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55화
그제야 다정함을 되찾은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간신히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코끝이 스치나 싶더니 부드러운 키스가 되돌아왔다. 아직도 뜨거운 혀로, 그 어느 때보다 달큼한 맛이 가득한 입안을 다정히 어루만지고 빠져나갔다.
그러다 말캉한 입술을 괜히 한번 앙, 물어 보고는 다시 그녀의 콧등에다 코를 비비며 키득거린다.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며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행동에는 어딘지 ‘고생했어, 잘 견뎠네.’ 하고 기특해하는 느낌마저 묻어나 기막혔다.
“이제 다 울었네.”
어르듯 달래는 말투에 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볼멘 목소리로 투정하듯 내뱉고서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그를 탓할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끌어들인 건 자신이었고, 그는 이런 자신을 안아 준 것뿐이니까. 후회를 한다거나, 누굴 원망하는 마음은 절대 아니었는데…….
“그렇게 많이 아팠어?”
“…….”
“미안. 처음 해 보는 거라 조절이 안 됐어.”
그럼에도 그는 장단을 맞춰 준다. 훌쩍이며 눈을 흘기는 그녀를 그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맞추고 달래려 한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제게 어리광 부리는 걸 기꺼이 받아 주며 즐거워했다.
“근데 표정은 별로 아픈 거 같진 않은데. 엄살인가?”
“아니야, 진짜 아팠단 말이야.”
“그런 거치곤 반응도 많이 뜨거웠고. 아, 설마 좋아서 운 거였나?”
“어우, 정말!”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어차피 아래로 엄청 울었으면서. 시트까지 다 적시고.”
“뭐, 뭐라는 거야, 진짜!”
눈물까지 쏙 들어가게 만드는 짓궂음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황급히 손을 뻗어 그 입을 틀어막자 웃음을 터뜨린 그가 그 손을 가볍게 잡아떼고는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은 집요하게, 꽤나 긴 순간을 머무르며 그녀를 응시하는 남자의 눈빛이 조금 미묘한 느낌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의미를 알 수 없어 멀뚱히 마주 바라보는데, 먼저 시선을 돌린 그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몸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것이 쑥 빠져나가자 안을 슥 긁어내리는 듯한 느낌에 절로 신음이 났다. 그렇게나 쏟아 냈음에도 그의 것은 각도만 조금 수그러들었을 뿐, 여전히 무시무시한 크기를 유지 중이었다.
“가만히 있어.”
슬그머니 따라 일어나려는 그녀를 단호한 말로 묶어 둔 그가 어디선가 티슈를 챙겨 왔다. 빠르게 콘돔을 정리하고 난 그가 다시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한 듯 눈을 끔뻑이는 그녀의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절로 따라간 시선이 정확히 베개 밑을 향하는 그의 손을 발견했다.
가만…… 거기에 뭐가 있었더라?
“이상해. 너 우는 거 처음 봤을 때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못 했었는데.”
……그런데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수진이 저를 굽어보는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난데없이 이어지는 말이 몹시 불길한 건 기분 탓인가?
“지금 보니까 왜 이렇게 예쁘지? 더 울리고 싶게.”
동시에 그가 꺼내 든 물건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콘돔이 거기서 왜 또 나오는 건데!
“설마…… 또?”
“또라니. 지금까진 연습이었고 이제 본게임이지.”
느긋하게 대꾸한 그가 특유의 매혹적인 웃음과 함께 잇새로 콘돔의 포장을 찢었다. 그 모습이 쓸데없이 섹시해서 절로 탄식이 샌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우리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응?”
“이미 틀렸어. 지금은 백번 생각해도 또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날 거 같아.”
“어우, 야아! 너 미쳤지? 지금 미친 거지?”
“응. 잘 아네. 너한테 미쳐 있잖아, 나.”
이건 또 뭔……!
경악하는 사이, 순식간에 콘돔을 끼운 그가 비비적거리며 침대 머리맡으로 물러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낚아챘다. 휙 하니 도로 끌려 내려간 그녀가 힉, 하고 비명을 삼켰다. 이젠 그 맛을 알기에 더욱 집요해진 맹수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여유롭게 미소가 걸린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잠시간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걱정 마. 이젠 잘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아니, 잘하고 자시고 그 전에 내가 죽겠어!
그러나 차마 외치지 못한 말은 목구멍에 툭 하니 걸려 버렸다. 그렇게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남자의 밤은 이제야 시작이었다.
* * *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변이 환했다. 천천히 눈을 뜬 수진은 멍하니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익숙한 식탁. 익숙한 주방이 보이는 아주 익숙한 제 방임이 분명한데, 지나치게 밝은 햇살이 낯설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큰일 났네.”
완벽하게 지각이로구나.
평생 겪어 본 적도 없는 상황이 발생하니 살짝 당황스러웠다. 벌써 9시가 훌쩍 넘어 버린 시각이라 서둘러도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빨리 움직일 자신도 없었지만.
길게 한숨을 내쉰 수진이 자연스럽게 제 몸에 감겨 있는 남자의 팔을 풀었다. 끙, 하는 신음을 내며 반쯤 몸을 일으키자마자 우드득, 하고 소리가 들린 것 같아 헛웃음이 났다. 온 삭신이 쑤시고 물에 젖은 솜처럼 팔다리가 묵직한 게 어디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기억 조작을 해도 믿을 판이다.
와, 어쩌면 하룻밤 사이에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으며 옆을 돌아보자, 간밤을 어떻게 버틴 건지 모를 조그만 제 침대 위에 아주 위화감 돋도록 아름다운 생명체가 누워 있었다. 기막힌 심정과는 달리 도저히 눈이 안 갈 수가 없는 비주얼에 입가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듯하게 각진 넓고 굵은 어깨와 방금까지 제 몸을 끌어안고 있었던 강인한 팔뚝이며, 유난히 깊은 쇄골과 굴곡이 뚜렷한 가슴팍. 거기다 군살 한 점 없는 늘씬한 허리와 그 아래……까지는 아직 대놓고 감상할 자신이 없고.
“흠, 흠.”
몰래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 수진이 허리춤에 걸려 있던 이불을 슬쩍 끌어 올려 덮어 줬다. 이 큰 몸에 들어갈 만한 옷이 없었기에, 그는 아주 당연하게도 속옷만 걸친 나체였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려는 삿된 그림을 잽싸게 털어 낸 수진이 이번엔 그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얼굴을 갈아 끼우기라도 하나.”
그토록 야한 표정을 짓고, 섹시하게 웃던 남자는 그새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눈앞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는 방금까지 그 몸을 보며 야릇한 상상을 했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맑고 해사한 얼굴이었다. 이마를 가린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길게 그늘을 만든 속눈썹. 비쳐 드는 햇살 아래서도 모공 하나 없이 빛나는 하얀 피부며, 붉게 핏기가 어린 입술이 청순하다 못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일 지경이라 절로 한탄이 새었다.
아니, 이상하게 억울했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건 이 남자인데, 멀뚱히 저 얼굴을 감상하는 내가 왜 죄책감이 들어야 하는 건데? 이 남자가 밤새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
순간 어렴풋이 떠올린 간밤의 기억이라니.
“흐으…….”
하나같이 눈 뜨고는 못 볼 꼴이라 수진은 작게 신음하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짚었다. 제가 질러 댄 비명이 생생히 머릿속을 울려 대는 게 수치스러워서 딱 죽고 싶을 지경이다. 그냥 이대로 도로 잠들어 평생 눈을 못 떠 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미쳤지.”
그래. 크게 인심 써서 처음은 내가 꼬드기고 도발해 놓은 덕분에 이 남자가 그렇게 미친놈처럼 날뛰었……. 아니, 좀 격렬했다 치자. 연이어 두 번을 덮친 게 조금은 아니지만 어쨌든.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한바탕 질펀하게 뒹굴고 나선 배가 고프다며 이것저것 배달시켜 먹는 도중에 갑자기 발동이 걸린 그에게 붙들려 한 번.
완전히 기진해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새벽에 느닷없이 덮쳐 또 한 번.
그리고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씻으러 들어갔던 욕실에서 또다시 벌떡 일어난 것을 디밀어 왔을 땐…… 진심으로 이게 사람이냐, 싶었다.
아무리 남자가 25년이 넘도록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마법을 쓰는 게 아닌 다음에야 이럴 순 없는 거다. 제가 직접 겪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 어디서 들었더라면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남자의 물건은 생각지도 못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엄청난 양의 정액을 쏟아 내고도 그 형태를 유지하는 기적을 부린 것이었다.
아니, 그의 해명대로라면 한풀 꺾였다가 그녀의 안에서 다시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부풀어 버린 거라는데, 솔직히 어느 쪽이 더 경악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말 그대로 너무 엄청나서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는 수준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크기도. 그 엄청난 강직도와 회복력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수진이 힘겹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나 과장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전 반차 낸 거로 처리해 뒀으니까. 점심 먹고 들어 와.]
그렇지 않아도 반차로 처리해 주셨으면 한다고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미 처리가 되었다니 내심 반가웠다. 평소 그녀의 행실을 눈여겨봐 온 나 과장이라면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터.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지?’
눈치 100단 내공의 소유자인 나 과장의 레이더망을 벗어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준성의 일도 일단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 우기고는 있지만, 그 말을 믿어 주는 건지 아니면 믿어 주는 척하는 것뿐인지 보통 사람인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후자의 확률이 높긴 한데, 굳이 그걸 확인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으니 그녀도 시치미를 뗄 뿐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모처럼 병자 콘셉트의 화장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 그딴 거 안 해도 이미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쫙 꼈을 것 같기도 하고…….
“뭐 해?”
나른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볼 새도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가 기분 좋은 호랑이처럼 낮게 그르렁대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등골을 적시는 듯한 뜨거운 숨결에 여지없이 가슴이 꾹 조여든다.
“그건 뭐야?”
낮게 잠긴 목소리가 지나치게 섹시해서 살짝 정신이 아찔했지만, 수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간신히 목소리를 밀어냈다.
“어, 이거.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연락해 드리려, 읏…….”
아무래도 저 역시 이 남자 못지않게 욕정의 화신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다시 목덜미로 닿는 입술을 느낀 순간 훅, 치솟는 열기에 얼굴까지 화끈했다. 순식간에 온몸의 감각이 바짝 들고 일어선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저를 열고 들어올 수 있는 남자다. 다분히 의도가 담긴 행동임을 알아서 더더욱 등골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허벅지 사이에 힘이 들어가는 걸 애써 모르는 척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지? 내가 잠결에 알람을 꺼 버렸나 봐. 너까지 늦게 해서 미안. 저기, 너도 일단 비서님한테라도 미리 연락해 놔야 하지…… 않을까?”
말끝이 점차로 흐려졌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아무 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내려뜬 눈꺼풀과 초점이 불분명한 짙은 눈동자의 조화가 섹시하다 못해 질척하게 느껴질 만큼 퇴폐적이다. 그녀를 탐하며 짙은 쾌락에 젖어 있을 때의 표정과 비슷해서 더 그런 느낌이었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느닷없이 머릿속을 스친 감상을 지워 내듯 고개를 털었을 때였다.
“늦어도 된다는 뜻이네.”
“어, 뭐…… 그렇긴 한데.”
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되는 건가? 싶은 순간, 천천히 고개를 돌린 준성이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입술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의 입술이 그린 듯 근사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