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5화
이상하게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온기가 너무도 간절했다. 그럼에도 선뜻 불러내진 못하고 한참 동안 불이 켜진 창문만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휴대폰에서 그녀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나 퇴근했어. 오늘도 많이 바쁜가 보네. 많이 힘들겠다. 저녁 잊지 말고 꼭 챙겨 먹어.]
고작 이런 메시지 하나에 이렇게 기뻐도 되는 걸까.
잔뜩 흐려 있던 감정이 그녀의 이름을 발견한 것만으로 화창하게 개었다. 당장에라도 불러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전화를 걸었다. 얼굴을 보면 돌아서기 힘들 것 같아 통화만 끝내고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덧대 가며 어떻게든 시간을 질질 끌어 보다 결국 넘쳐 버린 감정을 입 밖에 토해 버렸다. 보고 싶다 말해 버리고 나니 더욱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지금 어디야?
창밖을 향해 빼꼼히 드러낸 하얀 얼굴.
이어 뭔가 우당탕거리더니 전화가 끊어지고,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 귀여운 옷차림을 한 자그마한 여자가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달려왔다. 상기된 얼굴로 눈앞에 선 그녀가 가쁘게 어깨를 오르내릴 때마다 연한 숨이 하얗게 부서졌다.
이 순간 가슴이 뻐근하도록 벅차올랐다.
고작 한 가지 감정만으로 가슴이 가득 차다 못해 이대로 터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런 너를 볼 수 없는 날이 오면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 * *
안개가 걷히듯 현실로 돌아온 그의 눈앞에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는 여자가 있었다. 어느새 상을 다 차린 수진이 마지막으로 따끈한 밥을 한 그릇 떠서 올려놓고는 힐끗 그를 본다. 다 됐다는 의미임을 눈치챈 준성이 성큼 식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 차린다고 차리긴 했는데 반찬이 너무 없다.”
“무슨 소리야, 엄청 진수성찬인데?”
그냥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원룸의 작은 부엌에서 만들어 낸 걸 차치하더라도 꽤 정갈한 식단이었다. 단순히 음식을 덜어 담아 둔 느낌이 아니라 담긴 모양까지 신경을 썼다는 게 느껴졌다. 적절하게 배치된 아기자기한 식기까지 그녀의 센스가 돋보였다.
“에이, 진수성찬은 무슨. 뭐, 사실 자취하는 사람치곤 나쁘지 않긴 하지만.”
진심 어린 칭찬이 기분 좋은지 그녀의 어깨가 으쓱했다. 많이 먹으라며 슬그머니 접시 하나를 밀어 주는 손길에 기쁨이 묻어나 그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맛인지 되게 궁금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맛보게 됐네.”
“그래! 그러고 보니 언젠가 느닷없이 나타나선 도시락 싸 달라고 한 적 있었잖아. 그때 그거 뭐였어?”
“느닷없다니. 난 되게 진지했는데 그날.”
“내 입장에선 충분히 그랬거든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 시간 있냐고 물어봐 놓고 도시락 싸 오라는데 안 황당할 사람 있냐고. 데이트 신청은 못 할망정.”
“아, 그래서 그날 바로 그런 문자가…….”
“에잇! 그건 좀 잊고! 암튼 되게 뜬금없다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거기다 반찬 통은 왜 너한테서 나와? 그때 그거 수혁이한테 준 거였는데.”
쇼핑백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황당해했을 표정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웃어 버렸다. 사실 그땐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질투에 눈에 뒤집힌 상태였으니, 뭐.
“훔쳤어. 수혁이 놈이 네가 해 준 거라고 자랑하는데 꼴 보기 싫어서.”
“허, 진짜?”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접한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웬일이야. 정말 네가 그런 짓을 다 했다고? 세상에, 이걸 누가 믿어.”
“그러니까 다신 수혁이한테 반찬 해 줄 생각 하지 마. 또 훔쳐 올지 모르니까.”
“와, 이 남자 좀 봐. 무슨 그런 소릴 그렇게…….”
“내 친구이자 네 ‘친구’라서 이 정도로 참는 거야.”
말투는 차분했지만, 어딘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니 너무 가까워지진 말라고. 아예 널 훔쳐다가 내 집에 가둬 놓기 전에.”
그녀의 커다란 눈이 당혹스럽다는 듯 두어 번 깜빡였다. 지금 내 앞에 이 남자 누구니?
저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로 내놓는다는 소리가 점점 살벌해지는데, 난 왜 그게 더 설레는 거죠?
슬그머니 일어난 수진은 나쁜 놈이 되고 싶다더니 정말 악당으로 진화해 버릴 작정인 남자를 달래듯 차가운 물 한 잔을 떠다 놓았다. 그녀의 의도를 읽어 낸 건지 싱긋 웃어 보인 그가 얌전히 식사를 시작했다.
‘어쩜 먹는 것도 저렇게 예뻐.’
바른 자세는 물론, 깔끔한 젓가락질에서조차 확실히 곱게 자란 태가 나는 남자였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먹는 걸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불편할 거란 걸 알면서도 시선이 자꾸만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직원 식당에서야 보는 눈이 많아 그쪽으론 눈조차 돌리지 못했으니 대학 시절 이후론 오늘이 처음인 건가.
저녁도 거르고 지금도 밥 한 숟갈 입에 넣지 않은 상황이지만,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도리어 제가 준비한 음식이 그의 입에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들 정도였다. 내 새끼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이 날 줄이야.
“맛은 어때?”
“엄청 맛있어.”
“다행이다. 실은 어떤 게 입맛에 맞을지 몰라서 이것저것 꺼내 보긴 했거든…….”
그중에 네 취향이 하나는 있겠지, 생각하며.
신경을 쓴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대부분의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 낸 그에게 수진은 미리 준비해 둔 차 한 잔을 내놓았다. 받아 든 컵을 입술에 대며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행복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가 내 음식을 먹어 준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도시락이라도 한번 챙겨 주는 건데.
“저기, 나 뭐 하나만 부탁해도 괜찮을까?”
식사가 끝나고 난 후, 설거지를 해 주겠다며 나서는 남자를 붙잡아 도로 자리에 앉히며 슬쩍 운을 뗐다. 사실 언제 말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던 일이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듯했다.
“무슨 부탁?”
“실은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숙제가 하나 있거든.”
씩 웃어 보인 수진이 쪼르르 책상으로 달려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의아한 눈을 한 남자의 앞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이게 뭐냐고 묻는 듯 빤히 저를 보는 남자를 향해 다시 멋쩍게 웃어 보였다.
“내가 상무님이랑 친하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아니, 내가 소문내려고 한 게 아니라 이게 신 부장……. 흠, 아무튼 홍보실까지 소식이 들어가 버려서. 거기서 꼭 좀 부탁한다더라고.”
느긋한 태도로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던 준성이 문득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녀를 봤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사진 찍어 간 건 뭐였어? 홍보실에서 필요하다 그러지 않았었나?”
“그게, 후.”
잠시 말을 멈춘 수진이 난처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였다.
“솔직히 그때 그건 내 사심으로 찍은 건데 너한테 들키는 바람에…… 그냥 막 둘러대느라 한 말이었거든. 제대로 천벌받았지, 뭐. 그게 이거고.”
“아, 그러니까 그땐 진짜로 내 몰카를 찍어 가려고 하신 거다?”
“아니이― 이 사람이. 꼭 그렇게 막 대놓고 말할 거까진 없잖아.”
제 입에서 나온 단어가 영 불만인 듯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 시선을 피해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 입가를 서류로 가렸다. 아, 이젠 저런 앙탈까지 귀여워서 큰일이다.
“난 나름대로, 어? 그냥 반갑고 그래서 얼굴 좀 자주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알아도 좀, 어? 모르는 척, 아닌 척해 주면 좀 좋냐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투덜투덜, 삐친 척 종알거리는 게 귀여워서 더 놀리고 싶지만, 저러다 울까 봐 무서워서 안 되겠다. 아니, 정말 울리고 싶어질까 봐 더는 안 되겠다.
너털웃음과 함께 그녀를 달래 준 그가 꺼내 든 종이 뭉치로 눈을 돌렸다. 뭐가 그리도 궁금했던 건지, 서너 장쯤 되어 보이는 A4 용지에 잘 정리된 질문들이 적혀 있었다.
준성이 종이들을 끼우고 있던 펜을 빼 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오늘 밥값이라는 거네.”
“헤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히죽, 웃으며 식탁 위에 두 팔을 올려 겹친 수진이 뭔가 써 내리기 시작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막힘없이 질문에 대한 답을 써 내리는 손끝을 바라봤다. 그의 외모만큼이나 수려한 필체를 홀린 듯 구경하다 마침 그가 작성하던 문항을 발견하곤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 유학 관련 질문이 좀 많지? 생각하는 게 다들 비슷한가 봐. 사실 나도 좀 궁금했었거든. 그쪽 학교생활은 어땠어? 재밌……다고 하긴 좀 그런가?”
“글쎄. 크게 특별한 건 없었던 거 같아. 그냥 공부하는 건 똑같지. 여기 대학보다 치열해서 따라가기만도 벅찼거든.”
“공부를 벅차했다고? 네가?”
K대학은 서울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명문 대학이었다. 성적은 제가 더 높았지만, 함께 공부를 해 본 수진은 그 성적만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멘토를 사사하며 경영 공부를 해 온 그다. 그 때문인지, 내내 1등급을 유지하고 전국 석차로 평가받던 저와 성적 자체는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출결 점수에서 약간 불리했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가 유학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유지해 온 수석의 자리도 분명 위험했을 것이다.
“일단 언어부터 장벽이니까. 막연히 알아듣는 거랑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건 많이 다르더라. 그거 때문에 좀 애먹었어, 처음엔. 그래도 제때 졸업해서 학위 따는 게 목표였으니 그럭저럭 성공은 한 셈이지.”
세상에. 아이비리그 편입에다 심지어 조기 졸업까지 샤삭 해치우신 분이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아, 그렇구나. 하하……. 아무튼 뭐, 이번에 MBA까지 땄으니 이제 더 나갈 일은 없는 거지?”
“아마도.”
모호하게 대꾸한 그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일단은 여기서도 공부할 게 많으니까. 난 아직 부족한 게 많거든.”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이렇게나 완벽해 보이는데, 얼마나 더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걸까. 타인에게도 엄격한 편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지나치리만큼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다. 이런 점이 그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유학은 처음부터, 그러니까, 그때 한창 학교 다닐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야?”
“응.”
역시 그랬구나.
짐작은 했지만 새삼 서운해지는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앞두고도 언질조차 해 주지 않은 이유는 뭐였을까.
만약 내가 네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면…… 그때도 넌 그렇게 갑자기 떠났을까?
“너랑 사귀는 중이었더라도 유학은 갔을 거야.”
마치 제 생각을 읽어 낸 것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흠칫한 수진이 눈을 들었다. 여전히 질문지에 눈을 두고 있는 남자의 반듯한 얼굴에 잠시 넋을 잃은 사이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