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7화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아주 세련되게 꾸민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접대 모드로 돌변한 수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객님?”
“헐, 진짜 김수진이네? 맞지? 웬일이야! 세상에! 나야, 나. 미연이!”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머리로 의식하기 전부터 팔뚝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는데,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네가 여긴 어떻게…….”
“이야, 이제 우리 서로 목소리도 몰라보는구나. 어제 통화했었잖아.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바로 나야. 세상에, 난 김수진 지배인이라기에 설마설마했지. 진짜 너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
입에 발린 인사말조차 하지 못하고 얼떨떨해 있는 그녀의 앞에서 미연은 활달하게 떠들어 댔다. 분명 제가 기억하는 담당자의 이름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오늘 만나기로 한 김가연 씨가 그럼…….”
“응. 앞으론 가연이라고 불러 줘. 나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개명했거든. 왜, 학교 다닐 때도 꼭 너랑 둘이 묶어서 이름 촌스럽다고 놀림당하고 그랬었잖아. 동명이인도 오죽 많았어야지. 덕분에 이번에도 설마 너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난.”
놀람이 가실 새도 없이 한다는 소리에 헛웃음이 났다. 별로 좋은 감정으로 헤어진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선 나이 서른에 유치하게 기 싸움부터 걸려 하는 말투라니.
덕분에 평정심을 되찾은 수진이 미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올렸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일단 앉자. 오늘은 처음이라 설명할 게 많아.”
“뭐야, 꼭 오늘 같은 날에 일 이야기부터 해야 해?”
“일하려고 만난 날이니까. 친구로서의 만남은 다음에 다시 하자.”
“어휴, 하여간 그때나 지금이나 꽉 막혀서는. 알았어.”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는 미연을 바라보다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언행이 강한 느낌이라 얘가 이런 친구였었나, 싶어 살짝 혼란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얼굴이 기억에 남지 않은 건지, 아니면 커 가면서 많이 변한 건지 외모부터가 많이 달랐다. 그 시절의 그녀는 마른 체격에 키가 작고 인상이 순해 제가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친구였는데, 지금은 화장의 영향인지 눈매부터가 날카롭고 살집이 붙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꽤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수백은 호가하는 명품 백이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게 그런 삶이 아주 익숙해 보여 더더욱 낯설었다.
하긴, 저도 자라면서 변한 부분이 많을 텐데 이 친구도 그만큼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해 온 만큼 당연히 변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미리 준비한 자료를 건네며 앞으로 함께할 일에 대한 설명과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전했다. 몇 마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미연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제대로 이해하고 배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에 문득, 서 과장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 ……김 지배인님께서도 각별히 신경 써 주셨으면 해서요. 제가 믿을 만한 분이 김 지배인님뿐이라서. 어려운 부탁 해서 미안해요.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던 게 이유가 있었구나.
“쉽게 말해서 내가 갑이고 네가 을이란 소리 아냐? 그걸 뭘 그리 어렵게 설명해?”
“저기,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
“어우, 또 뭘 그리 정색이야. 사람 무안하게. 당연히 농담이지. 꼭 중간에 초를 쳐서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것도 여전하다, 정말.”
절로 한숨이 샜다. 때마침 주문해 놓은 파스타와 샐러드가 나와 일단은 한발 물러났다. 뭐라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고, 이상하게 적대적인 태도도 누그러질 테니 그 타이밍에 다시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이어졌다.
“김수진 씨. 여기서 보네요.”
“아, 주……. 아니, 상무님. 안녕하세요.”
흠칫하며 고개를 들자 언제 온 건지 준성이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와 있었다. 살짝 당황한 수진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인사말을 건넸다. 미연의 등장에 신경을 쓰느라 준성이 이 레스토랑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니, 설령 기억하고 있었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이렇게 제게 알은척을 했다는 것부터가 좀 불길했다. 절로 미연을 바라보게 된다. 준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미연의 모습에 그 느낌은 확신이 되어 갔다.
“그러지 말고 앉아요. 지나는 길에 보이기에 인사만 하고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보다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아, 여기 이분은 저희 호텔이랑 오래 인연을 맺고 있는 영진그룹의 새로운 담당자분이세요.”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라비타 호텔 전략기획실 상무 송준성입니다.”
그 순간 눈에 띌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켠 미연이 ‘아, 네. 반갑습니다.’ 하고 간신히 대꾸했다. 길에 널린 돌멩이라도 보듯 무심한 남자의 시선은 그 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수진에게로 돌아왔다.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수진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아주 담백한 태도로 마저 남은 말을 건넸다.
“그럼 좀만 더 고생해요.”
“네, 상무님.”
혹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일하는 도중에 만난 직원에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말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산뜻하게 돌아선 태도와는 달리 그 말투와 시선에 묻어나는 염려를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티가 났구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음에도 제 불편함이 겉으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더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하며 미연을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목을 빼며 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연이 뒤늦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들었잖아. 우리 호텔 상무님이셔.”
“허, 진짜? 저 나이에 상무님이라고? 그게 가능해? 설마 무슨 회장님 아들 뭐 그런 거야?”
제대로 정답을 말하는 미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더욱 놀랍다는 듯 경악하던 그녀가 이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근데 너랑 친해 보이는데? 이렇게 인사까지 해, 보통? 혹시 따로 아는 사이야?”
일반적인 태도는 아니긴 했지. 설명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그와 가깝다는 이야기까진 하고 싶지 않았던 수진이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꺼내 들었다.
“여긴 호텔 안이잖아. 상무님은 고위 책임자고. 어디서 누굴 만나든 고객님이시니까 겸사겸사 인사해 주신 거지.”
“그런 거치고 되게 친근한 말투던데? 눈빛도 심상치 않고.”
“그런 거 아니래도.”
“아니긴 무슨. 하여간 좋겠다, 야. 저런 남자도 매일 볼 수 있고. 우리 회사는 순 노인네들뿐이라 눈만 썩어 가는데. 아, 나도 그냥 호텔리어나 할걸. 여긴 손님들도 물 좋던데. 그중에서만 잘 골라잡아도 어디야.”
맙소사. 한다는 소리가 기막혀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제 직업을 후려치고 손님에게 급을 매기기까지. 고루고루 불쾌감이 확 밀려들어 당장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안타깝게도 미연은 현재 가장 큰 거래사의 새로운 담당자였다. 그 현실이 너무 뼈아프게 와닿았다. 한숨 한 번에 치미는 화를 삭인 수진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왜, 미연이 너희 회사도 좋은 곳이잖아. 인연이야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거고. 능력도 있으면서 무슨 걱정이야.”
“거, 걱정은 무슨. 말이 그렇단 소리지.”
뭔가에 뜨끔한 건지 살짝 발끈한 미연이 투덜거리며 제 앞에 놓인 파스타를 뒤적였다.
“하여간 넌 남자 복도 많아. 그때도 이름이 뭐더라……. 아, 현성이었나? 그러고 보니 얘는 요즘 뭐 하고 살려나.”
그 순간 수진은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굳어 버린 얼굴을 발견한 미연의 입가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다. 급히 정신을 붙들어 맸다.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움켜쥐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난 그때 친구들이랑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서.”
“그래?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 팀 계약했다는 소식은 듣긴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축구엔 관심이 없어서. 그래도 너랑은 따로 연락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봐? 그럼 너 다른 애들하고도 연락 안 하는 거야?”
이미 늦은 걸까. 제대로 약점을 찾았다는 듯 신이 난 목소리가 더더욱 높아졌다. 그 시절이 제겐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니, 그런 짓을 한 당사자면서……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나.
명치가 콱 막혀 왔다.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고 얼굴로 열이 오르다 못해 귓속까지 먹먹했다. 뭐라도 붙들어야 할 것 같아 테이블 아래로 양손을 내려 꼭 마주 잡았다.
“그렇지 뭐. 그보다 나 그때 이야긴 아직 불편해서. 그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왜 불편한데? 아, 맞다! 너 그때 현성이 좋아하는데 아닌 척 뒤로 호박씨 까다가 걸려 가지고 완전 전따 당했었지? 하하……. 어우, 미안하다, 야. 내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어.”
표정을 가다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다. 열기가 몰려드는 눈을 연신 깜빡이며 버텼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입가에 짧게 경련이 일었다.
“이해해. 옛날 일이니까.”
“그래. 하여간 여전하다고. 그때도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 서로 좋아한 거 맞았잖아. 뭐 어쨌든 그때 그건 내 잘못이니까. 내가 그렇게 장난만 안 쳤어도 지금까지 사귀고 있었을지 어떻게 알아. 그치?”
“……겨우 초등학생이었는데 무슨.”
“그런가? 하긴, 그때 그렇게 잘나가던 이현성이 지금은 뭘 하고 사는 줄도 모르는 걸 보면 참. 그런 애가 뭐가 좋다고 그땐 그렇게 목을 맸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이지, 남자는 일단 능력이잖아. 소식도 모르는 걸 보면 프로로 잘나가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제대로 못 했으니 앞날도 뻔하지 않겠어? 아무튼 그때 너 왕따 당한 덕분에 걔랑 사귀는 거 그냥 물 건너갔던 게 정말 신의 한 수였네. 참 세상 모를 일이야.”
“…….”
“너 그럼 인경이랑 정은이 소식도 모르는 거지? 어떻게 한 명도 제대로 연락이 되는 애가 없어? 아무튼 여기서 일하는 거 알았으니까 담엔 다 같이 모여서 놀면 되겠다. 너 고객 한 명이라도 더 생기면 좋지 않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걔들도 네 소식 알면…….”
“김수진 씨.”
다시 끼어드는 목소리에 귓속까지 쿵, 하고 울릴 정도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순간 가장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목소리였다. 잠시간 눈을 감은 채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수습한 수진이 어느새 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설마 들었을까.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네, 상무님.”
“그러고 보니 오후에 부탁드렸던 자료요. 혹시 지금 준비해 뒀나 해서요.”
“아…….”
잠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다. 평소 같으면 빠르게 눈치를 챘을 텐데, 이미 다 타 버린 머리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 대신 준성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