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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8/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48화

“표정 보니 알겠네요. 괜찮으면 지금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많이 급해서 그런데. 지금 회의에 가지고 들어가야 할 거 같아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뒤늦게 눈치를 챈 수진이 바로 대답하며 다시 미연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쩌지? 내가 깜빡 잊은 게 있어서 남은 이야긴 다음에 해야 할 거 같은데.”

“뭐야, 이 시간은 나한테 빼놓은 거 아니야?”

“미안. 중요한 일이라서. 일단 오늘 준 자료부터 잘 읽어 보면 어느 정도 감은 잡힐 거야.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 그럼 식사하고 가. 먼저 일어날게.”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바로 대화를 마무리해 버리는 수진의 태도에 미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뭐. 알았어. 다음에 꼭 한턱 크게 쏴.”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나지막이 인사말을 남기고 일어난 수진이 아직도 제 곁에 서 있는 준성을 발견하곤 잠시 멈칫했다. ‘왜 아직도 여기에?’라는 뜻을 담아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바로 받아야 하니까 가는 길에 같이 가죠.”

얼결에 그가 이끄는 대로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준성의 곁으로 합류한 김 비서가 그녀를 향해 눈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두어 걸음, 앞서 걷는 그들의 뒤로 조금 거리를 둔 채 따랐다.

저를 도와주기 위해 그냥 둘러댄 핑계란 것쯤은 알고도 남았다. 진즉부터 제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걸 꿰뚫어 본 남자였다. 아니, 지금의 제 얼굴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남자에겐 더더욱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거고.

그러니 제발 어떤 대화가 오간 건지, 그 내용은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입도 열지 못하던 제 모습까지는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로비를 나서고, 호텔 정문을 나설 때까지 그녀는 말없이 가슴만 졸였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알려 주고 싶지도 않다. 괜한 동정도 받고 싶지 않으니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넘어갔으면 했다.

이윽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먼저 멈춰 선 수진이 앞선 남자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김수진 씨.”

준성은 잔뜩 굳다 못해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창백하게 질려 버린 안색. 간신히 유지하던 포커페이스마저 무너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당장에라도 저 가녀린 몸을 붙잡아 지탱해 줘야 할 것 같아 손이 움찔거렸다.

“괜찮아요?”

“아, 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작게 덧붙인 수진이 다시 몸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잠깐만요, 김수진 씨.”

그렇게 불러 세워 놓고 그는 잠시간 뭔가를 생각하듯 진지하게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수진은 바짝 긴장하며 말라붙은 목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사이 휴대폰을 꺼낸 준성은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마친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는데. 수진 씨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무슨 일이신데요?”

“여기서 말하긴 그렇고. 일단 가면서 설명하죠. 김 비서님. 차 대기 좀 부탁합니다.”

부탁하니 움직이긴 하는데, 뭔가 토를 달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김 비서의 표정을 봐선 절대 정해진 일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거절하기에도 명분이 없다. 오늘의 미팅 약속을 위해 시간을 비운 터라 오후엔 별다른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이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남자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 다른 의도가 있나, 잠시 의심했던 마음을 접어놓고 일단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금세 차를 몰고 나타난 김 비서가 두 사람 앞에 차를 세우자 당연하다는 듯이 다가선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준다. 그 서슬에 어쩔 수 없이 상석에 앉은 사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오른 준성은 뭔가 설명하는 대신 김 비서를 향해 말했다.

“JL백화점으로 가죠.”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백화점을 간다는 건지. 도무지 제 머리론 중요한 일과 백화점의 연관성을 떠올릴 수가 없는데,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라 선뜻 뭐라 말이 안 나왔다.

그렇게 백화점에 도착하고, 1층의 명품관에 발을 들인 후에도 남자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수진이 먼저 물었다.

“저기,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화장품 좀 골라 줬으면 해서요.”

“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정도가 있어야지.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자 준성은 흘깃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쓰던 화장품이 다 떨어졌는데, 마땅히 뭘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래도 이런 건 여자분한테 도움받는 게 최선이지 싶어서요.”

중요한 일이란 게 이거였어? 정말 이 말을 믿어야 해?

여러모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남자는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만치에서 휴대폰을 붙든 채로 진땀을 흘리며 누군가와 통화 중인 김 비서를 보자니 저까지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있나.

어쨌거나 이미 저는 여기까지 끌려온 상태고, 눈치로 봐선 업무 시간에 잠깐 나온 게 분명해 보이니 일단 원하는 대로 빨리 해결해 주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은 선택인 것 같긴 했다.

“어떤 게 필요하신 거예요?”

“그냥 얼굴에 바르는 종류면 됩니다. 로션이라든가, 뭐 그런 거로요.”

그러고 보니 그날 밤, 그의 파우더 룸에서 뭔가 화장품 비슷한 걸 본 것 같기는 한데 눈여겨보지 않아선지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엉뚱하게 살색 가득했던 남자의 떡 벌어진 어깨와 날렵했던 쇄골 라인만 떠오를 뿐.

잽싸게 헛기침을 하며 기억을 날려 보낸 수진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흠, 흠. 혹시 따로 쓰시던 브랜드나 평소에 선호하던 게 있으세요?”

“이쪽으론 문외한이라 어디에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도 모르고, 브랜드 특성도 잘 몰라서 보통은 주는 대로 쓰는 편이에요. 아, 피부가 좀 약해서 남성용은 가끔 탈이 나더라고요. 아마 집에 있는 것도 여성용이었던 거 같아요.”

그렇구나.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서 풍기는 향은 남성 화장품 특유의 무겁거나 톡 쏘는 느낌이 없었다.

대신에 그에게서는 계절의 냄새가 났다. 아직 열대야가 오지 않은 여름날 이른 아침, 풀숲을 걸을 때처럼 싱그럽고 산뜻한 향기가.

그게 은근 중성적인 느낌인데, 거기에 그 특유의 체취가 섞이며 좀 더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섹시함이 가미된다. 마치, 단정한 겉모습 속에 저돌적인 면모를 지닌 그 자신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한 향기였다. 그 잔상을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일렁였다.

“괜찮으면 수진 씨가 자주 쓰거나 좋아하는 브랜드면 좋고요.”

그거라면 어렵지 않지.

예산 걱정이라곤 평생 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해 주는 추천만큼이나 쉬운 게 있을까.

“그럼 전 여기로 추천해 드리고 싶은데요.”

비록 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쇼핑이란 사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법이다. 남의 돈으로 실컷 대리 쇼핑을 즐기게 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두 남자를 이끌고서 1년에 두세 번 들를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브랜드로 당당히 입성한 수진은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점원의 앞에서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제 돈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프리미엄 라인으로만 골라잡아 그의 손등에 발라 보곤 의향을 물었다.

이윽고 한가득 골라낸 상품들이 계산대에 놓이고 그의 카드가 오가는 사이, 수진은 마지막으로 립스틱 테스터가 잔뜩 꽂힌 자리로 다가갔다. 얼마 전 광고를 시작한 신상품 립스틱이 눈에 띈 참이었다. 하나를 꺼내 제 손목에 슥 그어 봤다.

“……예쁘네.”

늦가을, 겨울 시즌에 딱 어울리는 오묘한 장미색이 창백한 제 피부에 약간의 혈색을 더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진은 곧 조심스럽게 립스틱을 내려놓았다. 이런 작은 즐거움으로도 지금의 우울함은 회복하기 힘들 것 같았다.

* * *

“그럼 또 들러 주세요, 고객님!”

큰 매출을 올리게 된 점원들의 목소리엔 기쁨이 가득했다. 90도로 꺾이는 그녀들의 허리를 뒤로한 채 매장을 나선 후에도 준성은 꽤 한참 동안 백화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이끌고 온갖 매장을 돌아다녔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그녀의 말에도 아주 진지하게 먼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만 답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더 이상의 뭔가를 사진 않았다.

전혀 흥미가 없다는 얼굴로 열심히 뒤따라 다녀 준 점원을 시무룩하게 만들어 놓더니, 한참 나중에야 그녀에게 강제로 고르게 한 넥타이핀만을 즐거운 얼굴로 그 자리에서 착용한 게 전부였다.

덕분에 백화점을 나섰을 때는 시간이 애매했다. 아슬아슬하게 퇴근 시간대가 걸려 있었다. 다시 회사로 가느니, 이대로 퇴근하는 게 좋겠다며 또 강제로 그녀를 차에 태운 그가 곧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김 비서마저 퇴근시키고 단둘이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몇 배는 제멋대로인 남자를 차마 말리진 못하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결국 집 앞까지 도착한 그가 차를 세웠다. 먼저 차에서 내린 수진이 휴대폰을 확인하곤, 어느새 뒤따라 내린 남자를 향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태워다 줘서 고맙긴 한데, 정말 괜찮은 거야? 아까 보니 김 비서님 표정이 많이 안 좋던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진의 앞에 언젠가처럼 불쑥 쇼핑백이 다가왔다. 방금 전 백화점에서 구매한 화장품의 브랜드가 크게 새겨져 있는 쇼핑백이었다.

이걸 왜…….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의 미간이 슬쩍 모여든다. 아주 익숙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지만,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끔뻑이자 설핏 웃던 그가 말했다.

“둔해 빠져 가지고. 이제 그만 눈치 좀 채라.”

“…….”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잔머리 좀 굴려 봤는데 진짜로 속으면 어떡해.”

그녀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이상하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다시 쇼핑백을 바라봤다. 정말 가격 따윈 생각지도 않고 평소 쓰고 싶었던 물건들을 마구 사 넣으며 대리 만족 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아찔하게 스쳐 갔다. 대충 생각해도 이백, 아니 삼백만 원은 족히 넘었던 가격을 생각하자 목덜미까지 서늘했다.

심지어 바로 사용할 거라며 포장지까지 다 뜯어 버린 물건들이었다. 반품도 못 하게 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을 되뇌며 허탈하게 웃어 버린 수진이 문득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이건…….”

그에게 권했을 리가 없는 립스틱이었다. 설마 하며 색상을 확인했다. 믿기지 않게도 제가 마지막으로 테스트를 해 봤던 그 색상임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덧없이 깜빡였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더라. 이것밖에는.”

느릿하게 고개를 든 그녀가 담담히 말을 잇는 준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네 기분이 풀렸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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