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4화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와, 나 이렇게 보호받는 거 되게 오랜만이야. 방금 겁나 설렜어.”

“오랜만이라……. 나 없는 사이에 또 어떤 놈한테 그렇게 설레셨을까?”

“그러게. 누구였을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나 보다. 흘깃 제 얼굴을 보던 그녀가 파하핫 하고 웃더니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어우, 인상 쓰는 거 봐. 내가 정말 못 살아. 누구긴 누구겠어, 바로 너지. 우리 대학 때 같이 걸으면 매번 네가 나 이렇게 잡아 주고, 챙겨 주고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아…….”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다 잊었을 줄 알았다. 그녀의 곁에서 행동으로나마 관심을 보이려 애쓰던 때였다. 그녀를 진심으로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반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닿고 싶은 엉큼한 마음도 반쯤은 섞여 있었던 제 행동을 그녀도 의식하고 있었던 걸까.

“원래 다정한 사람이라 나한테도 잘해 줬구나, 싶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막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 너. 사심이 있어서 그랬구나, 싶고.”

“당연하지. 그때도 난 사심도 없는 여자한테까지 친절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거든.”

“와, 대박. 이젠 숨기지도 않네.”

키득거리며 대꾸한 그녀가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근방의 액세서리 노점으로 그를 이끌었다. 별생각 없이 그녀의 시선을 좇던 준성은 이어 그녀가 집어 드는 물건을 보며 눈에 띄게 흠칫했다.

“와, 이거 예쁘다. 저기, 한번 껴 봐도 되죠?”

“네, 껴 보세요.”

하필 그녀가 집어 든 건 반지였다. 순간 준성은 안주머니에 숨겨 둔 조그만 상자 하나를 떠올리며 낮게 탄식했다.

“어때?”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래? 그럼 이건? ……이것도 별로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어떤 링을 끼워 넣어도 썩 잘 어울렸지만, 준성은 굳은 마음으로 고개만 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시무룩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제 주머니의 상자를 꺼내 쥐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순서가 아니었다.

“다른 것도 한번 봐 보자. 굳이 반지 말고도 예쁜 거 많으니까.”

“음, 그럴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지만 다행히 그녀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또 뭔가를 발견하고 호기심을 내비치는 그녀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벗어난 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실컷 그를 끌고 다니며 이 순간을 알차게 즐겼다.

인형 뽑기 방에 들어가서는 경쟁하듯 천 원짜리를 털어 넣다 결국 돈만 잃고 잔뜩 골이 났다가, 근방의 사진 자판기를 발견하곤 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끌어들였다. 이어 괴상한 표정만 잔뜩 찍힌 사진을 빼 들고는 목젖이 뒤집어지도록 웃어 댔다.

그리고 다시 그의 차를 세워 둔 주차장을 향해 걷는 길. 그녀의 손에는 작은 꾸러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금 밥 먹었으면서 또 먹게?”

“무슨 소리야. 이건 간식이잖아, 간식. 원래 간식 배는 따로 있는 거야.”

해맑게 대꾸한 수진이 따끈한 와플을 한입 깨물고는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먹어 봐. 맛있어, 이거.”

크게 내키진 않지만 그녀가 권하니 거절은 이미 불가능했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한입 깨물자 바삭한 와플 사이로 달큰한 사과잼과 땅콩크림의 맛이 느껴졌다.

“어때? 괜찮지?”

“어. 맛은 있는데, 배불러서 더는 안 먹어도 될 거 같아.”

완곡히 돌려 거절하는 말에 그녀가 까르르 웃더니 그를 향해 손짓했다. 몸을 숙여 달라는 뉘앙스에 슬쩍 허리를 굽혀 주자 그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닦아 낸 그녀가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달콤한 맛이 오가는 입맞춤이 끝나고 이마를 마주 댄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키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젠 어디로 가는 거야?”

다시 차에 오르고 조금 한산해진 도로를 달릴 무렵이었다. 준성은 어딘가 행선지가 있는 양 차를 몰아갔지만, 꽤 시간이 늦었기에 달리 갈 만한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집으로 보내 주려는 건 아닐 테고.

“선물 확인하러.”

“선물? ……아!”

내내 잊고 있었던 물건 하나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설마 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 그냥 좀 잊어 주면 안 될까?”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쳐. 섭섭하게.”

다시 한번 느끼지만, 집요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자다. 잠시간 할 말을 잃은 채 단정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진이 문득 차량이 진입하는 길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여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곳은 그의 집이 있는 주상 복합 건물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선 차량이 멈춰 서자 수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뭐지? 나 지금 좀 수렁에 빠지는 느낌인데?”

“응. 아깐 내가 양보했으니까, 마지막은 내 마음대로 하려고.”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말에 그녀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설마 나 여기 갇혀서 못 나가고 그러는 건 아니지?”

“걱정 마. 모레 아침엔 꼭 출근시켜 줄 테니까.”

과연 출근이 가능할지 의심스럽지 말입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보닛을 돌아오는 동안, 그 행적을 물끄러미 좇는 그녀의 눈에 뚜렷한 의구심이 새겨졌다. 저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통째로 맡긴 기분이 드는 건 뭔지.

그사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고, 뒷좌석에 놓아 둔 상자까지 굳이 꺼내어 안겨 준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란히 손을 붙잡은 채로 오른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최상층인 30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광경이 낯설어서인지 심장이 술렁였다. 그러고 보면 나간 기억만 있지 들어온 기억은 없는 곳이었다.

“참, 나 처음 여기 왔을 때 말이야. 대체 어떻게 데리고 온 거였어?”

그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서며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올렸을 때였다. 조금 앞장서 있던 남자가 흘깃 뒤를 돌아봤다.

“궁금해?”

“어, 뭐. 조금?”

짐짝처럼 떠메고 온 건지, 아니면 공주님처럼 소중히 안고 온 건지. 후자였으면 기분이 참 좋을 것 같긴 한데, 그 중요한 순간에 넋을 놓고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 좀 아쉽다고나 할까.

괜히 떠올린 생각이 낯간지러워 피식 웃음을 머금었을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훌쩍 덮쳐 와 흠칫한 순간, 강한 힘에 끌리듯 뒤로 휙 기울어진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순간 훅, 하고 들이켠 숨을 간신히 내뱉었을 때는 이미 공주님처럼 푹 안긴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안고 왔는데.”

“……!”

“이제 궁금증 해결됐어?”

너무도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에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한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두 팔로만 지탱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강인한 턱선과 뚜렷하게 튀어나온 울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지? 이런 각도에서 보고 있는데도 굴욕이라곤 없다. 전혀 무너지지 않는 그의 미모가 새삼 가슴에 콕 박혀 들었다.

정말 두 번만 궁금했다간 심장 터지겠다.

“어, 어. 해결됐으니까 이제 그만 내려 줘. 무겁잖아.”

“전혀 안 무거운데? 깃털 같다.”

“허, 헐! 너무 오버야, 그거!”

기함하며 발버둥 치는 그녀가 그저 귀엽다는 듯 나직하게 웃어 버린 그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너른 거실까지 그대로 옮겨지는 내내 그녀는 턱 끝까지 벅차오르는 숨을 제대로 내쉬지도 못했다. 부끄럽고 설레는 한편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어 눈만 질끈 감아 버렸다.

“자, 도착했으니까 이제 눈 떠 봐.”

다소곳이 소파에 놓인 그녀가 긴장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건 언제…….”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은 새빨간 장미 꽃잎과 꽃다발로 가득이었다. 그의 품 안에서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와중에도 미묘하게 감지된 장미 향의 정체가 이것이었던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조도를 낮춘 조명과 어우러지도록 반짝거리는 전구로 장식된 화려한 소품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어 와인병이 담긴 아이스버킷을 중심으로 요리까지 완벽하게 세팅이 끝난 테이블을 확인하고 난 그녀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저와 함께 바깥에 있던 사람이 대체 무슨 수로 이런 걸 준비한 건지.

설마 여기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본 순간 웃음을 터뜨린 준성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접으며 앉았다.

“아무도 없어. 우리 둘뿐이고, 특별히 시간 맞춰 준비만 시켰을 뿐이야.”

“아…….”

“더 근사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는데, 당장 멀리 갈 처지는 안 되고. 서울 내 호텔은 우리 호텔보다 좋은 곳이 없고. 또 그쪽으로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도 못하고. 내 여자 기준에 맞춰 보려니 상당히 까다롭더라.”

이 순간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 왔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입술 끝이 치켜 올랐다. 평범한 연인처럼 특별한 날의 풍경 속에 함께하고 싶었던 제 바람을 내치지 않고 묵묵히 따라 준 것만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저를 위해 이런 걸 준비하며 홀로 즐거워하고 있었을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어 매달리려 했을 때였다.

“이런 거로 감동받긴 아직 이른데.”

슬쩍 몸을 뒤로 뺀 그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의 어깨까지 뻗어 나간 손이 그대로 멈춘 사이,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붉은빛이 도는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 정체가 뚜렷한 상자를 본 순간부터 이미 무섭도록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이어 작은 보석이 하나 박힌 반지의 자태를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결혼하자고는 했었지만, 이건 프러포즈 반지는 아니야. 그건 더 근사하게 준비할게.”

변명이라도 하듯이 설명한 그가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허벅지 위로 돌아가 있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그때까지만 끼고 있어.”

작은 다이아가 박힌 심플한 백금 링이 서서히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올랐다. 그녀의 목울대가 천천히 일렁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뜨겁게 열이 오르기 시작한 눈에 힘을 주며 하염없이 반지를 바라봤다.

“제대로 프러포즈할 때까지 그냥 두려니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 그러니 그동안 임자 있는 여자라고 티는 내 줘. 절대 빼놓지 말고.”

너무도 진지하게 본심을 드러내는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국 저를 곁에 묶어 두기 위한 수작임을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걸까.

그 목적이야 무엇이든, 기뻤다.

연인에게 이런 선물을 받는 건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보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제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이 남자와의 재회도. 이끌리듯 시작해 버린 연애도. 모두 다 현실감이 없는데, 무엇도 지금 이 순간만큼 비현실적이진 않았다. 한없이 벅차오르는 심장을 누르듯 심호흡을 한 그녀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풋, 하고 웃었다.

“아까 내가 반지 산다고 했을 때 당황했겠네.”

“말도 마. 이미 내가 사 뒀다고 말도 못 하고.”

“푸흣…….”

“웃을 일 아니라니까.”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반지가 잘 보이도록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의 손에 걸쳐진 채 살짝 접힌 그녀의 손끝을 입술에 대고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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