가 도중에 새우 살로 추정되는 조각을 발견하셨대요. 호텔 측에서 요구 사항을 전혀 들어주지 않은 거라 생각하시고 엄청 노하셨어요.”

“영진그룹 쪽에서는 사과도 없고요?”

“잘못도 인정 안 하는데 사과를 하겠어요? 어쨌거나 음식을 내간 건 호텔 쪽이 아니냐면서 덮어씌우기까지 하는데 답도 없더라고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그녀가 아는 미연은 이런 일을 깜빡 잊고 누락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일 처리가 확실한 연회팀에서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 착오가 있었을 리도 없다. 일부러 의견을 무시했다는 결론밖에 나질 않았다.

“영진그룹 담당자, 지금 연회장 안에 있어요?”

“아뇨, 점심 드시고 오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아, 저기 오시네요.”

직원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가리켜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때마침 홀로 들어서는 서너 명의 여자 중 한 명이 제 얼굴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머금는 게 보인다.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김가연 씨.”

수진이 가까이 다가서며 팔뚝을 붙들자, 미연은 불쾌한 듯 그 팔을 뿌리쳤다.

“할 말 없다니까? 여기 직원들은 왜 이렇게 뻔뻔하고 끈질겨? 이미 그쪽 실수로 결론 난 일을 왜 자꾸 이야기하자는 건데?”

“지금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으세요? 통화 내역 까면 다 밝혀질 일을 지금 그렇게 우기실 거예요?”

“허, 야. 판촉이나 하는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뭐? 통화 내역을 까? 너야말로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한 거 책임질 수 있어?”

“그러니까 이야기하자고요. 제대로 책임져 줄 테니까.”

단호하게 내뱉은 수진이 다시 미연의 팔을 붙잡았을 때였다. 대기실이 있는 방향에서 튀어나온 연회팀 남직원 하나가 황급히 홀을 가로질러 왔다. 얼른 그를 손짓해 부른 주현이 무슨 일이냐 묻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