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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57화

드디어 시작이구나.

커피를 건네자마자 들려오는 말에 수진은 침착하게 미리 준비해 둔 대답을 꺼냈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았었거든요. 조금만 더 눈 좀 붙인다는 게 그대로 또 잠이 들어 버렸나 봐요. 꼼짝없이 지각이었는데 잘 처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뭐 고마워할 거까진 없고.”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도 없이 대꾸한 나 과장이 호로록 커피를 머금고는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썰부터 확실하게 풀어 봐.”

“썰……이라뇨?”

“그래, 우리 별님 입술은 어떻든?”

“……!”

“거 두께가 좀 있는 게 엄청 보드라울 거 같긴 하던데. 가슴에 그런 열정을 품고 사시는 분인데 뜨겁기는 또 얼마나 뜨거웠을꼬. 그분 온기만 남아 있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향기가 좋은데 그 품 안에서 직방으로 맡으면 아이고……. 내 심장이 다 터지겠네, 정말.”

푸념 섞인 나 과장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수진은 뒤로 넘어갈 뻔한 걸 간신히 버텨 냈다. 아니, 이분이 귀신을 삶아 드셨나. 어떻게 알았지?

“저,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과장님.”

“자기야. 우리 자기는 다 좋은데, 가끔 거짓말을 너무 못하더라.”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나 과장이 재킷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작은 손거울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말이야. 거사 치른 다음 날엔 거울을 제대로 확인해야 하는 거야.”

“네?”

얼결에 거울을 받아 든 수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자 나 과장은 다시 커피를 머금으며 귀밑 언저리를 톡톡 두드렸다. 설마…….

“헉!”

기겁한 수진이 손으로 제 목을 감쌌다. 정확히 귀밑 턱이 시작되는 아래 움푹 들어간 자리에 새끼손톱만 한 생채기가 있었다. 하필 딱 그늘의 경계가 닿는 자리라선지 언뜻 봐선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나 흔적이 남았을까 봐 반 이상 목을 덮는 니트를 입고 머리까지 풀고 왔는데 여기가 함정이었네!

설마 일부러 그 자리를 노린 거야?

이 영악한 남자 같으니라고!

경악하는 수진을 보며 나 과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재밌다. 재밌어 죽겠네, 정말. 크큭…….”

“웃으실 때가 아니에요, 과장님. 호, 혹시 컨실러 있으세요?”

“내 서랍에 하나 처박아 둔 게 있긴 있을 거다만.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진짜 상무님 작품이야?”

차마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미 왕창 꼬리가 밟힌 상태긴 했지만, 막상 제 입으로 수긍하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어떻게 알긴. 아주 널 바라보는 눈빛에 기승전결 서사가 쫙 펼쳐 있는데 어떻게 몰라. 더군다나 평소엔 안 그러던 애가 그 사람만 보면 꼭 어디 나사라도 하나 빠진 것처럼 굴잖아. 보나 마나 뭔가 있네, 싶었지.”

너무도 정확히 저를 꿰뚫는 지적에 소름이 다 돋았다.

“그리고 어제 오후쯤에 너랑 상무님이랑 같이 차 타고 어디 나가더라는 소식이 들어왔거든.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하필 이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져선 그 후로 또 소식이 없네?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지.”

그러니까 이미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패턴이 너무 뻔히 보였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지금껏 연애 한번 못 한 여자가 미묘한 곳에 도장까지 쾅쾅 찍어 왔으니 모를 수가 있나.

“뭐, 이미 그 전에 회식 때 너 취한 거 보는 눈이 영락없이 애인 단속하는 남자 눈이네, 싶더라.”

그렇게 눈에 띄게 이상한 짓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왠지 눈앞이 깜깜해진다. 대체 몇 명이나 더 알고 있는 걸까.

“아 참, 걱정은 말고. 아직은 나 말고 눈치챈 사람 없는 거 같으니까. 실은 지난번 점심때 상무님이 친구 보고 싶어서 자주 온 거라는 식으로 수습해 주셨거든. 다행히 다들 별 의심 없이 믿는 눈치야. 솔직히 워낙 별세계 사람이니 설마 엮이겠나 싶은 마음도 있을 거고.”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은 했었지만 점잖게 유리의 호들갑을 누르던 말투는 역시나 저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새삼 깨달은 나 과장의 마음이 고마워서 절로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호로록, 커피를 들이켜는 나 과장의 눈가에도 흐뭇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근데 연애 시작한 사람치고 어째 표정이 영 밝지가 않네. 왜, 회장님 때문에?”

바로 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누가 봐도 그게 가장 큰 장애가 될 거란 뜻이겠지.

“괜찮아요. 다 알고 시작한 거니까.”

그럼에도 대답은 의외로 덤덤히 튀어나왔다. 이미 마음은 굳게 먹은 상태였지만, 직접 입 밖으로 꺼낸 건 처음이라 그녀 스스로도 좀 놀랐다.

“실은 대학 다닐 때부터 쭉 좋아했었거든요. 유학 떠나기 전에 진짜 마지막으로 고백이라도 해 보자, 마음먹고 되게 진지하게 불러냈다가 결국 딴소리만 해서 얘를 화나게 한 적도 있고요.”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반응을 보고도 왜 그 마음을 몰랐었나 싶다. 그렇게나 뚜렷하게 전해지던 실망감과 배신감이 무슨 의미였는지. 그렇게 굳어 가던 얼굴을 눈 뜨고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게 새삼 미안할 만큼.

“이미 충분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나 가까이서 쭉 함께 있었는데도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조차 안 했어요.”

더는 누구에게도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자신을 정당화했었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마음을 무시해 왔다는 걸, 어제 제 앞에서 상처받은 얼굴로 돌아서는 그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전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평생 좋아한다는 말도 못 했을 거고요.”

그리고 지금의 이 행복조차 몰랐을 테지.

“그래서 다른 건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지금은 그냥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다짐하듯 내놓은 말은 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에 가까웠다. 올곧은 시선을 마주 보던 나 과장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수진이 많이 단단해졌네.”

상사로서 지켜본 수진은 늘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단지 수더분한 성격에서 비롯된 게 아니란 것쯤은 일찌감치 꿰뚫어 봤다.

그건 이미 인간관계에서 한번 상처를 받아 봤고, 그 아픔을 두려워하기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태도였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과의 트러블을 피하는 모습이 딱해서 괜히 한 번 더 신경 쓰게 되고, 더 마음이 가기도 했었다.

“사랑이란 게 참 좋아. 그렇지? 그 좋은 나이에 그 좋은 감정이 찾아왔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누려 볼 거면 살 이유가 없지.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실컷 좋아하고, 많이 사랑해. 그게 남는 거야.”

그런 수진이 처음으로 제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한 회장의 존재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그 말에 왜 제가 더 기쁜지 모르겠다.

“축하해. 첫 연애, 맞지?”

은근히 물으며 눈을 찡긋해 보이는 나 과장의 얼굴에는 뜻 모를 음흉함이 가득했다. 연애를 시작한 저보다 더 들뜬 것처럼 보여 절로 웃음이 났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나 재밌으라고 하는 건데. 그럼 일단 그 흔적부터 좀 해결하자. 따라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 과장이 커피 잔을 든 채 탕비실을 나섰다. 목적을 달성한 나 과장의 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잔뜩 들뜬 나 과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도 모처럼 즐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내일도 오늘처럼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끝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 모두 행복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 * *

오후 일정을 위해 수진은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해가 저물어 갈수록 일은 더 바빠지고 호텔로 걸음을 할 일도 많아졌다. 영진그룹 건으로 본관 지하 사무실에서 연회팀과 만나 몇 가지 일을 논의하곤 다음 일정으로 신규 고객과의 룸쇼가 예정되어 있어 다시 로비로 들어섰을 때였다.

“어, 수진 씨. 일은 잘 해결됐어요?”

컨시어지 데스크 앞을 지나가는데 윤 매니저가 알은척 말을 건네 왔다. 수진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섰다.

“네, 정말 덕분에 살았어요. 진짜 예약 다 받아 놓고 갑자기 그렇게 캔슬을 해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며칠 내내 속 끓인 거 생각하면 정말, 으으…….”

“이맘때 그런 곳 많아요. 굳이 예약 안 받아도 오는 손님으로 다 채울 수 있다, 이거죠, 뭐.”

“그런데 그러고도 남을 거 같아서 더 화나요. 어쨌든 저라도 앞으로 거긴 다시 상종 안 하려고요.”

행사를 위해 단체로 방문한 거래사 직원을 케어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은 일인데, 조건에 맞는 장소가 없거나,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있어도 예약을 받질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찾은 컨시어지 데스크에서 예약을 받지 않던 식당 중 한 곳이 윤 매니저와 친분이 있단 사실을 알고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50여 명분의 차비가 제 주머니에서 빠져나갈 뻔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수진이 문득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약속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지만, 호텔에서의 만남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 있는 쪽이 나았다.

“연말연시 지나고 언제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신세도 갚을 겸, 제가 대접할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어우, 저야 좋죠. 수진 씨 리스트 기대되는데요?”

“흐흐, 저 그럼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이만…….”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정문으로 나가 있으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난 건지 총지배인과 팀장급 직원 몇이 우르르 정문으로 향하는 게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인가, 얼떨떨해 있는 두 여자에게 급히 컨시어지 데스크로 들어선 박 지배인이 소식을 전했다.

“회장님 오셨어, 회장님.”

“아.”

윤 매니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진 역시 덩달아 그 자리에 굳었다. 원래도 종종 호텔을 찾기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같은 일개 직원과 마주칠 만한 상황이 벌어질 리도 없기에 지레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사무직군으로 이동하며 접할 일이 확 줄어든 탓인지, 면역력도 줄어든 기분이라 해야 하나.

아니, 꼭 그 이유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사이 정문을 통해 들어선 한 회장이 로비를 가로질렀다. 경외감 어린 시선이 절로 그녀를 향했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에서는 강인하고 냉정한 한 회장의 성품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다.

그런데 우르르 뒤따르는 임원들을 향해 뭔가 지시를 내리는 듯 말을 건네며 주변을 둘러보던 한 회장의 시선이 문득 이쪽을 향했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이 똑바로 그녀의 시선을 뚫고 들어왔다가 자연스럽게 비껴갔다.

아니, 기분 탓인가?

우연히 시선이 닿는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정확히 제 얼굴을 봤는데.

“……방금 회장님이랑 눈 마주치지 않았어요?”

착각만은 아니었던지 윤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요. 어쩌다 그냥 보신 거겠죠.”

애써 웃어 보인 수진이 이만 가 보겠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등골이 서늘했지만, 더 길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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