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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43화

집에 돌아왔을 때는 8시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모처럼 칼퇴근을 했는데도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눕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면 요즘 꽤나 바쁘긴 했지. 그나마 남아 있던 기력조차 만원 전철에 시달리다 보면 바닥을 보이기 일쑤였다.

“으으, 일단 씻자.”

잠깐이라도 쉬었다간 만사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곧장 욕실부터 찾았다.

한참 동안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샤워를 마치고 난 후엔 습관처럼 냉장고로 다가갔다. 때마침 딱 하나 남아 있던 캔 맥주가 눈에 들어온다. 주저 없이 그것을 꺼내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자 그제야 조금 기운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안주. 안주가 있나.”

술을 끊을 거라는 결심 따윈 진즉에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유전자부터 금주는 불가능한 몸이었다. 되지도 않을 금주에 기운을 빼느니 빠르게 주제를 파악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쪽이 정신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키득거리며 과자 하나를 찾아낸 수진이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후 늦게 먹은 간식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은 이걸로 대신할 생각이었다. 다시 맥주를 입에 머금으며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켜자 그새 도착한 메시지 몇 개가 눈에 띈다. 업체에서 온 문의가 셋. 광고문자가 둘.

먼저 문의 메시지에 일일이 답신을 넣어 준 수진이 과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많이 바쁜 건가?”

아직까지도 수신함에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휴대폰을 바라보는데 방금 전 수혁과의 통화 내용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제든 네가 먼저 연락하고 찾아가도 된다는 소리야.

잠시 고민하던 수진이 그의 이름을 눌러 메시지 창을 열었다.

[나 퇴근했어. 오늘도 많이 바쁜가 보네. 많이 힘들겠다. 저녁 잊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최대한 부담 주지 않을 단어들만 골라 작성을 마친 그녀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바쁘다면 굳이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를 가득 담은 메시지였다. 미련을 버리고 맥주만 다 마시면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그녀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맥주 캔에 몇 방울 안 남은 액체를 홀짝거려 보고, 볼 것도 없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부스러기뿐인 과자 봉지를 입에 털어 보면서도 시선은 어느 순간 휴대폰을 향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각오는 했는데도 정말로 연락이 없으니 섭섭함 한편으론 슬슬 걱정이 되었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갑자기 오한이 밀려오는 것 같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화면이 검게 바뀌더니 준성의 이름이 둥실 떠올랐다. 반가운 이름을 확인한 수진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바로 받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받아?

낮게 잠긴 남자의 음성에 설렐 새도 없이 질문이 가슴에 콕 박혀 온다. 오매불망 기다린 걸 너무 티를 내 버렸나 보다. 괜히 민망해진 수진이 보이지도 않는 그를 의식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어, 그게. 이제 막 집에 들어온 참이라서. 그, 뭐 좀 확인하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더라고.”

― 아. 내 전화 기다린 건 아니고?

“그, 그건 아니지. 당연히. 너 바쁜 거 다 아는데.”

뜨끔한 속을 추스르며 잽싸게 둘러댔다. 하여간 이 남자는 닥치고 돌진밖에 모르는구나. 하도 직구만 맞아서 그런지 이젠 가슴팍이 다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

“회사야?”

― 아니. 약속이 있어서 밖이야.

“이 시간까지? 설마 일 때문이야? 저녁은?”

― ……먹었던가?

조금 자신 없다는 듯 느려진 대꾸에 그녀의 말이 많아졌다.

“뭐? 설마 아직도 안 먹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 이런 말단 직원도 밥은 안 굶고 사는데 하늘 같은 상무님이 밥을 굶고 일하는 게 어디 있어?”

― 하하…….

“웃을 일이 아니잖아. 가뜩이나 일도 바쁘면서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면 몸 축나는 거 순식간이란 말이야. 나이 들어 고생한다고.”

― 걱정 마. 흔한 일 아니니까. 너랑 통화하고 나서 바로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끊어야지. 빨리 가서 밥부터 먹고.”

― 잔소리는.

“잔소리라니. 너 내가 진짜 심각하게 잔소리하는 걸 못 들어 봤구나? 내가 맘먹고 우리 팀원들 닦달하는 모습이라도 한번 봐야 아, 이건 완전 유치원 선생님처럼 다정한 말투였구나……. 흠. 뭐, 암튼 그렇다고.”

쑥스러움을 이겨 내려 이 말 저 말 주워섬긴다는 게 조금 오버였나, 싶었을 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한결 가라앉은 음성에 묘하게 가슴속이 일렁여 잠시 숨을 멈췄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건강을 걱정하는 게 이렇게 간질거릴 수도 있는 건가.

― 알았어. 얼른 가서 먹고 자기 전에 다시 연락할게.

“꼭 챙겨 먹어야 해. 잊지 말고.”

― 뭐 먹을지 골라 줘.

“뭐? 진짜 별걸 다 시키려 그래. 오늘 고생 많았으니까 고기 먹어, 고기. 됐지?”

― 무슨 고기인지도 골라 줘야지.

“아잇, 진짜!”

― 하하하, 알았어. 오늘은 불고기전골 먹어야겠다. 기억나지? 예전에 너랑 자주 먹었잖아.

“아, 기억나. 나 알바하던 카페 옆 블록에 있던 할매백반 말하는 거지? 거기 진짜 싸고 맛있었는데. 그때도 좀만 늦으면 자리 없어서 강의 끝나자마자 달려야 했잖아.”

― 맞아, 거기. 아직도 장사하시려나.

“할머님 아프셔서 집에 계시고 이젠 아드님이 대신 하신대. 다행히 맛은 크게 안 변했더라고. 얼마 전에도 가 봤거든. 아, 우리 언제 시간 나면 오랜만에 학교나……. 아니, 참. 이럴 때가 아닌데.”

정작 끊으라며 닦달하던 그녀가 더 신나서 이야기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우, 이러다 식당 문 다 닫겠어. 빨리 밥부터 챙겨 먹어. 나도 이제 자야 하니까 그만 끊고…….”

― 보고 싶다.

연방 잔소리를 내뱉던 그녀의 입술이 곱게 맞붙었다.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심장이 세차게 반응한다.

잠시 말문을 잃었던 그녀가 슬며시 웃음이 번져 가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전화 한 통에 기분이 들뜨고,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설레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이 너무 낯설다.

이 남자와 밀당을 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쳐도 조금은 튕길 줄도 알아야 할 텐데. 이 마음은 그저 그가 당기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가고만 있으니 큰일이었다.

하,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였다니.

두근거리는 가슴팍을 부여잡은 그녀가 수줍게 대꾸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이야.”

―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미치게 보고 싶어.

“…….”

―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

― 실은 하루 종일 그 생각밖에 안 했어.

“일하는 사람이 직장에서 그러면 어떡해. 변태도 아니고.”

― 그러게. 어떤 예쁜 변태랑 사귀다 보니 나도 변태 다 됐나 봐.

분명 농담으로 하는 말일 텐데, 저질러 놓은 업보가 많은 그녀로서는 참 뭐라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괜히 후끈해지려는 뒷목을 긁적이며 웃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하게 웃던 남자가 한층 은근한 투로 묻는다.

― 지금 거기로 갈까?

“지금? 안 돼, 지금은. 너무 늦었잖아.”

― 진짜 늦었어?

“당연하지. 우리 집에서 너희 집까지 거리가 얼만데. 이 시간에 어떻게 그래. 너 피곤해서 안 돼.”

― ……거기까지 가는 시간이 안 들어도 된다면?

이게 무슨 소리야.

잠시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다닥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여는 손길이 급했다.

“지금 어디야?”

그렇게 물은 순간, 저만치 골목 어귀의 가로등 아래 어딘지 익숙한 차량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남자를 발견한 수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잠깐만, 설마 저기, 저 사람. 아니, 지금 우리 집 앞이야?”

― 응. 그냥 너 잘 자는지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미쳤어! 자, 잠깐만 기다려! 5분만! 아니, 아니 지금 바로 나갈게!”

한쪽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워 놓은 채로 후다닥 옷장을 뒤지며 외쳤다. 이미 파자마를 입고 있었기에 그 위로 도톰한 후드 티셔츠만 냅다 껴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적당히 매만졌다. 이어 희멀건 입술에 살짝 생기가 돋도록 컬러 립밤까지 바르고 난 그녀가 허둥지둥 문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어 무작정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제집이 고작 3층이라는 게 이럴 때는 천만다행이었다.

더욱 쌀쌀해진 바람이 옷 틈으로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골목까지 달려 나간 그녀가 이윽고 차체에 기대선 남자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신없이 달려온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웃는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눈에는 똑같은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뛰어와?”

너무도 다정히 묻는 말. 새삼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또 깨닫게 된다.

내가 정말 이 남자를 이렇게나 좋아하는구나, 하고.

“미쳤나 봐. 이 시간에 여길 오면 어떡해.”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 괜히 더 퉁명스럽게 타박을 내놓았다. 그새 살이 내린 건지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상황이 힘들다는 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이 밤중에 예고도 없이 여자 집 앞까지 오는 거 아니라고.”

대뜸 내놓는 타박에도 그는 나른하게 웃기만 한다. 더욱 날카로워진 턱선과 한결 뚜렷하게 솟은 콧대. 베일 것처럼 예리해진 눈빛에 반응하는 제 심장이 참 철없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괜한 섭섭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몽글거리는 감정에 녹아내리고 있다.

“오자마자 잔소리는.”

“내가 지금 잔소리 안 하게 생겼어? 얼굴이 그렇게 상해서는…….”

무턱대고 튀어 나오려던 말을 꾹 눌러 삼켰다. 힘든 거 뻔히 아는데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느냐고. 나 때문에 네가 더 피곤해질까 속상하다고. 연이어 튀어나올 뻔했던 말들이 가슴속에서 조용히 고동쳤다.

“수진아.”

“…….”

“고개 들어 봐, 김수진.”

이끌리듯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입가를 보자 또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눈을 깜빡인다.

“네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자꾸 그렇게 눈 피할 거야?”

“봐서 뭐 하게. 어차피 아는 얼굴 본다고 뭐 달라지나.”

마음은 애틋한데 튀어나오는 말이 제 의도완 다르게 자꾸만 불퉁해진다. 제 입을 딱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제 태도에도 가만히 웃던 남자가 불쑥 다가섰다. 찬바람과 섞인 남자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가슴이 시큰해지는 향을 의식하며 그를 바라본 순간 그의 품이 눈앞을 덮쳐 왔다. 어어,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여자의 몸이 커다란 남자의 품 안에 쑥 빨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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