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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60화

수진은 짐짓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살짝 삐뚜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이제 어떡할 건데?”

마치 네 엉큼한 속내 따윈 다 꿰뚫어 봤다는 듯 새초롬하게 묻는 말이었다.

당당한 척 내려다보지만 저를 붙잡은 손길에선 잔잔한 떨림이 느껴진다. 살짝 붉어진 뺨은 지금의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기 버거워하는 그녀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지고 싶지 않아 저질러 놓고 그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몰래 두근거리고 있을 그녀가 귀여워서 미칠 것 같다.

그 어설픔이 어쩌면 이렇게도 사랑스러운 건지.

여자에 미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옛 이야기 속 왕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녀가 원한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녀가 작정하고 저를 휘둘러 댄대도 저는 그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휘둘릴 테지. 저 하늘이든, 깊은 바닷속이든 기꺼이 저 자신을 던져 넣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선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제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라는 게 없기에 도리어 순수하게 저 자신만을 봐 줄 수 있는 여자였다. 한 회장의 아들이자, HJ그룹의 후계자인 송준성을 원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 아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작 그녀 자신조차도.

“……왜 그렇게 빤히 보고만 있어?”

“보고 싶어서.”

“이미 보고 있잖아.”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

“뭐래, 정말.”

그거 노래 가사잖아. 투덜거리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배시시 웃음을 머금는다. 투명하도록 천진한 미소에 가슴이 아릿하도록 벅차올랐다.

“좋아한다고 해 줘.”

“어우, 아까부터 쑥스럽게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타박하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었다. 가뜩이나 야릇한 포즈로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있는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자꾸 저런 소리만 해 대니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다. 괜히 오기 한번 부렸다가 꼼짝없이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다.

“그래서 안 해 줄 거야?”

어우, 어우. 내가 미쳐. 중얼거리며 민망해 죽겠다는 듯 몸을 꼬고 입술을 깨물고. 그렇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수진이 쭈뼛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마주 보는 눈빛에 쑥스러움이 가득하다.

“……좋아해.”

처음엔 작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내리깐 채 푸스스 웃고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 너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

그러니 안심하라고. 이 마음이 진짜임을 알아 달라고.

살짝 떨리는 말끝에 그녀의 진심이 선명히 묻어났다. 진짜 연애를 시작한 연인의 설렘 가득한 웃음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통째로 삼켜 버렸으면. 아니, 저 자신만 아는 곳에 가둬 버렸으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제가 가진 힘은 충분히 그 충동을 현실로 이루고도 남았다. 그렇게 자신이 만든 새장 속에 가둬 둔 채로 평생 그녀를 탐하는 상상을 하자 단전으로부터 훅, 하니 열기가 차올랐다. 그런 위험한 계획을 떠올리고서도 죄책감 하나 들지 않는 제 욕심에 절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아…… 큰일이다.”

“뭐가?”

“점점 예뻐져서. 이젠 진짜 감당을 못 하겠어.”

벌써부터 넘쳐흐르는 내 욕심을. 널 향한 내 감정을.

그로 인한 초조함에 미칠 것 같은데, 정작 그녀는 실없는 농담으로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예뻐? 에휴, 콩깍지가 제대로 껴 버렸네. 어떡하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진심으로 측은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게. 내 눈에만 예뻤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문제지. 그걸 일일이 단속할 수도 없고.”

잠시 말을 멈춘 남자의 눈동자가 한층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미묘한 뉘앙스에 수진은 미심쩍은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남자가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이러시나.

“그냥 내 여자라고 소문 좀 내면 안 될까?”

“뭐어? 아니, 아니 그건 아직!”

기겁한 수진이 손을 내저었다.

“진짜 안 돼?”

조금 시무룩해진 투에 살짝 맘이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이걸 그냥 들어주면 내 인생이 꼬일 건 자명했다. 절대로 안 돼.

“부탁인데, 난 지금처럼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유지하고 싶거든? 협조 좀 해 주시죠.”

“뭐가 문제인데? 한창때 남녀가 만나 예쁘게 연애하는 게 죄도 아니고 왜 평화가 깨질 거라고 생각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정말로?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이 남자가 그걸 알아들을까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해 입이 안 떨어진다.

“혹시 알아? 상무님 여친이라고 소문나면 회사 생활도 더 편해질지.”

“허…….”

그 와중에 한다는 소리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빤히 바라보자 준성이 키득거리며 웃어 댔다. 뻔히 다 알면서 장난을 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 그녀도 절로 헛웃음이 났다.

“참 속 편한 소리만 하시네요, 상무님.”

“글쎄. 과연 내 속이 편할까?”

툭하니 말을 받는 남자의 입가로 삐뚜름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도 너 때문에 눈 돌아서 이런 짓이나 벌이는 거 보라고.”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지금은 업무 시간일 텐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저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런 짓까지 벌이고 있는 건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텐데, 그걸 눈앞에 꺼내 보여 줄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이미 연애를 시작했고, 이젠 가장 은밀한 순간까지 함께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선뜻 그의 말대로 따를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제 처지가 참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이 남자와의 공개 연애는 너무도 큰 모험이었다. 아직은 그로 인해 변하게 될 자신의 삶도, 닥쳐올 리스크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꼭 공개 연애가 아니라도 우린 계속 함께할 거잖아. 둘이 있을 때 많이 표현하는 걸로는 안 되는 거야?”

당장 들어줄 수 없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는 대신, 그의 기분이라도 어루만져 주고 싶어 꺼낸 말이었다.

“그럼, 대신에 약속 하나만 해 줘.”

“약속? 알았어. 뭐든 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 뭔데?”

눈을 빛내며 되묻자 마주 바라보던 그의 입술 끝이 삐죽 치솟는다.

“내년 중에 나랑 결혼하겠다고.”

“……어?”

순간 당황한 나머지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 단어가 여기서 왜 나와? 더군다나 이렇게 갑자기요?

“뭐든 들어준다고 했지, 방금?”

“아니, 자, 잠깐만. 이건 아니지!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 이야기를……!”

“사귄 기간이 중요한가? 이미 서로 좋아한 것만 10년인데. 그리고 우리 나이엔 진지하게 상대 고를 때라며. 그건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시작하라는 소리 아니었어?”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제 남자가 아닐 때야 상관없는 소리였지만, 정작 그와 연애를 시작해 버리니 저 말보다 더한 수렁이 없었다.

도무지 수습할 말이 없어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리자, 픽 웃어 버린 그가 보란 듯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그와 맞붙으며 더욱 벌어진 다리 사이로 두툼한 부피감이 느껴진다. 옷을 사이에 둔 채로도 맞닿은 자리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열기가 짜릿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을 때였다.

“난 평생 너 하나만 안을 각오로 이 관계 시작한 거야.”

금방이라도 제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애초에 날 이렇게 만드는 사람도 너뿐이었고.”

한결 낮아진 목소리에 은밀함이 깃들었다. 그 밤의 열기를 기억하는 몸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얼굴 전체로 홧홧하게 열이 오르다 못해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런데 네가 나랑 결혼할 맘이 없다 하면 난 평생 독수공방하는 수밖에 없잖아.”

“무슨, 그런…….”

“설마 진짜 그렇게 둘 생각이었어?”

제가 이 남자에게 유독 약한 건지. 아니면 이 남자의 몰아가는 재주가 쓸데없이 남다른 건지.

가슴이 벌렁거려 정신을 못 차리겠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해 바짝 말라붙은 입술만 꾹꾹 감쳐물며 시선을 내리깔아 보지만, 방정맞게 뛰어 대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아, 혹시…… 나 침대에서 별로였나?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그, 그런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건데!”

두 번만 별로였다간 사람 골로 가겠다!

도저히 가볍게 듣고 넘길 수 없는 말에 결국 버럭 해 버린 그녀가 기어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한 그의 어깨를 힘껏 내질렀다.

“사람 곤란하게 이상한 소리만 골라 하고. 왜 이리 짓궂어진 거야, 정말.”

“그러게. 나 되게 신사적인 남자인데, 왜 너한테만 이러지? 너 때문에 하도 마음고생을 해서 내 무의식이 자꾸 삐뚤어지나?”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인 준성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어루만지며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봤다. 길게 쌍꺼풀진 눈매와 모난 곳 없이 고운 콧날. 보란 듯 삐죽거리는 통통한 입술을 천천히 눈에 담던 준성이 문득 미소를 머금었다.

“입술. 처음 보는 색인데.”

“이런 것도 알아보는 거야?”

“네가 했던 건 다 기억하니까.”

이건 정말 무섭다고 해야 할지, 감동스럽다고 해야 할지.

“예쁘네. 잘 어울리고.”

다시 이어진 말에 그녀의 입가에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그때 네가 사 줬던 거야.”

그가 막무가내로 안겨 줬던 그 비싼 화장품들은 결국 그녀의 화장대 위에 고이 자리를 잡았다. 그냥 받을 수 없다고, 굳이 받는다면 립스틱만 받겠다고 말해 봤지만, 이미 같은 물건을 똑같이 사들여 놨다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만 들었다. 그렇게 돈지랄 앞에 무력한 제 현실을 깨달은 그녀는 얌전히 제게 쥐여진 사치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이제 곧 없어질 거 같은데. 괜찮나?”

나른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지 않아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럼 키스해 봐.”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당장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고 싶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먼저 시도하기 전엔 움직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 알 수가 있나.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재촉하듯 고갯짓을 하더니 눈까지 감아 버렸다. 어지간히 고집이 느껴지는 태도에 결국 웃음을 터뜨린 수진이 그의 얼굴을 붙잡으며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얌전히 기다리는 입가를 가만가만 건드리다 이내 폭신하니 감촉이 좋은 입술을 머금고 살짝 빨아들였다.

심장까지 간지러워질 것 같은 감촉에 절로 몸이 꼬여 들었다. 덮치고 있는 건 분명 저 자신인데, 왜 제가 더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기왕 시작한 일, 여기서 물러나고 싶진 않았다.

떨려 나오려는 숨을 삼키며 그의 도톰한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입 안쪽의 여린 살갗을 살며시 핥았다가 그의 혀를 건드려 가며 질척하게 감겨드는 타액을 휘저었다. 나른하게 새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가 아찔하다. 머릿속을 헝클여 대는 감각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항상 그가 먼저 시작하고, 그가 이끌어 가는 대로 끌려가기만 했던 스킨십을 제가 주도한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보다 우위를 선점하고 그의 흥분을 유도해 내는 이 행위가 제 안의 야릇한 욕망을 일깨우는 것만 같았다.

좀 더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충동에 수진은 더욱 깊이 혀를 밀어 넣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코끝에 닿는 그의 체향과 혀끝에 감기는 그의 맛이 지나치게 황홀했다. 정신없이 그와 혀를 섞으며 무릎으로 일어나 그를 향해 덮쳐누르듯 몸을 기울인 순간,

툭.

“윽!”

“흐읍!”

그대로 뒤로 넘어간 남자와 함께 겹쳐진 채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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