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4화
그렇게 그녀를 꼭 껴안은 채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목덜미를 스치는 뜨거운 숨결.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만이 순간의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남자의 몸에 손을 두르고 가만가만, 등을 토닥였다. 평소엔 누구보다 굳건해 보이고 다소 위압적이기까지 했던 남자인데, 오늘은 상처 입은 들짐승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기꺼이 품을 내주려는 그녀의 제스처에 그는 더욱 힘을 줘 그녀를 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왔다.
“하아……. 좋다. 김수진 냄새.”
등골이 오싹하도록 깊은숨이 귓불에 닿은 순간 오금이 훅 당겨 왔다. 현기증이 나려는 걸 간신히 두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이 담백해 보이는 남자를 상대로 혼자 야릇한 반응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살포시 그 품을 빠져나왔다.
“뭐, 뭐야. 갑자기 거기다 대고 말하면 간지럽잖아.”
“왜. 뭔가 느꼈어?”
“뭐? 허, 얘가 점점…….”
갈수록 가관인 남자를 기막혀하며 바라보자 남자는 묘하게 짓궂은 얼굴로 소리를 낮춰 웃는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그 웃음이 신경 쓰였다. 분명 눈앞에서 웃고 있는데도 썩 밝지 않아 보여서 더더욱 지쳐 보이는 그런 느낌.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럽게 묻는 말투에 걱정이 깃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네가 달려와 주려고?”
“마음이야 그러고는 싶은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
“흠, 정말 그럴까?”
그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번엔 지그시 얼굴을 마주 본 채로 조금은 음험하게.
“도움 줄 방법이 분명 있을걸. 잘 생각해 봐.”
저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입술로 내놓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건 절대 내 탓이 아닐 거다.
샐쭉 눈을 흘기는 것으로 못된 수작질을 차단한 수진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저녁 먹어야지, 이제. 아까 아직 안 먹었다며.”
“어, 네 얼굴도 봤으니 이제 진짜 가서 먹으려고.”
“이 시간에 혼자 먹는 거네. 그럼 별로 맛도 없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정 그러면 퇴근하신 김 비서님이라도 불러내 볼까?”
“어우, 어우! 제발 그러지 마. 완전 악덕 상사라고, 어? 막 가명으로 각색했는데 다 알아보게 써서 인터넷에 올리실라.”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 가득 실린 충고였다. 그의 웃음이 이제야 좀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물끄러미 와 닿는 시선을 의식하며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수진이 헛기침을 하곤 그를 마주 봤다.
아쉽고 아쉬워서 선뜻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두 사람의 침묵이 이 순간 조금 더 길어졌다. 그렇게 가고 싶지 않은 남자와 보내고 싶지 않은 여자의 시선이 한동안 서로에게 머물렀다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이젠 진짜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고 있는 남자가 긴 숨과 함께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저기, 잠깐만.”
작별의 말을 건네려다 멈칫한 준성이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에 약간의 기대감이 떠오르는 걸 감지해 낸 수진이 곱아드는 손끝을 매만지며 남은 용건을 꺼내 들었다.
“별건 아닌데, 저……. 괜찮으면 내 방에서 밥 먹고 갈래?”
순간 그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왠지 ‘라면 먹고 갈래?’ 같은 뉘앙스였나 싶어 수진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막 그런 이상한 뜻 절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사실 이 근처엔 변변한 식당도 없고, 좀 더 멀리 가기엔 시간도 너무 늦었잖아. 배 많이 고플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이미 결정을 내린 듯 성큼 다가오며 묻는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조금 불안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뺀 수진이 제 딴엔 아주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냥 진짜로 밥만 주는 거라고. 이상한 기대 할 거면 지금 다시 가고.”
“안 해. 나도 밥만 먹고 싶어.”
그게 가능하다면.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흑심을 덮으며 대꾸하자 그녀의 미간이 미심쩍은 듯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 결심한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젠 무를 수도 없게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재촉하듯 걸음을 떼는 남자의 등 뒤로 철컥, 차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일단, 들어와.”
이 남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선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처음에야 제 뜻이라곤 조금도 없었다지만, 이번엔 제가 나서서 그를 초대한 상황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단정하기 그지없는 슈트 차림의 남자가 현관에 들어선 순간 아주 익숙한 위화감이 밀려들었다. 더 정확히는,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후회였다.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이 좁은 집 구석에서 가뜩이나 심장이 불편해지는 남자랑 단둘이라니요.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어쩔까. 벌써 저 남자는 당당히 내 집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한 다음인데.
“잠깐 저쪽 침대에 가 앉아 있어. 준비하다 튈 수도 있으니까 이쪽엔 오지 말고. 금방 준비할게.”
일단은 저 남자를 최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수납하는 게 먼저였다. 침대가 있는 자리까지 들어선 그가 슈트 재킷을 벗는 걸 잠시 바라보다 얼른 냉장고로 다가갔다. 어쨌거나 지금은 한 끼라도 든든히 먹이는 게 우선이다.
열심히 처음의 목적을 상기하며 냉동실을 열어 보았다. 평소에도 제 먹을거리는 잘 챙겨 놓고 사는 편이라 가벼운 한 상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차려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특하게도 어젯밤, 졸린 와중에도 열심히 끓여 소분해 얼려 놓은 소고기뭇국과 지난 주말에 잔뜩 만들어 둔 떡갈비가 보인다.
그것들을 재빨리 꺼내 데우며, 냉장고 한쪽에서 잘 익은 김치를 꺼냈다. 늘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두는 밑반찬 두어 가지도 예쁘게 담아냈다. 거창한 건 준비할 시간이 없기에 간단히 계란말이도 만들어 봤다.
준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좁은 주방인데도 그녀는 어디 한 군데 부딪치는 일도 없이 척척 움직이며 뭔가를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이 나무옹이 주변을 분주히 헤매는 작은 다람쥐 같다는 생각에 설핏 웃어 버렸다.
그에겐 낯선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매일같이 지켜봤던 카페에서의 그녀가 장소만 바뀐 채로 그의 눈앞을 맴돌고 있었다. 지그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수채화처럼 아련한 그리움에 물들어 갔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뭐든 척척 잘해 내던 여자였다. 그녀의 능력은 오로지 그녀 스스로 잠을 줄여 가며 만들어 낸 노력의 산물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지켜 주고 싶고, 감싸 주고 싶은 한편, 그런 도움조차 바라지 않을 그녀임을 알아서 초조함을 느끼곤 했다.
며칠째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불만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바쁜 일과에 짬을 내어 휴대폰을 들여다봐도 도착해 있는 메시지라곤 안부를 묻거나,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한 게 전부였다.
바빠진 저를 향해 보고 싶다, 연락이라도 자주 해라, 뭐 이런 불만이라도 내놓을까 봐 지레 미안했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일에 몰두하고 있을 저를 배려하기 위함이란 건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삶이 있으니 온전히 제게만 모든 관심을 쏟고 살 수 없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스스로 만들어 낸 불안감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연락 오나 했다. 한 사장이 그 꼴 났으니 이제야 본게임 시작인데. 대비는 해 놔야지, 안 그래?’
한 시간 전까지 본가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형, 준영의 목소리가 툭 떠올랐다.
* * *
“어쨌거나 본론만 말하자면, 정황은 빼박이고, 수사 과정에서 형(刑)이 얼마나 떨어지느냐가 문제야.”
한 살 위의 형 준영은 언뜻 그와 닮은 얼굴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수려한 분위기의 준성과는 달리 좀 더 키가 크고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때문에 좀 더 야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과격한 편이었다.
“당분간 여러모로 복잡할 거야. 우리 회장님께서 수사 결과 나오는 대로 한 사장 패거리를 다 찍어 낼 생각이신 거 같거든.”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제 손으로 무덤을 파 놨으니 등을 떠밀어 묻어 버리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든 책임을 지우고 잘라 내는 것으로 실추된 그룹의 이미지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야 정해졌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벌어질 일들이었다.
“당연히 순순히 물러나 줄 위인이 아니지. 조짐이 심상치 않아. 이번 일 터진 것도 회장님이 뒤에서 수를 쓴 거라 떠들고 있던데.”
그 순간 준성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하니 한 회장을 상대로 감히 그런 얼토당토않은 의심을 할 줄이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꼭 저 같은 생각만 하는 거지.”
준영의 말대로 한정균 사장은 썩 훌륭한 어른이 아니었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고 실책이 잦아 이런저런 구설이 많았기에 한 회장은 오래전부터 한 사장을 그 자리에서 밀어내고 싶어 했지만, 동기간의 의리가 있고, 그녀가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기여한 공로가 있어 망설이던 참이었다.
게다가 한 사장은 세 형제들에게도 상당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특히 완벽하게 경영 수업을 받고 자란 준성을 언젠가 자신을 위협할 존재로 진즉부터 의식하고 경계해 왔었다.
그런 준성이 대뜸 요직에 등장했으니 얼마나 속이 꼬여 들었을까.
“맞아. 딱 네가 등장하고부터 틀어진 거야. 네가 변변찮으면 어떻게든 찍어 누를 텐데, 누가 한 회장 아들 아니랄까 봐 싹이 남달랐거든. 거기다 회장님은 아직 현역으로 팔팔하시고. 이렇게 한 20년, 아니 10년만 버텨도 세대교체는 무리 없지. 그냥 낙동강 오리알 꼴이 된 거야.”
어차피 탐욕으로 뭉친 인간들이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손해가 없도록 빠르게 손을 떼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 3월 정기주총 때 해임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올 것 같은데, 호락호락 물러나진 않을 거라 개싸움 예정이야. 그러니 당분간은 흠 잡히지 않게 잘 처신하라는 어명이시다. 특히 너는 더 몸조심하고. 제일 비싸게 팔려 나갈 놈이니까.”
불쾌한 뉘앙스에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렸다. 그런 동생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준영은 킬킬거리며 웃어 댔다.
“어차피 이 바닥 결혼은 다 장사잖아. 마침 우리 형제들 셋 다 딱 결혼하기 좋은 때라, 결국 나도 피하긴 힘들 것 같긴 하다. 뭐, 그래 봤자 너만 하겠냐만.”
정략혼을 말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헤쳐 나가야 할 일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런 중대한 상황과 맞물려서 찾아오게 될 줄이야.
“우리 쪽에 힘을 실어 줄 만한 세력이랑 혼맥으로 묶이는 게 현실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 대강 후보군도 추려지는데 일단 혼기 찬 따님이 있는 집안만 꼽아 보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귓전에서 흩어졌다. 이후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딱히 머릿속에 남진 않았다. 그저 어떻게든 이 일을 제 선에서 해결하고, 그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
술이라도 하자는 권유를 다음으로 미루고 곧장 본가를 빠져나온 후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