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59화
“아니,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하니 이 남자가 업무 시간에 저를 불러 이런저런 짓을 할까. 그것도 본인이 버젓이 근무 중인 호텔의 객실에서.
물론 객실 층을 돌아다니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극히 드물긴 하다. 복도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그걸 확인하려 들 사람도 없을 테고.
게다가 그 격렬한 밤을 보낸 날로부터 대략 일주일 정도 지났으니 슬슬 쌓일 시기가 되기도 했지. 아니, 이미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할 지경이 된 건가?
“아니, 그거 아니야. 아니니까 정신 차리자.”
아무래도 음란마귀가 제대로 끼어 버린 건 이쪽인 것 같다. 재빨리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날려 보낸 수진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집어넣고는 다시 호텔의 로비로 들어섰다. 하늘 같은 상무님이 호출을 하신 이상, 일단은 응해드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근데 이 남자가 방금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았지? 혹시 사방에 첩자를 깔아 놨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이미 2203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괜히 제 옷차림을 한 번 돌아보고 짧게 심호흡까지 하고 나서야 긴장한 손끝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이상하게 졸아붙어 있던 심장은 이윽고 문 너머로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묘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쿵쿵, 세찬 박동을 이어 갔다.
달칵.
마침내 문이 열리고 훤칠한 실루엣을 발견하자마자 슬며시 떠올랐던 입가의 미소는 이내 마주친 남자의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스르륵 가라앉았다.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지만, 눈빛엔 감정이 없었다. 유난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뭐지?
의아한 눈을 깜빡이는 사이 준성은 검지로 제 입술을 가로지르더니 좀 더 문을 열어젖히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들어오라는 뜻을 읽어 낸 수진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쿵, 하고 스산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뭔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저,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그 순간 휭하니 그녀를 가로질러 들어선 남자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수려한 뒷모습을 보며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역광을 받으며 돌아선 그가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요.”
“아, 네.”
툭하니 튀어나온 말은 존대였다. 단둘인데도 굳이 존대를 쓰는 이유가 뭔지, 생각할 새도 없이 먼저 몸이 움직였다. 따갑도록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2인용 자리에 앉은 수진이 들고 온 서류철을 옆에 내려놓고는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엔 꽤 널찍하다 생각해 온 그랜드 디럭스 룸인데, 지금은 숨이 막히도록 좁게 느껴진다.
“계약은 잘 마쳤습니까?”
“아,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진행하고 왔습니다.”
역시 일 관련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 더 떨어질지 몰라 절로 공손해진 양손이 허벅지 위로 모여들었다.
“염려해 주신 덕분이라……. 지금 뭐가 문제인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라니.
한층 심각해진 투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눈동자를 굴려 가며 빠르게 이전의 일과를 짚어 보지만, 도무지 문제 될 거리라곤 잡히지 않아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특별히 어떤 트러블이 생길 만한 건수는 전혀 없었는데.
“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하, 뭔지 모른다? 안 되겠네, 이거.”
설핏 헛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수진은 다시 긴장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창가에서 몸을 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눈앞에 섰다. 순식간에 높아진 눈높이를 감당 못 한 수진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그를 마주 봤다.
“김수진 씨. 아까 피트니스에서 고객에게 했던 설명 기억납니까? 그대로 내 앞에서 다시 한번 해 볼래요?”
아, 그 장면을 본 거구나.
그렇다 해도 지금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어쩌랴.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 보는 수밖에. 잠시 머뭇거리던 수진은 곧 침착하게 기억을 떠올려 가며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읊어 봤다.
“아니. 아까랑 다른데요. 다시 해 봐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꾸라니.
매번 똑같이 하는 말이기에 오늘이라고 특별히 다른 내용을 입에 올릴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시설에 관한 설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대체 뭐가 문제지? 영문도 모르고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려니 초조한 마음에 점점 더 표정만 굳어 갔다.
“다시.”
……이거 싸우자는 건가?
순간 울컥 치솟은 감정을 억누르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른 건 몰라도 일로 문제를 일으켜 본 적은 없었다. 100% 똑같은 워딩은 아니겠지만, 했던 말을 입에 올려 보니 점점 기억이 또렷해지며 잘못된 내용이 없다는 확신이 섰다. 무슨 꿍꿍이인 줄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생트집을 잡는 거였다.
‘한 번만 더 해, 진짜. 확 들이받아 버릴까 보다.’
공과 사를 구별해야 할 장소인 건 알지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 되니 이젠 상무님이고 뭐고, 얄미워서 등짝부터 후려치고 싶은 생각만 굴뚝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며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벌써부터 떨려 나오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얼굴 옆을 휙, 하고 스쳐 갔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순간, 그대로 뒷덜미가 붙들렸다. 이게 뭔 일이니? 생각할 새도 없이 훌쩍 가까워진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슬쩍 눌러 왔다.
“표정이 틀렸잖아.”
입술을 댄 채 속삭인 그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느른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입안의 여린 살점을 핥으며 깊이 파고들었다가 천천히 빠져나가며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길게 빨아들였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눈을 뜬 채 굳어 있던 수진은 뒤늦게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근사하게 휘어진 입매를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띵하다.
설마.
“아까 그 남자 앞에선 잘도 웃더니만. 나한테는 왜 그런 얼굴인데?”
“……너 진짜!”
그제야 이 남자의 짓궂은 장난이었음을 깨달은 수진이 그의 가슴팍을 퍽!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세게 내질렀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맞은 자리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 생각보다 아픈데, 이거?”
“그럼 아프라고 때렸지! 예쁘다고 안마해 줬겠니, 지금? 난 진짜 뭐 잘못한 줄 알고 심장 터지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이런 장난을 해!”
“아, 화 많이 났구나. 우리 김수진 씨가.”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세게 힘을 줘 내질렀는데도 아프다 시늉만 하지 전혀 아파 보이지 않는 것도 얄미운데, 가슴팍은 또 어찌나 단단한지 때린 제 손만 욱신거렸다. 게다가 눈앞의 남자는 뻔뻔하게도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당당히 양팔까지 벌려 보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화 풀릴 때까지 때려. 맞아 줄게.”
와, 정말!
더욱 울컥한 수진이 양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지만, 그 주먹은 끝내 허공에서만 부들거렸다. 마음 같아선 더 때려 주고 싶은데, 저 잘난 용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도저히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안 때릴 건가?”
아, 정말 얄밉다.
“그럼 이제 안아도 돼?”
이런 남자에게 약한 저 자신도 밉다.
차마 하지 말라고는 못 하고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당당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못 이긴 척 훌쩍 끌려 들어간 몸이 너른 품 안에 푹 잠겨 들었다.
정말 한숨이 나올 만큼 쉽게 녹아내리고 마는 자신이 못마땅해 괜히 몸을 뒤채자 그녀의 머리 위로 턱을 올리며 더욱 세게 끌어안은 준성이 퉁명스레 말을 이어 갔다.
“너무 늦어, 김수진.”
“뭐가?”
“아직도 나만 널 너무 좋아한다고. 난 다른 놈이 너랑 마주 보고 있는 꼴만 봐도 눈이 뒤집히는데, 넌 별로 내 생각도 안 하는 거 같아. 그런 마른 멸치 같은 놈 수작질에도 그렇게 예쁘게 웃어 주질 않나. 같은 회사에 애인이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마주칠 줄 알고 그러고 있냐.”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깊은 울림이 스며들었다. 그렇게나 얄밉더니만, 정작 이렇게 온기를 나누며 투정을 듣고 있으려니 가슴속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아 절로 입꼬리가 뺨을 타고 올랐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 생각보다 귀엽게 질투를 한다.
그렇게 안달하며 제게 매달리는 모습이 사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제 것이라도 챙기듯 끌어당길 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들뜨고, 한껏 예민해진 눈으로 경계심을 내보일 때면 머릿속이 아득하도록 설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슬쩍 남자의 품을 밀어 낸 수진이 다시 눈을 흘기며 따져 물었다.
“그렇다고 그런 장난을 해? 못됐어, 정말.”
“네가 날 애태우는 건 생각 안 하고?”
“그게 아니라, 난 일하는 시간이니까 당연히 일에 집중한 거뿐이거든요? 하여간 이상한 데서 질투하기는. 그렇게 질투 많은 남자 매력 없는데.”
부러 그를 외면한 채로 툭하니 내뱉고는 몰래 웃음을 머금었다. 매번 저를 쥐고 흔드는 이 남자에게 소심하게나마 반격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도발하듯 떠올랐던 미소는 또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 내며 눈 녹듯 가라앉았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짙은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친 순간, 주변의 온도가 5도쯤 낮아진 것처럼 한기가 밀려들었다.
“진짜 화나는데…… 예뻐서 화도 못 내겠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툭하니 내놓는 말이 묘하게 짜릿하다.
아, 아무래도 나 변태 맞나 봐.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괜히 한 번 더 중얼거려 봤다.
“화내면 누가 무섭기나 하데?”
“무슨 여자가 남자랑 단둘이 호텔 방에 있으면서 긴장도 안 해.”
“…….”
“확 덮쳐 버리고 싶게.”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으르렁거리듯 경고하는 남자의 태도에 숨이 막힐 것처럼 긴장감이 밀려든다. 팽팽하게 당겨진 감각이 그의 시선을 따라 올올이 곤두선다.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저 역시도 틈만 나면 이 남자와의 뜨거운 밤을 되뇌곤 했었다. 강하게 저를 휘어잡던 그 손길이 매 순간 그리웠다. 가만히 그를 마주 보던 수진이 유혹하듯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사르르 접히는 눈매를 발견한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당장에라도 훅 덮쳐 와 저기 보이는 침대에 저를 짓누른대도 이상하지 않을 눈이었다.
이거 너무 도발했나.
바짝 긴장한 채로 말라붙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을 때였다.
픽 웃음을 머금은 그가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풀더니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로 올라와 봐.”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물어본 거 아니었어?”
그새 또 여유를 찾아 버린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숫제 고양이라도 불러들이듯 다시 허벅지를 두드리고는 고개를 까닥이는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분명 또 당황하는 제 꼴을 보며 즐기고 싶은 거겠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줄까 보냐.
오기가 생긴 수진이 대뜸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리곤 대담하게 다리를 벌려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았다. 빤히 제 얼굴을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양손을 그의 목에 감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자, 올라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