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42화
그와 진짜 연애를 시작한 지도 어언 3주.
이제 시작하는 연인에게 3주란 매일같이 얼굴을 봐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그런 시기가 아닌가.
더군다나 10년을 묵힌 인연이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쌓인 감정이 또 얼마나 애틋할까. 당연히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찾을 줄 알았다. 그렇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안달을 하고, 어쩌다 함께하면 금세 야릇해진 눈빛을 교환하다 누가 먼저라 할 새도 없이 입맞춤을 나누고.
스치듯 눈만 마주쳐도 불꽃 튀기는 격렬함이 함께해야 할 때인데…….
“왜 나는 이러고 있는 걸까요?”
조용한 읊조림이 차디찬 허공 속으로 흩날렸다.
안타깝게도 그런 진전을 바라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타이밍도 좋게 그룹 내에 큰 문제가 발생한 탓이었다.
11월 초, HJ건설의 회계팀 직원 하나가 회삿돈 30억 원가량을 빼돌려 마카오에서 도박을 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 횡령 건으로 시작된 수사는 자금의 출처를 파악하다 정확히 2주 전, 뜻밖의 비자금 정황을 발견하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HJ건설의 주요 인사 몇몇이 합심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사실 저 같은 평범한 사원에겐 남의 일이나 다름없는 사안이지만, 준성에겐 조금 다른 문제였다. 사건 자체야 당연히 그와 상관없더라도, 이미 그런 사건이 벌어진 것 자체로 그가 추진 중인 시내 면세점 특허 취득 과정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호텔 라비타의 면세사업부 측에선 ‘면세점 사업 계획서’ 이행 내역을 거의 100% 가까이 이행하며 무난히 심사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해 왔다. 특히나 배점이 높아진 상생 협력 항목을 완벽하게 달성했다는 건 가장 큰 이점이었다.
그런 타이밍에 터진 비자금 건이라니. 특허권을 따낼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은 오로지 심사자들의 판단으로만 이뤄진다. 그것은 곧 어느 정도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사건이 터진 이상, 심사자로서는 당연히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칫 평가 점수를 낮게 줄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면세사업부, 특히나 새로이 꾸린 시내점 오픈 TF팀의 책임자인 준성이었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시시각각 변해 가는 상황을 발 빠르게 수습하느라 밤늦도록 회의를 하고 출장을 다녀오곤 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이었는데, 이젠 매일 만나기는커녕, 일주일에 두어 번 스치듯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호텔이나 사무실에서 우연히 그를 보기라도 하면 그날은 로또를 사야 하는 날이었다.
“하아, 내 팔자가 어쩌다.”
하늘의 별 같았던 남자를 품에 넣어 놓고도 그놈의 타이밍 때문에 제대로 활용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슈트 속의 완벽했던 그 어깨 라인이며, 돌처럼 단단했던 허벅지며……. 제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러 오던 우람한 것의 자태는 대체 언제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요?
“……이렇게 점점 변태력만 늘어 가고.”
님을 봐야 뽕도 따는 거지.
얼굴 보기조차 이리 귀한 남자랑 연애를 하려니 쌓이는 거라곤 욕구 불만뿐이로구나.
점점 어두운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은 수진이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어쨌거나 마지막 메시지의 상태를 보아 하니 당장은 그의 목소리조차 듣기 요원해 보이고.
“그럼 오늘도 출석 도장이나 찍어 볼까.”
사무실에서 전철역까지는 대략 10여 분쯤. 이 정도면 지금 전화를 걸 상대와의 통화 시간은 충분했다.
― 아 또 왜.
정확히 세 음절뿐인 대사에 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다.
“왜긴 왜야. 마이 프렌드가 잘 있는지,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 말은 똑바로 해라. 내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대나무 숲이 필요했겠지. 왜. 혹시 준성이한테 섭섭한 일이라도 생겼냐?
“아니. 그럴 리가.”
섭섭할 일이라도 생겨 봤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우울해지는 것 같아 애써 쾌활하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음악 소리 나는 거 보니 출근은 잘 한 거 같네.”
― 그런 건 나한테 물을 게 아니라 네 애인한테 물어야 할 소리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바쁘다고 문자 왔었어.”
― 난 안 바쁘냐?
“에이. 친구 사이에 이러기야?”
― 이젠 그냥 친구라고 하긴 힘들지. 넌 애인 있는 여자고. 나는 네 애인의 둘도 없는 불알친구고.
아, 이건 진짜 좀 섭섭한 말이네. 제대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수진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준성과 연애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수혁에게 이 소식을 전했었다. 술에 취한 저를 준성에게 던져 버린 일에 대한 약간의 복수심을 섞어 일부러 닭살 돋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사실은 두 사람을 떠밀어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이렇게 대놓고 밀어내는 뉘앙스가 더 섭섭한 건지도.
“그래서 뭐.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 꼭 그런 건 아니고. 상황이 달라졌으니 우리 사이에도 약간의 거리감이 필요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지.
“아니, 야.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손절해 버리려고 들면 내가 섭섭하지. 너까지 없으면 난 누구랑 수다 떨라는 건데.”
― 왜, 요즘 자주 못 봐서 힘들어?
준성의 상황을 수혁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정확히 제 마음을 짚어 낸 말에 수진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아니, 뭐. 그런 거까진 아니고.”
― 그런 건 솔직해도 돼.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불만이 있으면 이런 게 싫다. 확실히 말을 해야 준성이도 알지.
말로는 기대지 말라더니, 알아서 제 고민을 척척 파헤쳐 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워낙에 오지랖이 넓어 여기저기 참견하길 좋아하던 녀석이긴 했다. 지금 수혁에겐 저와 준성의 관계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없을 거다.
이럴 거면서 뭘 연락을 줄이래.
“그런 소릴 어떻게 해. 지금 본인 일도 충분히 바쁜 사람한테.”
― 왜 못 해? 이젠 네 애인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니까.
절로 치솟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 다른 것보다 미묘하게 위축되는 저 자신이 문제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사람을 사귀는 재능이 없었다. 적당히 허물없이, 크게 눈치 보지 않고도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지금은 수혁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부모님께도 속엣말을 다 터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이렇게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를 시작한 건 준성이 처음이었다. 한때는 친구였다지만, 지금의 수혁만큼 편한 사이도 아니었고, 정식으로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거라 의식하고 나니 마음에 걸리는 것만 늘어 갔다.
메시지 한번, 전화 한번을 걸어 보려 해도 혹시 그를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불편한 상황은 아닌지. 이런 걱정이 먼저 튀어나와 선뜻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이라면 미움받을까 두려울 일도 없겠지만, 이미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선 잃을 게 너무나도 많았다. 언젠가는 지금 쥐고 있는 이 감정도 놓아야 할 때가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좀 겁이 났다.
하. 정말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소심해진 거냐고.
“그래도…… 준성이가 먼저 연락은 자주 해 주는 편이야.”
잠시간 말이 없던 그녀가 뒤늦게 덧붙였다. 보지 않아도 수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분명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나 젓고 있겠지.
― 그놈이 먼저 연락해 준다고 안심할 게 아니야. 남자는 제대로 단속을 해 줘야 한다고. 너무 풀어 주면 안 돼.
“무슨 소리야. 남자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준성이 절대 그런 사람 아니거든?”
― 맞는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거고.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제든 네가 먼저 연락하고 찾아가도 된다는 소리야. 너 그럴 자격 있다고.
“…….”
― 어려운 일 아니잖아. 지금 바로 전화 끊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건데.
딱 잘라 말한 수혁이 ‘츄라이, 츄라이.’라고 덧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며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래도 너라도 응원해 주니 고맙다, 야.”
몰래 하는 연애라서일까.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다. 가끔은 같은 여자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며 연애 상담도 하고, 소소하게 기쁜 일에 축하도 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좀 서글펐다. 이건 아쉽게도 남자인 친구 수혁에게선 절대로 충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누구에게도 본심을 다 털어놓진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 온 세월이 길었다. 괜찮다고 믿고 살다 보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점점 짙어지는 외로움을 애써 외면하며, 그래도 상처받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진심으로 축하받고 싶은 일이 생기니 잘 막아 둔 댐이 훅 터져 버린 것처럼 쌓여 있던 외로움이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에 제대로 마음을 나눌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연희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무심코 중얼거린 이름에 더욱 가슴이 시렸다.
왠지 어떤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메웠다. 이미 연희에겐 그날의 고백 사건 따윈 기억에도 남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수진의 망설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데에서 비롯됐다.
몇 번 기회는 있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오래전 일을 언급하며 ‘사실은 나도 그때 준성이를 좋아했었어.’라고 정정하는 게 약간 낯간지러웠다. 어차피 가망 없는 짝사랑인데 굳이 그 감정을 말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고.
설마 하니 자신이 진짜 그 송준성과 사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당장 저부터 실감이 나지 않는데.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수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당장에 전화로 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멀리 있는 친구를 붙잡고 징징거리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지금껏 해 본 적 없는 일이기도 했다.
곧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라 했으니 한번 날 잡고 밤새 술이라도 마시며 길게 썰을 풀어 줘야지.
아마 연희라면 그 어떤 누구보다 기뻐해 줄 것이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냐며 서운해하다가도 긴 솔로 인생을 벗어난 소감이 어떠냐고 장난스럽게 캐물어 댈 테지. 그렇게 웃는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선해서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