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6화
“아마 기다려 달란 말은 못 했겠지.”
“…….”
“대신에 돌아와서 다시 네 곁을 맴돌았을 거야. 네가 나한테 다시 반하도록 무슨 짓이든 했을 거고.”
“…….”
“서로 마음을 알고 있었든, 몰랐든 상관없어. 분명 다른 상황에서도 난 지금이랑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네 운명은 나란 놈한테 붙들리게 되어 있었다는 뜻이야.”
단호하게 말을 마친 그가 펜을 놓고는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어느새 모든 항목에 답변이 끝난 상태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인 준성이 태연히 물었다.
“나만 이렇게 파헤쳐지는 거 좀 억울한데. 나도 궁금한 거 물어도 돼?”
“어? 어, 어. 물어봐.”
뒤늦게 반응한 심장이 쿵쿵거리며 달음질쳤다.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 해 버리는 것도 정말 재주인 것 같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건지 뒤늦게 숨이 차올라 더 당황했다. 작성한 문항을 살피는 척 고개를 숙인 수진이 입술을 깨물며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는 사이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넌 늘 목표가 있다고 했잖아. 지금의 목표는 뭐야?”
“아.”
생각보다 굉장히 진지한 질문이었다. 잠시 멈칫했던 수진이 이내 멋쩍게 웃었다.
“좀 쑥스러운데.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웃으면 안 돼.”
“절대 안 웃어. 말해 봐.”
달래듯 한층 다정해진 목소리에 수진은 다시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그를 바라봤다.
“실은 나 총지배인이 되고 싶어.”
역시나 예상 못 했다는 듯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게 조금 쑥스러워 다시 웃어 버렸다.
“사실 널 만나기 전부터 계속 같은 생각을 했었어. 여기서 총지배인이 된 다음에 널 만나면 좋겠다고.”
이건 지금까지의 자신을 지탱해 준 소중한 꿈이었다.
“힘든 일인 거 알아. 사실 이루기 힘든 꿈인 것도 알고. 그래서 더 많이 노력할 거고, 더 오랫동안 여기서 일하고 싶고, 그랬어. 물론, 널 만난 지금도 그 꿈은 변함없고.”
그리고 앞으로는 그의 앞에서 더욱 당당해지고 싶은 자신을 위한 꿈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어?”
“음…….”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조금 긴 이야긴데,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생긋 웃었다.
처음은 아버지의 오래된 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태어난 해에 처음 장만했던 중고차 한 대. 연식을 헤아리기도 힘든 그 차량은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까지 아버지의 곁을 든든히 지켜 줬다.
“졸업식 날에 아버지가 모처럼 기분 내시겠다고 엄청 유명하고 비싼 식당에 데리고 갔었거든. 그런데 거기 주차장에도 못 들어가 보고 돌아 나왔었다? 드레스 코드에 맞지 않아서 받을 수가 없다나, 뭐라나. 근데 말이 그렇지 뭐, 행색이 너무 초라해 보이니까 그냥 쫓겨난 거였어.”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내려가 싸우려던 그녀를 말리며 너털웃음을 짓던 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속이 상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보다 그녀의 졸업을 축하하는 걸 더 우선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그녀도 애써 웃어넘겨야만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차를 바꾸셨다. 너무 오랫동안 같은 차만 탔더니 이제 질리신다고. 번듯한 새 차도 타 보고 싶다는 핑계를 대셨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았다.
“그때 좀 깨달은 게 컸어. 겉으로 드러나는 걸로 사람을 판단해 버리고 뭔가 해 볼 기회조차 안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아주 많다는 걸 말이야. 그게 누군가의 소중한 순간을 완전히 망쳐 버릴 수도 있는 건데, 그건 좀 아니잖아.”
평생 타인에게 폐를 끼친 적이 없는 소박한 가족도. 늘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던 소중한 자동차도. 누군가에겐 그저 거부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너무도 큰 상처로 남았다.
“진짜 뭔가 이게 내 운명이구나 생각했던 게, 그때 이미 취업 목표를 호텔 라비타로 잡고 있었거든. 하필 그렇게 결심한 직후에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게 아주 우연만은 아닌 거 같아. 좀 웃기지만.”
그래서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고이 가슴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꿈이었다. 시간이 흘러 좀 더 현실을 깨닫게 되어 처음의 포부는 좀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그 꿈은 그녀 삶의 이정표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도 아마 이런 생각까진 못 했을 거야. 약자의 입장은 약자가 되어 본 사람만이 아는 거니까.”
적어도 저는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 마음만은 잊지 않고 살자고.
“어떤 사람에겐 별것 아닌 배려인데, 그게 어떤 사람에겐 평생의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잖아. 난 우리 호텔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총지배인이 되고 싶었던 거고. 너무 꿈같은 얘긴가?”
준성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였다. 한 집단의 대표가 될 사람의 마인드로는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이익을 추구해야 할 경영인으로서는 최하의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성은 그 꿈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왠지 그녀라면 정말 그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먼 일이 되겠지만, 반드시.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언젠가는 꼭.
“그 꿈. 꼭 이뤘으면 좋겠다.”
많은 뜻을 담은 대답에 수진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이 순간 그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고 해맑기만 한 웃음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주한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렇게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던 준성이 이내 긴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다.”
“어, 그러네.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늦었다. 가는 길 괜찮겠어?”
“응. 여기서 자고 가기엔 오늘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 될 거 같아.”
“……음?”
살짝 늦게 말뜻을 알아챈 수진이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래? 재워 줄 생각도 없었거든? 누구 맘대로.”
부러 과장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난 수진이 보란 듯 슈트 재킷을 집어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남자를 향해 던지듯 건넸다. 그러고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괜히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마세요, 상무님.”
“수작이라…….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렸을까?”
그냥 존재 자체가 수작이야, 당신은.
더 뭐라 따질 기운도 없어진 수진이 그를 외면하며 손을 내젓자 하하, 하고 웃어 버린 남자가 그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대로 품 안에 끌려들어 온 여자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댄 남자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오늘. 내 인생 최고로 맛있는 식사였어.”
그리고 새빨갛게 익어 버린 여자를 아쉬운 손길로 품에서 밀어 냈다. 이런 그녀를 두고 돌아서는 게 정말 쉽지 않지만, 더 있다간 정말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안 되겠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입술 사이로 몰래 깊은 탄식이 새었다.
“추우니까 더 나오지 말고, 문 꼭 잠그고 있어. 위험하니까.”
“응, 너 엘리베이터까지만 데려다주고.”
남의 속도 모르고 천진하게 내놓는 말에 한숨이 난다.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신발까지 신으려 하는 그녀를 제지하듯 손을 뻗은 그가 경고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나 요즘 콘돔 들고 다녀.”
난데없는 소리에 그 자리에서 멈칫한 수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너무 예쁜 짓 하지 말라고. 진짜 위험하니까.”
“…….”
“이번엔 울어도 안 멈출 거거든.”
완전히 굳어 버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그가 문을 열며 복도로 나섰다.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할 거야. 꼭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굳어 있다가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대에 다가가 드러누웠다.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엄마. 나 이 남자 너무 버거워……. 어떡해.”
문이 닫히는 틈으로 지그시 저를 응시하던 눈빛이. 입가에 머물러 있던 근사한 미소가 밤새 그녀의 머릿속을 뒤덮어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 * *
점심때가 조금 지난 오후.
약속 시간을 조금 앞두고 호텔의 로비로 들어선 수진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품 안엔 어제 준성이 작성해 준 서류가 소중히 안겨 있었다. 이내 저만치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수진이 얼른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예요, 은수 씨.”
“아, 김 주임님.”
홍보실의 이은수 사원이 금세 알은척을 하며 다가왔다. 저보다 3년 정도 늦게 입사한 탓에 직급은 낮았지만, 나이가 같은 데다 차분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나름 내적 친분을 느끼는 관계다.
짤막하게 인사를 나눈 수진은 바로 서류부터 건네고 혹시나 싶어 미리 준비해 둔 에너지 음료를 꺼내 들었다.
“쉬엄쉬엄해요.”
싱긋 웃으며 손에 쥐여 주자 얼결에 받아 든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잠 못 주무셨죠?”
“윽, 그렇게 티 나요? 큰일이네.”
“아니, 아니에요. 보기 흉하다는 게 아니라 뭔가 즐거운 일이 있었구나, 싶은 느낌?”
혹시나 신경을 쓸까 재빨리 설명을 덧붙이는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무심결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화면에 떠오른 준성의 이름을 확인한 수진이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전 또 가 볼 데가 있어서…….”
“아, 네. 들어가세요.”
“그거 잊지 말고 꼭 드세요. 좀 나아지실 거예요. 그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서며 전화를 받았다.
― 어디야. 왜 아직도 안 보여?
“지금 가고 있어요.”
― 빨리 와.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아.
“네, 간다니까요.”
뛸 듯이 걸으며 대꾸하고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어젯밤,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통화를 할 때 오후에는 호텔에 있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영진그룹의 새로운 담당자와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무심결에 꺼낸 말이었다.
― 그래? 몇 시에 오는 거야?
왜 그리 시간대와 장소를 세세하게 묻나 했더니만, 오전 일찍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 1시에 레스토랑 수에서 팀원들이랑 점심 식사 할 예정이야. 그 전에 얼굴 좀 보여 줘.]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급하게 일정을 바꾼 티가 나잖아!
권력을 막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 싶다가도 제 얼굴 한번 보자고 때아닌 점심 회식까지 제안했을 남자를 생각하니 괜히 설레는 건 또 뭔지.
어쨌거나 이런 남자를 더 기다리게 할 순 없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제 약속 시간까진 아직 30분이 더 남았지만, 핑계 김에 근처에 앉아 최애(最愛)의 자태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수진은 거의 한복판, 아주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야말로 그쪽만 조명이라도 켜진 듯 빛이 났다.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너무도 정직하게 한 남자를 향해 있어 더 눈에 띄었다.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그의 팀원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미리 예약한 자리로 안내받는 동안 아직 저를 발견하지 못한 남자가 주변을 둘러본다. 언제쯤 눈이 마주칠까 기대하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누군가 ‘저기요.’ 하며 그녀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