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63화
바짝 긴장해 얼어붙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픽 웃음을 머금었다.
“길 한복판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뭐, 뭘 하긴. 줄 거 있다고 잠깐 보자기에 만났다가 괜히…… 말려들었지, 뭐.”
“그래서 받은 게 그 상자고?”
“어, 뭐. 근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배고프지? 우리도 이제 그만 움직일까?”
“방금 수혁이가 같이 열어 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 그건 맞는데, 진짜 별건 아니라서. 그냥 나중에…….”
“그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할게.”
딱 잘라 말한 준성이 당장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자, 그녀가 와그작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스치듯이 보고 덮어 버리긴 했지만, 한눈에도 엄청나게 야릇한 속옷이었다. 평생 입을 일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선물이니 차마 버리진 못하더라도 다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아 버릴 생각이었었는데…….
“꼭 지금 확인해 봐야겠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
“…….”
“……지만 어쨌든 너한테도 준 거라 했으니 그럴 권리 있지. 어.”
어떻게든 만류하려 했지만, 열흘 삶은 무에 이도 안 들어갈 표정을 하고 있다. 스스로 포기한 수진은 얌전히 상자를 내밀었다. 친절하게 설명도 덧붙였다.
“수혁이 말로는 본인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물건이니 찝찝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쓰래. 그렇다 해도 절대 쓸 마음이 안 생길 거 알아. 나도 그러니까. 미리 말하지만 정상적인 물건 아니니까 각오하라고.”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으로 실토하는 동안,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보더니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대로 덮어 버렸다. 그럴 거 같아서 말렸던 건데.
“늦겠다. 그만 출발하자. 앞에 차 세워 뒀어.”
웃는 얼굴을 봤다고 해서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떡하니 내민 손을 붙잡는데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뛰어 댔다. 이게 불안감 탓인지 기대감 탓인지 좀처럼 구별이 되질 않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조수석에 오른 후에도 이상하게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자, 곧장 운전석으로 올라탄 준성이 흘깃 보더니 또 웃음을 머금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
“저기, 아까 기분 나빴던 거 아니었어?”
“내가? 왜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데?”
빙글거리며 되묻는 말에 헛웃음이 났다. 분명 처음 등장 신에서부터 막 등 뒤로 어둠의 오라가 뿜뿜 하는 걸 봤는데. 눈빛에 살기가 그득했었다고. 게다가 친구랑 가까운 것도 질투하고, 손님한테 친절한 것도 질투하시는 분이 오늘은 그 친구에게 손목을 붙들리고 이상야릇한 선물까지 받았는데 아무렇지 않단다.
그걸 누구더러 믿으라고?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태연히 그 시선을 마주한 준성이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모처럼 내 맘에 쏙 드는 선물이 들어왔는데 잘 써야지.”
“뭐? 설마 저 상자 속 물건 말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
능청스러운 대꾸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미쳤……. 야, 나 그거 절대 못 입어. 아니, 안 입어!”
“걱정 마. 내가 입혀 줄 테니까.”
“아니! 잠깐 무슨 그런……!”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다분히 도발의 의미가 가득한 선물이라는 것쯤이야 알고도 남았다. 수진을 향한 수혁의 감정은 친구 이상, 연인 이하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반쯤은 장난인 것처럼 가볍게 접근해 온 탓에 수진은 그 마음이 진심임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 왔다. 만약 제가 없었더라면, 스며들듯이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고, 끝내 마음을 얻어 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혁은 지금도 그 자신에게 다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혁이 이 관계에 끼어드는 일은 없으리란 걸 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진심인 만큼,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또한 너무도 진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불행한 모습을 원하지 않는 수혁으로서는 감정을 드러내며 저와 불편한 사이가 되는 것도, 그녀와의 우정을 박살 내는 것도 꼭 피하고 싶은 선택지일 것이다.
그래서 웃어넘겼다. 이렇게 작은 심술로나마 긴 짝사랑에 지친 속풀이를 하고 싶었을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게다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선물이 의외로 마음에 든 것도 지금의 관대함에 한몫했고.
놀랍게도 진심으로 그녀에게 입혀 보고 싶은 디자인이었다. 하늘하늘한 망사 레이스로 가득한 순백의 속옷으로 은밀한 부분만을 가린 그녀가 얌전히 제 침대에 누워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짧게 상상만 해 본 것뿐인데 허리 아래로 열기가 확 몰려들고 바지의 앞부분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일단은 참아야 했다. 빨리 시간이 흘러 마지막 코스로 넘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달리는 차 안이었다.
어느덧 한강 다리를 건넌 차량은 복잡한 도심지의 도로를 가로질렀다. 날이 날이니만큼 정체가 심했지만 차를 가지고 나온 걸 후회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녀와 함께 있어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자.”
“그럴까? 그런데 어디로 가려는 거야? 오늘 같은 날엔 자리 잡기도 힘들 것 같은데.”
눈을 빛내며 대답하던 수진이 문득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수혁의 짓궂은 장난 탓에 바짝 얼어붙어 있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하루의 일과를 묻고 답하며 웃어 대는 동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정 없으면 그냥 길거리 떡볶이라도 먹자. 괜히 길도 복잡한데 힘들게 돌아다니지 말고. 나 쌀쌀해지면 한 번씩 그런 거 당겨서 잘 먹거든.”
“그것도 좋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오늘은 갈 데가 있어.”
“오, 갈 곳 정해 놓고 나온 거야? 대체 어딜 가기에 그렇게 비밀스럽지? 나 막 심장 뛰기 시작하는데 기대해도 돼?”
상기된 얼굴로 재잘재잘 말이 많아진 그녀가 귀여운지 흘깃 바라보는 준성의 입가로 웃음기가 떠올랐다.
목적한 장소가 가까워지자 준성은 근방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이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녀도 익히 아는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직원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수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속삭였다.
“와, 여길 어떻게 예약한 거야? 나 여기 진짜 한번 와 보고 싶어서 만날 벼르기만 했던 곳인데. 최소 2개월은 예약 꽉 차 있대서 포기했었거든.”
“그래? 김 비서님은 바로 잡아 오던데.”
“대애박. 대체 무슨 치트키를 쓴 거야?”
“글쎄. 돈인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내놓는 말인데 전혀 재수 없게 들리지 않는 것도 재주다. 픽 웃어 버린 수진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이야, 돈 많은 남자 친구 있으니까 이게 좋구나.”
“좋지? 네 애인이 부자라.”
“어. 처음으로 뿌듯했다, 진짜.”
진심을 가득 담아 내놓는 대꾸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곧 서빙이 시작되고 준성은 여느 때보다 즐거운 얼굴로 음식을 권했다. 요리 하나하나를 입에 넣을 때마다 일일이 감탄하며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만나 데이트를 즐겨 오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좀 더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주말엔 데이트도 하고. 이번 크리스마스도 너랑 같이 지내면 좋겠어.]
처음으로 저와 함께 뭔가를 하고 싶다며 꺼낸 말이었다. 비록, 실수로 보낸 메시지 속에 있던 말이지만, 그렇다 해서 허투루 넘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무방비하게 내놓은 말이었기에 그것은 그녀의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반드시 그녀와 함께해야만 했다.
그렇게 결심한 후, 태어나 처음으로 데이트 계획이란 걸 세워 보았다. 김 비서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식사부터 공연, 특별한 하룻밤까지.
갖은 인맥을 동원해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서 그녀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누구보다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식사를 마치고 난 그녀는 뜻밖의 제안을 꺼내어 그를 당황하게 했다.
“그냥 걷고 싶다고?”
“응. 나 이런 날 길거리에서 데이트하는 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 괜찮지?”
이미 공연 표를 준비해 두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를 곁에 두고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무대만 멍하니 보고 있느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는 쪽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흔쾌히 계획을 변경한 준성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거리에 나섰다. 휘황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상가의 쇼윈도와 길 한복판에 즐비한 노점을 구경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아주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의 손을 이끌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날이 꽤 추운지 빨개진 코끝이 사랑스러워 절로 웃음이 났다. 저와는 평생 상관없을 거라고만 생각해 온 거리의 풍경 속 일부가 되어 있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우, 추워. 안 되겠다. 우리 이거 하나 사자.”
대뜸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 그녀가 도착한 곳은 귀여운 털모자와 목도리 등 방한용품으로 가득한 매대였다. 그중에 그녀가 덥석 집어 든 것은 토끼 귀가 달린 모자였다. 배시시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준성은 흔쾌히 지갑을 꺼내 들었다.
“사고 싶으면 사.”
“아니, 그게 아니라.”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다시 그를 바라본다. 묘하게 눈을 빛내는 게 몹시 수상쩍다. 설마.
“싫어.”
“아잉,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 써 보자, 제발.”
모 여자 아이돌이 TV에 쓰고 나와 한창 유행을 했고, 최근 인기 절정의 남자 아이돌이 착용해 또 화제가 되었다는 TMI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잘 어울려, 어떡해. 와, 진짜. 걔들이 쓴 것보다 네가 훨씬 나아, 대박. 나 기념샷 하나만. 응?”
저는 멀쩡한 귀마개를 하고, 그의 머리 위엔 기어이 하얀 털 덩어리를 올려 둔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감격에 겨운 얼굴로 그를 향해 휴대폰을 들이민다. 제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만두라 해야 할 텐데, 저렇게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녀에 한해서만은 지나치게 마음이 물렀다.
“이제 벗어도 돼?”
“아니, 기껏 샀는데 아깝잖아. 머리도 춥고 하니까 오늘만 쓰자, 오늘만.”
이건 또 무슨 신종 고문인 건지.
이 와중에도 훤칠한 남자가 토끼 귀 모자를 쓰고 있으려니 그림이 남다르긴 한 건지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연예인인가? 뭔 촬영이라도 하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슬그머니 모자를 끌어 내리려는데 냅다 그의 손을 붙든 수진이 또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파 속을 잘도 뚫고 돌아다녔다.
“조심.”
그러다 한 떼의 남자들이 와하하, 웃으며 덮쳐 오자 준성은 황급히 수진의 몸을 끌어다 반대편으로 옮겨 세웠다. 비틀거리며 그의 품에 반쯤 끌려 들어온 그녀가 이내 몸을 가누더니 그를 빤히 바라봤다. 휘둥그레진 눈엔 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