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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8/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8화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연희의 대꾸를 끝으로 통화는 끝이 났다. 예고도 없이 불쑥 터뜨리느니 살짝 언질이라도 해 둬야 좀 덜 놀라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 꺼낸 말이었다.

아니, 이건 연희를 위해서라기보다, 저 자신이 마음의 준비를 해 두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지만.

“왜, 막상 말하려니 긴장돼?”

생각이 길어지며 복잡해진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불쑥 끼어드는 말에 수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긴장은 무슨. 우리 사이에 그럴 게 있나, 뭐.”

“그래. 너희 우정이 얼마나 고래 심줄같이 끈질긴 우정인데. 그건 옆에서 본 내가 보장하지. 걔가 성격은 좀 드러워도, 이해심은 아주 태평양이잖아. 이런 거 미리 말 안 해 줬다고 뭐, 그렇게 배신감 느끼고 삐치고 그럴 애 절대 아니다. 완전 상남자라니까. 그나저나 잠깐만. 너 손가락에 이건 뭐냐?”

나름 긴장을 풀어 주려 했던 건지 주절주절 주워섬기던 수혁이 뒤늦게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발견하곤 오, 하고 눈을 빛냈다.

“이야, 이거 봐라. 남친이 재벌 3세인 티가 팍팍 날 정도는 아닌데, 약간 뭐랄까. 눈썰미 좀 있는 놈이면 좀 센 골키퍼가 딱, 지키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정도라 해야 하나? 이것만 보여 주고 다녀도 웬만한 날파리 정도는 그냥 나가떨어지겠는데? 우리 송 상무님께서 제법 심혈을 기울여서 고르셨나 봅니다?”

“이야기 짜내는 수준이 무슨 찌라시급이네. 어디 ‘데스패치’ 같은 데서 투잡 뛰다 왔어?”

이런 쓸데없이 예리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아도 이미 크리스마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한바탕 난리 법석을 겪었다.

‘어머, 어머머. 웬 반지예요? 이거 설마 커플링이에요? 헉, 대박! 다들 여기 좀 보세요, 우리 김 주임님 애인 생겼나 봐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인사를 건네러 고개를 삐죽이 빼던 유리가 그녀의 손가락을 장식하고 있던 반지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새도 없이 우르르 몰려든 여자들은 하나같이 먼저 반지의 디자인을 살피고는, 곧 브랜드부터 가격대까지 유추해 내더니 언제부터 얼마나 사귄 건지, 어디서 만난 건지, 관계가 어디까지 진행이 된 건지 따위의 질문을 쏟아 냈다.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만큼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저보다 더 들떠서 환호해 댔다. 조만간 소개를 해 달라는 둥, 애인의 친구는 없냐는 둥 실컷 떠들어 대고서야 그녀들은 간신히 진정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시인한 것만으로도 이 지경인데, 그 상대가 상무님이라는 걸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일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다 아찔했다. 심지어 한바탕 화제가 흘러간 후에야 슬그머니 다가온 나 과장은 더욱 의미심장한 말을 속삭였다.

‘이야, 이거 제대로 고르셨네. 디자인이며 활용성이며, 이 이상 완벽할 수가 없어. 완전 최 대리 퇴치용 토템 아니냐? 알지? 조만간 너한테 고백한다고, 곧 사귈 거라고 엄청 떠들고 다니는 거.’

굳이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제 승진설에 불쾌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은근슬쩍 결혼 적령기니, 수준이 맞아야 행복하니, 하는 식으로 엮으려 드는 최 대리의 행태가 점점 부담이 되던 때였다. 그래서 반지를 보며 꺅꺅거리는 여직원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저 멀리 굳어 있던 최 대리를 발견하고 내심 잘됐구나, 싶기도 했다.

참 의도치 않게 완벽한 타이밍이라 해야 하나.

“하여간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봐.”

“뭔 소리냐, 그건?”

“있다, 그런 게.”

놀랍도록 비슷한 의견을 내놓은 나 과장과 수혁의 말을 곱씹던 수진이 픽 웃음을 머금었을 때였다.

“수진아!”

내내 기다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눈이 번쩍 뜨였다.

“연희야!”

“꺄악! 야, 나 너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후다닥 달려온 연희가 그녀를 꼭 껴안고서 방방 뛰어 댔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더 예뻐졌네, 살이 쪘네, 빠졌네, 떠들어 가며 꺄르르 웃어 대는 두 여자의 법석에 수혁이 벌써부터 피곤하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야야, 남의 영업장에서 그렇게 떠드는 거 아니다. 그만들 하고 앉아.”

“아 참, 그렇지. 일단 앉자, 연희야.”

“어, 그래. 기다리느라 배고팠겠다. 일단 뭐부터 좀 시킬까?”

먼저 정신을 차린 수진이 연희를 다독이며 자리에 앉혔다. 여전히 잔뜩 들뜬 얼굴로 자리에 앉아 웨이터를 호출한 연희가 그제야 수혁을 보며 알은척을 했다.

“이야, 근데 수혁이 너 못 본 사이에 되게 잘생겨졌다? 인물이 확 폈는데?”

“내 잘생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거든? 그나저나 갑자기 왜 돌아오게 된 거냐? 무슨 바람이 불어서?”

“훗. 궁금해?”

“그래, 궁금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제 말해 줘도 되잖아.”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은 수진이 연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술과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곧장 유학을 떠난 연희였다.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원하는 학위를 딴 그녀는 이후 한 패션 전문 브랜드에 취업해 3년 가까이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올해 4월경, 느닷없이 일을 정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연말쯤 완전히 귀국할 거라는 말과 함께.

타국에서의 적응도 빨랐고, 본인의 일에도 충분히 만족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모든 걸 접고 귀국하기로 마음먹게 된 건지. 어련히 생각이 있어 결정했겠지만, 그 커리어를 버리고 왔다는 게 꼭 제 일처럼 아깝고 아쉽기만 하던 차였다.

같은 마음인지 수혁이 툭하니 물었다.

“설마 그 좋은 직장 버리고 취집이라도 선택한 거냐?”

“와, 너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어?”

“뭐? 진짜?”

“뭐라고?”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의문사가 터져 나왔다. 1차로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이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마주 보자 그 광경을 보던 연희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왜들 그렇게 놀라? 내가 결혼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해?”

“이, 이상하다기보다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하는 말이지.”

“내 말이.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유분수지. 대체 언제부터 우리 모르게 연애질을 하고 있었냐? 같은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야? 아니면 뭐 선이라도 봤어? 무슨 이야기가 도입부도 없이 바로 결말로 직행이냐.”

기막히다는 듯 이어지는 수혁의 말에 연희는 더욱 재미있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운을 뗐다.

“미안. 사실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을 때부터 나온 이야긴데 그땐 확정된 건이 아니라 미리 말을 못 했어. 그런데 이제 곧 약혼할 거고, 기자들 통해서 제대로 보도도 나갈 거라서 이야기해 주는 거야.”

“허, 스케일 봐라. 보도씩이나? 대체 상대가 누군데 그렇게 거창해?”

“좋은 질문이야. 실은 그쪽이 진짜 하이라이트거든.”

수혁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 연희가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나 실은 준성이랑 약혼하기로 했어.”

“……뭐?”

한순간,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수혁이 수진을 흘깃 바라봤다. 동시에 수진의 왼손은 자연스럽게 테이블 밑으로 사라졌다. 더욱 당황한 수혁이 과장된 투로 말을 받았다.

“주, 준성이라면 설마 송준성? 진짜아? 이야, 놀랍네.”

“그치? 놀랍지? 나도 첨엔 황당했다니까? 진짜 인연은 인연인가 봐. 어떻게 친구끼리 이렇게 연결이 되니? 아무튼 나도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첨엔…….”

쾌활하게 설명하는 연희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당황하며 눈짓을 보내는 수혁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인 수진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멍한 머릿속엔 점차 커져 가는 제 심장 소리만 가득히 울려 댔다.

* * *

오후 일정을 마쳐 갈 때쯤, 준성은 한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모처럼 함께 저녁 식사라도 하자는 제안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엔 이미 수진을 위해 하루를 통째로 비운 전적이 있었기에 차마 그 한 시간조차 내기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본의 아니게 약속을 깬 적이 있었던지라 더더욱 거절을 하기 힘든 자리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연인들의 특별한 날에나 찾을 법한 원 테이블 레스토랑이었다. 왜 굳이 이런 자리로 저를 불러내셨나 싶어 의아했지만, 설마 했다. 그것도 기다리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로 들어서기 전까지였지만.

“송준성!”

“……이연희?”

처음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반가워하며 손을 들어 올리는 연희를 발견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었다. 테이블로 다가간 준성이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며 또 다른 자리가 있는지를 찾았다. 그때만 해도 우연히 약속 장소가 겹친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우리 만나기로 한 자리니까 있는 거지.”

멈칫한 준성이 다시 연희를 바라봤다. 그제야 연희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투피스 정장에 잘 정돈된 헤어스타일이며 차분한 메이크업까지. 그가 기억하던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선 자리에서나 볼 법한 꾸밈새였다.

“설마…….”

“응. 맞아. 선보는 자리. 우리 곧 약혼할 거거든.”

“허.”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미안한데, 난 너랑 그럴 생각 전혀 없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내는 말이었다.

“아니, 이건 너 말고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야.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나왔어.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 볼게.”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입가로 피식,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냥 나가 버리면 상황이 좀 곤란해질 텐데, 괜찮겠어?”

멈칫한 그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인 연희가 태연히 테이블을 돌아 나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미 집안끼리 결정이 끝난 건이거든. 진짜 약혼식이랑 발표만 남았다고. 오늘은 그냥 오랜만에 서로 인사나 하라는 거지, 네게 결정하라는 자리가 아니야.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붙잡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편히 생각해. 어차피 너나 나나 정략으로 결혼해야 하는 운명인 건 마찬가지잖아. 그럴 거면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 결혼하는 것도 좋지 않아? 진짜 친구끼리 결혼해서, 흔한 쇼윈도 부부가 아니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부부가 되는 거지.”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처럼 막힘없이 이어지는 말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건지. 이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던 일이라면, 언젠가 제게 시간을 내 보라며 내밀었던 서류 속 인물은 또 누구였던 건지.

‘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분명 시간을 달라 말했었다. 저 자신의 능력을. 그녀의 자질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사 부탁까지 드린 후였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오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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