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50화
농담처럼 마무리한 수진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떨어 봤다. 너무 심각해진 분위기를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발동한 방어 기제였다.
“아니. 전혀.”
그러나 돌아온 건 짧은 대답이었다. 나지막하지만 선명히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그를 바라봤다. 잠시 생각을 다듬는 듯 깊어진 눈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여느 때보다 진지하고 여느 때보다 단호하게 잘라 내는 말이었다. 농담처럼 흘려보내려 한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그런 거로 숨길 수 없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그녀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도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말없이 눈으로만 그녀의 얼굴을 덧그려 보던 남자의 입에서 이내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껏 살아왔는지. 어떤 각오로 지금까지 버텨 왔는지. 네 말대로 난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지 몰라.”
“…….”
“그래도 네 곁에 있으면서 나도 쭉 봐 온 게 있으니까.”
처음 그녀를 봤을 땐 굉장히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혼자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질 않아서.
아주 단단하고 틈이 없는 사람 같아서 접근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아니었어. 상처는 고스란히 받으면서 그걸 견디고 있는 게 보였거든. 그래서 첨엔 마음이 쓰였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 널 찾아보고 있더라고.”
“…….”
“혹시 또 어디서 이상한 말 듣고 시무룩해 있나. 혹시 어디서 몰래 혼자 울고 왔나. 그렇게 자꾸 네 눈만 보게 되더라.”
그렇게 바라보고 또 바라봤었다. 이러니 제 마음에 새겨지지 않고 배겨 났을까.
“그러다 누가 부르면 되게 예쁘게 웃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 그런 얼굴 남한테 그만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내 맘대로 돼야 말이지.”
천성적으로 사람을 향한 애정이 깊다는 것쯤은 쉽게 알았다.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았지만, 늘 그 주변 어딘가에서 저를 찾아 주기를 기다리던 여자였다. 상처 주는 말에 경계하듯 모두에게 거리를 두면서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악의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도 이미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었어.”
“…….”
“그리고 지금은 더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해. 지금 네 모습은 너 자신이 그만큼 노력해 온 결과니까. 너 스스로 이만큼 극복해 온 거잖아.”
이런 과거를 몰랐을 때도 충분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위축되는 자신과 싸우며 그런 자신의 장점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는 건.
“무엇보다 대단한 일이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 절대 아니야.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지금 이 단어가 너에게 상처가 될까. 어떤 표현이 혹여 너를 슬프게 할까. 고르고 고른 말이 하나같이 무용했다.
그저 단지 조금이라도 너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에. 네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니까 넌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네 다정함에 위로받았던 그 어느 여름날처럼. 나 역시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던 여자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잘했다고. 잘 살았다고. 그리고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라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으로 피폐해진 자신을 인정해 주는 말이 너무도 듣고 싶었다.
그 말을 그 누구도 아닌 이 남자가 해 준다.
이런 제 태도로 가장 많은 상처를 입고 힘들었을 이 남자가.
“그리고 난 그런 너한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너한테 더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노력해 왔어. 네가 보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면, 그건 다 네 덕분이야.”
어쩌다 이런 남자가 내 삶에 끼어든 걸까.
이런 한심한 삶에 이토록 커다란 선물이 가당키나 한 걸까.
“넌 나한테 그런 사람이라고.”
새삼 믿기지 않는 현실이 꿈 같아 눈물만 났다. 이대로 손을 뻗으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낯익은 제 삶 어딘가에서 눈을 떠 버릴 것 같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 대신에 그가 움직인다.
성큼 다가선 준성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눈가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이 뜨거웠다. 약간의 떨림과 함께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며 머무르는 손길에 담긴 의미가 명백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니, 오늘이라서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 너 안고 싶어.”
뺨을 쓸던 손길이 멈칫했다. 대꾸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위험한 색으로 물들었다. 이젠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이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을 따라 귓속을 울려 댔다. 뒤늦게 긴장한 몸이 간헐적으로 떨려 오는 걸 참으며 남자를 마주 봤다.
처음으로 제 모든 걸 알아 준 남자였다. 이 남자와의 연애라면, 그 끝을 마주하는 순간조차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함께할 수 있는 이 순간을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안아 보고 싶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 맞아.”
꽤 긴 침묵이 흘렀다. 분명 바쁜 일이 남아 있을 남자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꺼낸 말이었다. 이미 저 때문에 많은 시간을 버렸는데 이런 그를 붙잡는 건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벌써 해 버린 말이 있어 초조하게 입술만 깨물었을 때였다.
“이젠 울어도 안 멈출 거라고 했는데.”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던 건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 수진은 한층 짙어진 눈동자를 마주하며 제 얼굴에 닿은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에 제 뺨을 비비며 엷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오늘은 이미 울었거든.”
기다렸던 것처럼 몸이 훌쩍 끌려들었다. 곧바로 휘어잡힌 머리채가 뒤로 당겨지며 고개가 들렸다. 그대로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뒤로 휘청한 몸이 커다란 남자의 손에 단단히 받쳐졌다. 머리가 당겨진 순간 이미 벌어졌던 입술 사이로 뜨겁게 밀려든 혀가 어루만지듯 입안을 쓸고는 굳어 있던 그녀의 혀를 감아올렸다. 다소 거친 손길에 좀 놀랐지만, 입술을 머금고 입안을 훑는 감촉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한동안 야릇한 소음만이 오갔다. 한 손엔 여전히 쇼핑백을 생명 줄처럼 꾹 틀어쥔 채 그녀는 정신없이 그의 입술이 주는 감각을 받아 냈다. 타액이 쭉쭉 빨려 나갈 때마다 감은 눈의 안쪽으로 온갖 색감의 불꽃이 점멸했다. 분명 몇 번이나 해 본 것인데, 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아, 잠깐. 여기선 그만……!”
그가 고개를 틀며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속삭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곧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사이로 할딱이는 숨이 토해졌다. 정신이 사납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와중에도 이곳이 누군가 오갈 수 있는 길목이란 사실만은 잊지 않았다. 적어도 누군가 본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여긴 밖이니까.”
그러니 일단 어디든 들어가자는 말이 턱 하니 목구멍에 걸린다. 이미 결심은 했으면서도 일말의 망설임이 자꾸만 그녀를 멈칫거리게 만든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찌르는 듯한 시선을 차마 마주하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그녀 대신에 나직하게 웃던 남자가 모로 선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풀썩 안겨 든 순간, 생각한 것 이상으로 뜨겁게 발기한 것이 과시하듯 그녀의 허리께를 꾹 눌러 온다.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손이 불쑥 들어와 가볍게 턱 끝을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게 했다.
“입술 다 번졌어.”
그리 말하는 남자의 입가에도 제 입술에서 묻어난 흔적이 여실했다. 그래서 더욱 야릇해 보이는 미소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그녀의 입술 아래를 천천히 엄지로 쓸던 그가 차분히 덧붙였다.
“각오 단단히 해 줘.”
절대 이대로 놔줄 마음이 없는 남자의 가슴 선득해지는 선언이었다.
* * *
“……미쳤어.”
작은 식탁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수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 게 꼭 키스의 여운만은 아닐 것이다. 이상하게 긴장한 몸에선 좀처럼 힘이 빠지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리는 자꾸 후들거리는 게 몸이 제 몸 같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차를 오래 세워 둬야 했기에 준성은 어쩔 수 없이 근방의 공용 주차장을 찾았다. 그사이 정리할 게 있다며 먼저 집으로 돌아와 있던 수진은 한동안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 중이었다.
“자, 이제 정신, 정신 좀 차려 보자.”
제 머리를 툭툭 쳐 가며 중얼거리다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이상한 물건이라도 나와 있을까 싶어 먼저 오긴 했지만, 평소에도 뭔가를 널어놓고 사는 편이 아니라 집 안의 상태는 양호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저 남자가 오기 전에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나.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미 각오를 했는데도 당장에 저 문으로 들어오게 될 남자를 생각하니 설레는 것보다 덜컥 겁부터 났다.
먼저 샤워라도 해 둬야 하는 건가? 아님 옷이라도 편하게 갈아입어야 하나?
아니, 너무 대놓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건 좀 이상하려나. 그래도 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루 종일 바깥을 돌며 일하던 몸이라 혹시 땀 냄새라도 날까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열 평 남짓한 이 좁은 공간에 그를 앉혀 두고 씻는 건 더더욱 불가능해 보이고.
5분. 아니, 3분이면 간단히 땀 냄새는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과 동시에 바로 몸을 움직였다. 가까운 공용 주차장이라 해도 가는 데만 최소 5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혹시 좀 늦더라도 그가 조금만 밖에서 기다려 주길 바라며 현관 앞에 있는 욕실로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벗기 쉽도록 블라우스의 단추를 다 풀어낸 채로 욕실 문을 열려는 순간,
삑삑삑삑삑. 삐리릭―
들려오는 소리라니.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내가 비밀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던가?
그 의문을 풀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욕실 문을 붙든 그대로 얼어 버린 수진이 서늘한 공기와 함께 등장한 준성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자도 잠시 그 자리에 멈칫했다.
삐걱삐걱삐걱.
완전히 경직되어 버린 뇌가 힘겹게 굴러간다.
“어…… 빠, 빨리 왔네.”
간신히 입을 연 순간에야 생각났다.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던 그날, 눈앞에서 해제한 적이 있었구나. 저 머리 좋은 남자가 그걸 기억하고도 남을 거란 생각은 왜 못 했을까.
여전히 제게 직선으로 꽂혀 있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황급히 블라우스 앞자락을 움켜잡았다. 물론 이런다고 마법처럼 단추가 다 잠기는 일 따윈 생길 리 없었다.
뭔가 이상한 포즈로 엉거주춤 물러난 순간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한 채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바짝 긴장한 그녀의 목구멍에서 미약한 비명 같은 게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