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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58화

한 회장이 머무는 스위트룸의 응접실은 차디찬 침묵만이 가득했다. 회의용 테이블 앞엔 대여섯 명의 임원들과 그 수행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상석에 앉은 사람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따금씩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들은 눈에 띄게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 리조트 내 식음료 사업권을 따내서 운영 중인 업체가 알고 보니 한준우와 채연화가 최대 주주로 있는 곳이고, 거기서 지금까지 3년 동안 두 사람에게 다달이 급여까지 지급해 왔다, 이 말입니까?”

한 회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탕,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던져 놓았다.

“굴지의 건설사 사장이 이제 대학생인 아들에 얌전히 내조하는 와이프까지 동원해 가며 그런 쥐새끼 같은 짓을 해? 하…….”

노여움 가득한 음성에 윤 이사를 포함한 임원들이 움찔 어깨를 접었다.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저만치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만이 덤덤한 얼굴로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한 회장이 내던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비자금 건이 터졌을 때부터 관련 비리가 한두 건이 아닐 거란 것쯤은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마저 수려한 남자의 말에 엄하게 굳어 있던 한 회장이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하도급 업체에서 뒷돈을 받아 챙기고, 재개발 구역 조합원들을 매수하고, 구청 공무원에게 뇌물 상납까지. 비자금 수사 이후로 한 달 사이에 밝혀진 건만 이 정도인데 뭐가 더 나온들 새삼스럽지도 않지요.”

능청스럽게 덧붙인 준성이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약해지는 미소에 잔뜩 찌푸려 있던 한 회장의 미간도 슬며시 풀어진다. 이내 조용히 손을 들어 주변을 물린 한 회장이 준성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 사장은 절대 혐의를 벗지 못할 테니 나로서는 충분히 밀어낼 명분이 서. 문제는 이 건이 지금 네가 맡은 일과 엮여 있다는 점이지. 분명 발표 전 프레젠테이션 때도 다들 이 건으로만 물고 늘어질 테고.”

“어차피 한 사장님은 면세 사업과는 전혀 무관하고, 수사 과정에서 본인 일가족과 건설사 쪽 임직원만 연루되어 있다는 건 밝혀진 상태니 최대한 팩트로만 대응하면 됩니다. 다만, 한번 박혀 버린 인식을 완전히 바꾸기까진 시간이 모자라서 지금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당분간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겠죠. 그것을 상쇄시킬 만한 대책 또한 구상 중입니다.”

“그래. 어련히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다만.”

한 회장의 눈빛에 착잡함이 어렸다. 심사 발표일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음해성 공작을 방어하느라 준성은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전달되는 소식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새벽 일찍부터 시작된 일과는 종종 밤을 잃고 다음 날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아들이 혹여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는 와중에도 한편으론 보란 듯이 무언가 해내길 바라고 기대하게 된다. 이것이 누구보다 훌륭하게 성장한 아들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부모로서의 욕심인지, 아니면 믿을 만한 후계자를 원하는 기업인으로서의 욕심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소중했던 그녀가 점점 제 후계에 연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몸에 이어 이젠 마음마저 늙어 간다는 증거겠지.

“어쨌거나 한 사장을 완전히 몰아내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거니.”

다시 냉정해진 말투로 상황을 정리한 한 회장이 테이블 한쪽에 곱게 놓여 있던 서류를 집어 그의 앞에 내놓았다.

“실은 그것 때문에 널 부른 것도 있구나.”

“이게 뭡니까?”

“도움이 될 만한 조건으로 골라 봤다. 조만간 시간 좀 내 보거라.”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려던 준성이 그대로 멈칫했다. 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이 다시 한 회장을 향하며 눈에 띄게 굳었다.

“전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래. 그건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 문제는 다르잖니.”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아들의 태도에도 한 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네 안사람이 된다는 건, 언젠가 우리 그룹의 안주인이 된다는 뜻이기도 해. 네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그 아이가 과연 그 짐을 짊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냉정하게 묻는 한 회장의 머릿속으로 방금 전, 호텔 로비에서 발견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발칙한 꿈을 품고 있는 것치고는 꽤 참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이에겐 꽤나 호감상일 테지만, 제게는 그 고운 얼굴마저 음흉해 보여 영 탐탁치가 않았다.

분명 제 얼굴만 믿고 온갖 이득을 누리면서 살아왔을 테지.

그런 영악한 아이에게 막중한 책임이 필요한 이 자리를 어떻게 맡길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행복한 법이다. 네가 진정 그 아이를 생각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판단할 거라 믿는다.”

더 이상의 말은 들은 필요도 없다는 듯 다른 서류로 눈을 돌리는 한 회장을 잠시 바라보던 준성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떤 말씀을 하신대도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멈칫한 한 회장의 시선이 다시 준성의 얼굴로 향했다.

“회장님께서는 늘 사람이 가진 힘을 중히 여기셨죠. 어떤 출신이나 배경보다 그 사람이 이뤄 온 성과와 노력을 가지고 평가해 주시곤 했죠. 전 그런 회장님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 어떤 스승보다 회장님을 깊이 존경하고, 닮기 위해 노력해 왔고요.”

“…….”

“그런 제 눈에 보인 사람이에요.”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엔 신뢰가 가득했고,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투명하리만큼 맑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일부러 꾸며 내려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믿고 확신해 온 것을 막힘없이 꺼내 놓는 투였다.

그래서 더욱 떨떠름해진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남은 말을 밀어냈다.

“그래. 어떤 장점을 가진 아이기에 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해지긴 한다만, 나로서는 온전히 그 말을 신뢰할 수만은 없구나. 네 눈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때론 감정이라는 게 사람의 판단력을 흐릴 때가 있으니 하는 말이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 직접 증명해 보일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

마치 이런 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대꾸에 한 회장의 미간이 다시 모여들었다.

“물론 당장은 아닙니다. 지금은 맡은 일에 좀 더 집중해야 할 때니까요. 무엇보다 면세점 건은 처음으로 맡게 된 제 프로젝트니 오로지 제힘으로만 마무리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래. 알았다. 이만 가 보거라.”

일단은 한 걸음 물러나는 수밖에.

* * *

룸을 나선 준성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내 룸 입구 근처를 서성이며 대기하던 김 비서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김 비서는 습관처럼 지하 1층을 먼저 누르고는 뒤이어 물었다.

“바로 집무실로 가시겠습니까?”

“기획실 회의는 오후 5시로 미뤘다고 했었죠?”

“네.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피트니스라도 들러 보죠.”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다시 10층을 누르고는 먼저 눌렀던 지하층을 취소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수영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자기 관리를 해 온 사람이니 여유 시간에 피트니스를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뭔가 복잡한 듯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모습이긴 했지만, 그 역시 한창 일이 꼬이는 와중이니 평소 보이는 모습에서 크게 벗어난 건 아니라 생각했다.

정상의 범주 안에 있었던 존재가 조금 이상해진 건, 운동복을 갈아입고 즐비한 운동 기구 사이로 들어섰을 때였다.

“잠깐만.”

창가의 러닝 머신으로 향하던 준성이 어느 순간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곱게 묶은 긴 머리카락과 단정히 갖춰 입은 정장 차림. 작고 가녀린 여자의 옆모습이 이상하도록 눈에 박혀 들었다.

“무엇보다 저희 호텔에서는 운동복부터 원하시면 운동화까지 대여가 되거든요. 짐 부담 없이 몸만 와도 된다는 게 장점이에요. 특히 출장으로 오신 분들은 더더욱 그런 것들을 챙겨 다니기 쉽지 않으니까요.”

사근사근한 말씨로 설명을 마친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그의 입가에도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여자를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를 들뜨게 했다. 아직도 저를 발견하지 못한 여자를 향해 홀린 듯이 걸음을 떼려 했을 때였다.

“그거 참 마음에 드네요. 실은 저도 몸만 와 줄 여자 친구 구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왠지 저랑 잘 통하는 것 같은데요, 하하.”

갑자기 운동 기구 틈에서 툭 튀어나온 남자가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동시에 준성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곱게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직선으로 다물린 순간 그 옆에서 괜히 몸이 달은 김 비서가 얼른 덧붙였다.

“객실판촉팀 김수진 지배인이네요. 고객과 룸쇼 중인 모양입니다.”

“……그런 거 같군요.”

피트니스를 돌며 목이 칼칼하도록 설명을 늘어놓고 난 수진은 자연스럽게 1층의 로비 라운지로 걸음을 이끌었다.

“기구들 관리도 잘되어 있고, 트레이너가 상주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긴 하는데, 뭐 사실 호텔 시설이야 다 거기서 거기라서 크게 감흥은 없네요. 그러다 보니 보통은 사람을 보고 결정하게 되는 거 같더라고요.”

“맞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서비스니까요. 역시 오래 담당하신 분이다 보니 판단하시는 눈도 탁월하시네요.”

“그렇게 되는 건가요? 이거, 얼마나 더 괜찮은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는 건지 기대해 봐도 될까요?”

“기대해 주신다니 저야말로 감사한데요. 그럼 마지막으로 보신 룸 타입을 기준으로 연간 숙박 일수 200일에 설명드렸던 할인율을 적용하면…….”

차 한 잔을 두고 마주 앉아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마친 수진이 슬쩍 객실 특판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이젠 이 일도 제법 능숙해져서인지, 대화를 하다 보면 바로 계약을 하고 돌아갈 고객인지 아닌지가 확실히 구별이 되는 편이었다.

지금의 남자도 다소 찝쩍거리는 듯한 언행만 아니라면 그리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며 계약을 유도하자 남자는 이내 흔쾌히 사인을 마치고는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자리를 나섰다.

“자, 그럼…….”

문밖까지 나가 정중히 고객을 배웅하고 난 수진이 짧게 숨을 뱉고는 사무실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드르륵, 떨리더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끝났으면 잠깐 나 좀 보죠. 본관 2203호.]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가슴팍으로 당기며 주변을 둘러봤다가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다시 화면을 열었다. 절로 웃음기가 묻어나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분명 매순간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이름이 보낸 메시지인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이미 선을 넘어 버린 마음은 아무렇지 않게 객실로 저를 호출해 대는 남자의 대범함에 또다시 이어질지도 모를 야릇한 순간을 상상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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