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9화
언제 그렇게 사무적이었냐는 듯이 한결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녀를 향한 염려와 위로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남자는 섣불리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내내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그녀의 상태를 주시하며 절대 시야 바깥으로 빼놓지 않았다.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 먹먹해졌다.
“……아니야, 그런 거.”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마음을 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무작정 아니라는 말부터 꺼냈다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겠다는 듯한 눈빛이. 진지하게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눈빛이 너무도 낯이 익어서. 일순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아 어설픈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아니야. 별일 아니었다고. 그냥…… 나랑은 의견이 좀 안 맞는 사람이라.”
처음부터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제 치부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만큼은 절대로.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까 말했다시피, 거래처 사람이라서. 상황이 내가 을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김수진.”
툭하니 내뱉는 듯한 부름에 말을 멈춘 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여실히 굳은 표정을 보자 어쩐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감정일 때 이런 얼굴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이럴 때마다 되게 무력해지는 기분이야.”
말끝에 긴 한숨이 배어 나왔다. 언젠가, 그의 앞에서 고백을 하려다 실패했던 날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실망감과 허탈함이 지금의 얼굴에 겹쳐진다. 섭섭함이 짙게 묻어난 한숨 소리가 가슴을 찌릿하게 울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젠 안 그래도 되잖아. 네 곁에 내가 있는데. 그러니 적어도 나한테는 다 말해 줘도…….”
“왜 그래야 하는데?”
“수진아.”
그렇게 당황해 버린 탓이었을까. 비틀린 생각이 삐죽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제가 이렇게 꼬인 부분이 많은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지만 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진 않아. 상대에 대해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는 거야. 그게…… 몰랐으면 하는 거라면 더.”
제가 듣기에도 정이 떨어질 만한 말투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보다, 보여 줄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지독했던 그 과거사를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다는 욕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수혁에게는 술김에 한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조차도 많이 후회했었다. 저를 보는 수혁의 시선에서 이따금씩 느껴지던 동정심이. 어쩌면 제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그런 감정에서 비롯한 다정함이 도리어 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가끔은 괴롭기도 했었다.
하물며 준성에게 받는 동정의 시선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얼어붙는다. 가뜩이나 그의 앞에선 작아지고 마는데, 그런 눈길까지 받았다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없이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럼 억지로 웃지나 마. 뻔히 힘든 게 보이는데 그런 얼굴로 웃고 있으면 그걸 보는 난 어떻겠어.”
“…….”
“걱정되는 내 마음은?”
감정을 꾹꾹 눌러놓은 듯 바닥까지 깔린 목소리는 참담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플 만큼 부드럽게 달래는 말투에 잠깐 목이 메었다. 흔들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더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말한다고 달라질 일 아니야. 어차피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서로 불편하기만 하겠지.”
“……그래. 이미 지난 일이라면 그렇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의의가 있는 거잖아. 그러면 적어도…… 제대로 위로라도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
“난 이제 네 남자 친구인데, 그런 것도 요구하면 안 되는 거야?”
그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꿋꿋하게 그 웃음을 외면하는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주변을 메운 한기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그에게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내가 이런 쪽으론 서툴러서. 좀 더 능숙했더라면 널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결국 그가 먼저 사과하게 만들었다.
“그만 들어가 쉬어. 한숨 자고 나면 좀 나아질 거야. 난 이만 가 볼게.”
그렇게 돌아서는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차체를 돌아간 준성은 운전석에 앉더니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쿵, 하는 소리에 제 심장도 같이 쿵, 하고 울렸다.
고작 이게 뭐라고.
이 남자에게 동정 좀 받으면 어떻다고.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켜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해서 저 남자와 다투기까지 한 건지. 매일 그가 보고 싶어서. 매 순간 그가 생각나서. 일분일초가 아쉽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를 상처 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당황스러웠을 뿐인데.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마음의 준비를 못 한 것뿐인데.
끼익―
“수진아!”
언제 몸을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막 출발하려던 그의 차량 앞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고 무릎이 범퍼에 살짝 긁혔다. 저도 모르게 휘청하자 순식간에 차 문을 박차고 뛰어나온 그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수진아. 김수진. 나 좀 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
“어디 봐. 다리 부딪친 거 같은데, 일단 병원부터 가자.”
“아냐, 아무 일 없어. 내가 잘못한 거니까 제발 이러지 마.”
자칫 큰 사고를 낼 뻔했는데도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그녀의 걱정뿐이었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차에 태울 기세인 남자의 품을 가로막으며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내내 목구멍에 막혀 있던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아까 걔는 내 옛날 친구야. 초등학교 때, 아주 단짝이었던 친구.”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떼고는 쇼핑백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조금 놀란 눈을 한 남자를 마주 보며 다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쉽게도…… 별로 반갑진 않아.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흐트러진 감정을 정리하듯 길게 숨을 내쉰 수진은 천천히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짧았던 그녀의 평온했던 시절과 같은 아파트에 살며 친했던 친구. 어처구니없었던 전화 사건과 이후로 돌변해 버린 아이들의 태도.
그리고 지옥 같았던 초등학교의 마지막 한 해와 그로 인해 결국 다 망가져 버렸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꽤나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간이 감정이 격앙되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에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냥 대학만 가자. 그리고 취업해서 완전히 사회로 나가 버리면 이제 그런 일에 연연 안 하고 살아도 될 거라고. 그렇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
그녀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후로는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았다. 굳이 타인과 어울리려 애쓰지 않아도 저 할 일만 잘하고 있으면 알아서 사람이 모였다. 맞지 않는 사람은 사무적으로 대하면 된다는 팁도 얻었다. 내가 맞춰 주려 애쓰지 않아도 진짜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얼마나 극복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힘들게 보통 사람처럼 살아왔는데.
그 시절의 흔적을 마주한 것만으로 다시금 그 고통스러웠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버렸다. 여전히 저를 미워하고 괴롭히려 안달 난 아이들의 표독스러운 눈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려 결국엔 입조차 열지 못했다.
“나부터도 이해가 안 돼서 혼란스러웠어. 왜 거기서 그렇게 굳어 있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입도 벙끗 못 했는지.”
한편으론 화가 났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과거에 위축되고 흔들려야 하는 건지.
지금껏 그 일로 인해 놓쳐야 했던 수많은 기회와 인연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는 건지.
정작 저를 괴롭게 한 이들은 다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데, 어째서 피해를 입은 저만 이런 기억을 품고 감내해야 했던 건지.
“그냥 즐거운 추억이구나, 하면서 수다나 떨든가. 아무렇지 않게 그랬냐고, 기억이 잘 안 나서 모르겠다고 잡아떼기라도 하든가. 이도 저도 못 할 거면 듣기 싫으니 닥치라고 소리라도 질러 보든가. 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서…….”
“…….”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렇게 굳어 있던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해서 울지도 못하겠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걸 못 잊고 이런다는 게.”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햇살이 마주 보고 선 두 남녀의 실루엣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가로등 아래 짙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수진은 치미는 한숨을 삼켰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이제 다 벗어났다고 믿고 살았는데, 내 삶은 계속해서 그 일에 휘둘리고 있었다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어 보려 애쓰는 입술이 어색하게 비틀렸다.
“누굴 만나든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게 돼. 심지어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어도 굳이 먼저 접근해서 친해지고 싶지가 않았어.”
처음 그런 제 태도를 깨닫게 한 남자의 앞에서 수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건 상관 안 해. 아프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내 인생을 흔들 정도는 아니니까. 화가 나면 싸워도 되고, 무시해도 돼.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고.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는 다르잖아.”
친구였던 존재가 남긴 상처는 깊은 흉터를 남겼고, 그 흉터는 무슨 짓을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아픔을 기억하기에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제 약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혼자라면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쩌다 친구가 생기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더라.”
저를 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한순간 차게 굳어 갈까 봐.
혹시나, 만에 하나 제 감정이 소중한 친구의 마음을 상처 입힐까 봐. 불편하게 만들까 봐.
“점점 내 맘에 있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나도 모르게 눈치도 보게 되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 주려 노력하게 되고.”
그래서 외면해야 했던 그 시절의 감정이 새삼 아릿하게 가슴을 옥죄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하필 내 직장에서, 그것도 네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흑역사가 터질 줄은 몰라서. 순간 당황해서 그런 거지.”
묵묵히 제 이야기를 들어 주는 남자를 향해 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아무튼 덕분에 이런 소심한 사람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야. 하아, 참. 별것도 아닌 거로 되게 거창했네. 바보 같지? 나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