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1화

무게가 쏠리며 어긋난 입술이 덮치듯 그의 얼굴 언저리를 꾹 눌렀다. 그 서슬에 잘못 부딪친 콧등이 찌릿해 절로 신음이 났다.

“읏, 미, 미안…….”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그의 얼굴을 살피던 수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조금 놀란 눈을 한 채 입술을 가린 남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이거.

완전 내가 덮쳐 버린 것 같은 느낌이잖아.

“되게 야하게 키스하네, 김수진.”

거기다 들려온 말이라니!

심지어 그런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심해 보인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완전히 저만 달아올랐던 거구나 생각하니 딱 죽고만 싶었다. 이 남자, 오늘 저를 수치사 시키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진짜 귀여워.”

게다가 이건 또 뭔 소리야!

절로 입이 벌어졌다. 취향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웃음을 터뜨린 그가 그녀의 허리춤을 붙들며 몸을 뒤집었다.

“헉!”

일순 세상이 휙 뒤집히고 그가 위로 덮쳐 왔다. 곧바로 입술을 눌러 오는 폭신한 감촉에 기다렸다는 것처럼 가슴속이 꾹 조여든다. 발작하듯 뛰어 대던 심장이 이 순간 길게 움직임을 멈췄다.

“입 벌려.”

나직한 속삭임에 홀린 것처럼 열린 입술 사이로 그의 맛이 밀려들어 왔다. 뜨겁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든 혀가 여린 살점을 핥는 사이, 커다란 손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렸다. 뚜렷한 욕망이 깃든 손길은 서슴없이 재킷 안으로 파고들어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감싸듯 움켜쥐었다.

“흐읏.”

작게 토해 낸 신음성이 다시 그의 입안으로 빨려들었다. 얼굴과 귓가를 매만지다 이내 머리카락 틈새로 파고드는 섬세한 손길이.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고 핥다가도, 금세 깊숙이 입안을 파고들어 아프도록 혀를 빨아들이는 집요함이. 진득하게 새어 나온 타액으로 촉촉이 젖어 가는 입술이 너무도 짜릿하다.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묵직하게 저를 눌러 오는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재킷을 붙들었다.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이성과 욕망 가운데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맞추던 저울이 순식간에 욕망을 향해 기울어 간 순간,

“하아, 안 되겠다. 이러다 너 못 내보낼 거 같아.”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힘겹게 입술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지그시 그녀를 주시하는 눈동자는 그녀 못지않게 들끓는 욕망으로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간 멀뚱히 서로를 마주하던 두 사람의 입가에서 동시에 나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정말. 네가 시켜 놓고.”

“그러게. 이거 장난 아니야. 진짜 정신 놓는 줄 알았어.”

이미 후끈하게 달아올라 버린 상태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업무 중이었다. 저 자신이라면 모를까, 이런 일로 그녀의 일정을 망가뜨릴 순 없었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 발그레한 여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준성은 이내 아쉬움이 그득한 손길로 립스틱이 번진 그녀의 입가를 문질렀다.

“크리스마스이브엔 꼭 시간 비워 둬.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은 꼭 널 만나러 갈 테니까.”

느릿하게 움직인 입술에서 나른한 선언이 이어졌다.

“다음 날까지, 전부 내 거야.”

뚜렷하게 의도가 묻어나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 * *

오전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로 돌아온 수진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회의 도중 연회팀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던 그녀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심각해 보였는지 사무실로 들어서던 나 과장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표정이 왜 그래? 피아노 대여 건이 잘 안 됐대?”

“아, 아니요. 다행히 그건 해결했어요. 피아니스트 최선 씨랑 어떻게 연이 닿았는데 그분께서 이번에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영진그룹의 행사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난 며칠은 영진그룹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가수의 공연 건으로 꽤나 골머리를 썩었다. 섭외 가수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었다.

피아니스트 겸 가수인 그는 특정 브랜드의 피아노만을 고집했다. 평소엔 그가 소유한 피아노로 공연을 해 왔는데, 현재 그 피아노는 줄곧 그가 머물러 살던 미국 땅에 있었다. 그곳에서 당장 피아노를 배송시킨다 해도 배를 타고 들어오는 시간만 한 달은 걸리는 통에 공연 당일 날까지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같은 브랜드의 피아노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또 하필 국내에 몇 대 들여놓지 않는 기종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설령 있대도 고작 열흘 안에 그 비싼 피아노를 선뜻 빌려줄 만한 사람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호텔이 소유한 피아노를 잘 조율해 사용해 주십사 부탁해 봤지만, 가수의 태도 또한 완강해 이러다 자칫 공연이 무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거 내가 잘 아는 피아니스트분이 소장하고 있을 텐데.’

그런데 뜻밖에 준성이 그 해결책을 찾아 줬다. 그의 형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는 공연 기획사의 대표와 피아니스트인 와이프가 마침 그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었고, 사정을 전해 들은 그들이 흔쾌히 대여를 허락해 준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오, 그래? 잘됐네. 잘 풀려서 다행인데 왜 표정은 계속 안 좋을까?”

어색하게 웃어 보인 수진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담당자 때문에요.”

“아아, 그 초딩 동창이라던?”

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 과장에게는 이미 영진그룹 담당자와의 악연을 이야기한 후였다. 팀의 책임자인 나 과장에겐 당연히 알려야 할 일이기도 했다.

미연과는 자주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사이라는 걸 다시 만난 첫날에 깨달았다.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그냥 다 묻어 두고, 적당히 비즈니스로만 상대해 줄 생각이었다. 묘하게 제게 악감정이 느껴진다든가, 호텔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제 트리거를 들춰내던 모습 또한 굳이 더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미연은 계속해서 미묘한 태도로 수진의 신경을 긁어 댔다.

얼마 전엔 고객사의 담당자라는 위치를 내세워 제 조카 돌잔치를 위한 연회장을 잡아 줄 수 있냐는 둥, 직원 할인으로 숙박할 룸을 구해 달라는 둥의 요구를 늘어놓으며 사람을 곤란하게 하더니, 바로 어제는 퇴근길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와선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청해 왔다.

개인 시간을 들여 가면서까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이번 행사 건으로 상의할 일이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약속 장소인 강남의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거기서 그녀는 아주 뜻밖의 인물들과 조우했다.

‘어머, 김수진? 너 수진이 맞지?’

‘헐, 가연이가 너 만났다기에 농담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머, 웬일이니.’

어린 시절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괴롭혀 온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의 여자들에게서 겹쳐 보였다. 부반장이었던 인경과 늘 그 곁에 붙어 다니던 정은. 그리고 당시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친구 영주까지.

‘우리 진짜 얼마 만에 보는 거야? 한 17년? 18년쯤 됐나?’

‘와,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어? 대박이다.’

‘일단 앉아, 수진아. 우리 앉아서 이야기하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을 기억해 낸 수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녀들은 그 시절의 일 따윈 기억에도 없다는 듯 깔깔대며 떠들어 댔다. 심지어 진심으로 반갑다는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 앉히려 들었다.

‘아니, 됐어.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런 태도조차 너무도 불쾌했다. 저를 잡아끄는 인경의 손을 뿌리친 수진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애초에 우리가 이렇게 웃으면서 인사할 사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정인경. 넌 나한테 그런 짓까지 저지른 장본인이면서 반갑다는 말이 나오니?’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가슴속을 막고 있던 말이 막힘없이 튀어나왔다. 미연을 만난 이후, 언젠가는 이런 날이 또 올 걸 예상하고는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언제 그런…….’

‘현성이인 척 전화했던 사람이 너희들이라며. 미연이가 그러더라. 그날 너랑 같이 나한테 전화했었다고.’

순간 인경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제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친구들과 눈짓을 주고받던 인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때 우리가 너 따돌리고 그랬던 거,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어. 근데 방금 네가 한 말, 그건 진짜 아니야.’

‘그 목소리 주인공이 네 오빠라던데. 아니야?’

‘그, 그건 맞는데, 전화 걸자고 한 건 나 아니었다고. 나중에 너 따돌리자고 한 것도 미연이었고. 그치, 영주야?’

‘어, 맞아. 그래서 전학 가기 전에 너한테 사과하고 지금은 화해했다고 들었는데.’

영주라는 이름의 친구가 얼른 동조하며 끼어들었다. 별말을 더하진 않았지만, 정은 역시 굳이 부정을 하지 않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이만 간다.’

더는 그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어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리는 저를 차마 붙잡지 못한 그녀들이 ‘금방 가연이가 올 텐데.’라며 중얼거렸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아 버렸는데, 그다지 놀랍지 않아 놀라웠다. 도리어 지금껏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 시절에도 이미 모두에게 고립당한 저를 외면했었고, 전학 가는 순간에도 굳이 저를 찾아와 사과랍시고 또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기껏 사회에서 만나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결국엔 제 상처까지 헤집어 냈지.

이걸 친구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친구는 무슨 개뿔. 걔는 처음부터 너한테 열폭 했던 거야. 좋을 때만 친한 척 실컷 이용해 먹다가 남자애 하나 때문에 삐뚤어져서 그렇게까지 괴롭히는 게 어디 정상인이 할 짓이야? 그래서. 그러고 나서 또 연락은 안 오고?”

“네. 그래서 더 황당해요. 아직도 걔가 무슨 목적으로 절 거기까지 불러낸 건지 모르겠어요. 화해나 하자고 불러들인 것 같진 않았거든요.”

“그치. 그건 멕이려고 불러낸 거지. 하여간 어딜 가나 이상하게 꼬인 사람이 하나씩 있긴 한데, 하필 그게 일로 엮인 사람이니 참 골치네.”

“어쩔 수 없죠. 일단은 행사 때만이라도 별일 없길 바라야죠.”

아마 어제 저를 불러낸 것 역시 같은 선상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굳어 있던 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약점이라 생각했을 테지. 그래서 또다시 그 시절의 가해자를 만나게 해 더 상처 주려 했던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으니 속이 더 꼬여 들었을 텐데.

사실 좀 걱정이지만, 크게 별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 까짓것. 뭔 개소리를 하든 말든 우리야 한 귀로 들어 흘리고, 나중에 달달한 거나 먹으면서 스트레스 푸는 게 최고야. 말 나온 김에 오늘 퇴근하고 한잔할까? 어때?”

“아, 저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 순간 수진이 슬쩍 뺨을 붉히며 웃었다.

“아 참참, 오늘 크리스마스이브구나! 내가 이런 날엔 영 관심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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