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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2화

남들 놀 때 일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겐 이런 특별한 날이 크게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긴 세월을 호텔리어로 살아온 나 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일반 직장인과 사이클이 같은 백 오피스 쪽은 좀 덜하다지만, 한번 그런 인식이 박혀서인지 감흥이 없는 건 여전한 듯했다.

“그래서 오늘 내님 만나기로 한 거야?”

“쉿, 쉿, 과장님!”

기겁한 수진이 검지를 입술 위로 세우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 수진의 반응에 나 과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놀라? 어차피 상대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로맨스 드라마라도 보듯 그녀의 연애를 열혈 시청자 모드로 관람 중인 나 과장이었다. 그런 관심이 살짝 부담스럽긴 하지만 싫진 않았다. 이것저것 캐물어 대며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은 욕구가 느껴지는 한편으론, 너무 거창한 상대와 연애를 시작해 버린 그녀가 상처 입을까 걱정스러워하는 마음도 강하게 와닿는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나 과장과 마주 앉아 소소하게 수다를 떠는 시간이 즐거웠다. 키득거리며 연애에 대한 상담도 하고, 이런저런 충고도 듣다 보면 든든한 사촌 언니라도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은 해야죠.”

“하긴, 요즘 주변 사정도 꽤 복잡하신 거 같던데, 괜히 거기다 한술 보탤 거까지야 없겠지. 당장 너부터도 공개하고 자시고 할 여건도 안 되는 판국인데.”

현재 그룹 내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소식 빠른 나 과장이라면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한 회장과 한 사장이라는 거대한 공룡들의 싸움에서 준성이 맡게 될 역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같은 직장인의 입장에서, 쉽사리 연애를 공개할 수 없는 그녀의 사정 또한 이해하기에 내놓는 말이 조심스러웠다.

“이래저래 복잡하겠지만, 혹시 이상한 이야기 들어도 그냥 흘려 넘겨. 본인이 하는 말 아닌 이상 어차피 다 뜬소문이니까. 그리고 뭔가 의문점이 생기면 괜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본인한테 직접 묻고 확인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최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려 노력하는 말투에 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래. 그럼 빨리 남은 일 정리하자. 이런 날 늦으면 안 되니까.”

음흉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나 과장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친근했다.

* * *

“그럼 저 이만 퇴근할게요, 과장님.”

“어, 수고 많았어. 조심히 들어가고.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정확히 6시가 되자마자 수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루를 어떻게 보낸 건지 모르겠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도 모자라 오후 4시 이후로는 정말 5분에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어찌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지. 1분이 10분 같고, 10분이 한 시간 같은 기분이었다.

[20분 정도 늦을 거야. 커피숍 안에 들어가 있어. 금방 갈게.]

약속 장소는 호텔 본관 맞은편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잠시 그 앞에 선 채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해 보는 그녀의 입가로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전혀 아쉽거나 섭섭하지가 않았다.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설레.”

생각해 보면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만나 함께 식사를 한다거나,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은밀한 시간을 보낸 적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밖에서 만나기로 한 건 처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이 진정한 첫 데이트란 뜻이다.

이러니 설레지 않을 수가 없잖아.

픽 웃어 버린 수진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를 둘러봤을 때였다.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드르륵, 떨린다 싶더니 검게 변한 화면 위로 수혁의 이름이 두둥실 떠올랐다.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수진이 전화를 받았다.

“어, 수혁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 웬일은. 너 보고 싶어서 연락했지.

“왜, 또 뭐 시킬 거라도 있어? 아니면 나 모르게 나한테 뭔 엄청난 죄라도 지었나?”

― 어허, 이 오라버니의 속 깊은 정도 몰라보고 그게 무슨 망발이냐?

“정은 초코파이에서나 찾아보시고요. 바쁘다고 먼저 선언할 땐 언제고 왜 갑자기 뜬금없이 전화해서 이상한 소린데? 지금 일하는 시간 아니야?”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뭐 맡겨 둔 사람처럼 저를 찾아 대던 친구였다. 그게 연말만 되면 우울해하는 저를 혼자 두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수혁이 올해는 연말 내내 바쁠 거라며 미리 연락을 해 왔었다. 평소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보기보다 속이 깊고 진중한 면도 있는 이 친구께서 이젠 준성이 있으니 굳이 제가 챙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했을 거라고. 그렇게 혼자 짐작하던 중이었다.

― 벌써 퇴근한 거야? 어딘데? 설마 집에 가는 길이야?

“아니거든? 준성이랑 데이트하기로 했거든?”

― 헐, 무려 데이트를 하신다고? 그럼 지금 준성이랑 같이 있는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도 준성이가 좀 늦는대서 호텔 근처 커피숍에라도 들어가 있으려던 참이었어.”

― 오, 그거 잘됐네. 그럼 잠깐 얼굴 좀 보자. 줄 게 있어.

“음? 네가 나한테 줄 게 있다고?”

― 기대돼지? 궁금하지? 빨리 보고 싶지?

기대되는 것보다, 뭔 꿍꿍이가 있다는 쪽에 좀 더 강하게 촉이 왔지만, 굳이 입 아프게 말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10초도 되지 않는 침묵에 묻어나는 떨떠름함은 충분히 전해지고도 남았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하며 쌓아 온 빅 데이터의 위엄이었다.

― ……아무튼 5분 내로 튀어 가마.

통화를 마치고 나서 정확히 5분도 되지 않아 지독하게 눈에 띄는 노란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펴 보려 애쓰며 바라보는 사이, 역시나 지나치게 눈에 띄는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대번에 주변의 시선이 몰려드는 게 느껴진다.

땅굴을 파고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외면하는 동안, 뻔뻔하게 웃으며 다가온 수혁이 그녀의 앞에 커다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뭐긴, 선물이지. 그것도 무려 커플 선물. 이 오라버니께서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지 않았겠니? 이제 슬슬 너희들에게 필요할 때도 된 거 같고.”

의기양양하게 내놓는 소리에 찝찝함이 더욱 커졌다. 제게만 주는 게 아니라 준성에게까지 같이 주는 거라니, 더더욱 찝찝한 건 그냥 기분 탓인가. 아니면 확실한 빅 데이터가 경고하는 걸까.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고마워. 열어 봐도 되지?”

일단 선물이라니 눈앞에서 풀어 보는 정성이라도 보여야 했다. 현란하게 묶인 리본을 풀어 헤치고 위로 열리는 뚜껑을 붙잡은 순간, 수혁이 제 앞에 손바닥을 턱 하니 들이댔다.

“잠깐. 그거 지금 열면 좀 후회할 텐데.”

상자를 반쯤 열어 가던 손이 멈칫했다. 가뜩이나 찝찝한 인간이 저렇게 말하니 찝찝함 지수가 열 배 쯤 훅 치솟았다.

“왜? 여기서 보면 안 되는 거야? 대체 뭔데?”

“그냥 나중에 열어 봐. 되도록 준성이랑 단둘이 있을 때. 난 미리 경고했어.”

그렇게 말하니 더 필히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수진은 더 주저하지 않고 상자를 열어 봤다. 그리고 그 안에 다소곳이 놓인 야릇한 디자인의 커플 속옷 세트와 알록달록한 입욕제 꾸러미를 확인하고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어쩌면 이렇게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거냐.

“어때? 맘에 들어? 딱 지금 필요할 때 된 거 같아서 특별히 준비해 봤다. 참고로 네가 민망해할까 봐 특별히 아는 누님께 괜찮은 걸로 골라서 잘 포장해 달라고 부탁한 거야. 난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는 물건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써라.”

진지하게 설명을 마친 수혁이 이상하게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혁을 향해 상자를 내밀었다.

“그래, 고맙다. 무지 고마운데, 나 지금 좀 할 게 있어서. 잠깐만 들고 있어 줄래?”

“어, 뭐. 그 정도야.”

흔쾌히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든 수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씨익, 입가를 늘여 웃어 준 수진이 그대로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야! 아, 왜 때리는데?”

“어디서 이런 걸 선물이라고 가져와? 죽을래?” 

“아니, 이게 어때서? 친한 친구 커플한테 속옷 좀 선물한 게 뭐가 문제…… 아! 아야, 아파! 아프다고!”

“너 지금 이거 성추행이거든? 확 고소해 버릴까 보다!”

퍽퍽, 후려쳐 대는 손길을 피하며 몸을 비틀던 수혁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아니이! 성추…… 와, 진짜. 얘가 진짜 무슨 그런 험한 소릴! 야, 너도 나 여친 있을 때 조언이랍시고 어? 이상한 소리 막 하고 그랬잖아. 나 그거 녹음본도 있거든? 들려주랴?”

“시끄러워! 니가 사람이니? 사람이야?”

“아, 아파. 잠깐만. 야, 진짜 아프다. 너 손 엄청 매워.”

결국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린 수혁이 한 손으로 상자를 옮겨 잡고는 다른 손으로 열심히 그녀의 공격을 막아 냈다. 장난기로 가득한 태도에 더 열이 오른 수진이 맹렬하게 주먹을 뻗었다.

“널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어?”

“야, 야. 고작 이런 걸로 둘도 없는 친구 하나 죽이려고? 기껏 좋은 시간 보내라고 분위기 잡기 좋은 아이템까지 선물했는데 칭찬은 못 할망정.”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 수혁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수혁이 얄미워 더욱 기를 쓰며 덤벼든 순간, 휙 하니 피한 수혁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칭찬은 무슨 개뿔이 칭찬 같은 소리! 야, 안 놔? 이거 안 놔?”

“어, 안 놔. 아니 못 놔. 길거리에서 객사하긴 싫다. 맞아 죽는 건 더 싫고.”

“너 이, 씨……!”

“뭐 하는 거야?”

그 순간, 음침하도록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껏 힘겨루기를 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스르륵 그녀의 손을 놓은 수혁이 멀뚱한 얼굴로 그녀의 등 너머를 바라봤다. 그런 수혁을 바라보는 수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등 뒤에 선 이 느낌이.

“오, 준성. 일찍 왔네?”

친절하게도 그 정체를 딱 짚으며 인사를 해 주는 수혁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노려봐 준 수진이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너무도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쏟아지는 시선 속에 우뚝 서 있다. 그 뒤로 시커먼 안개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수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 언제 왔어?” 

“방금.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나 보네?”

태연히 묻는 그의 입가로 근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웃는 건 입뿐이다. 전혀 재미가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는 듯 차갑게 경직된 눈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심장까지 서늘해진 기분에 어색하게 입술 끝만 끌어 올려 웃어 보이는데,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수혁이 보란 듯 그녀에게 상자를 건넸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자 수혁은 준성을 향해 한 손을 올려 보이더니 씩 웃었다.

“햐, 타이밍 예술이네. 그럼 이건 꼭 둘이서 같이 열어 봐라. 난 줄 거 줬으니 이만 가 보마. 수고.”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마친 수혁이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이 양반이! 분위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튀면 어떡해!

경악하며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수혁은 저만치 세워 놓은 차를 향해 쪼르르 사라져 버린 후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굳어 있던 수진이 뒤늦게 고개를 돌려 어느새 제 옆에 다가와 선 준성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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