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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1/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41화

12월이 되자 계절은 빠르게 겨울로 접어들었다. 1년 중 가장 화려한 연말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그리고 새해가 연이은 시기로 보통의 사람들에겐 가장 설레고 즐거운 때지만, 호텔 부지 한쪽의 작은 빌딩을 들락거리는 인간들에겐 다 남 얘기일 뿐이다.

“어우, 춥다. 추워! 이놈의 나라는 어떻게 된 게 중간이 없냐고, 중간이. 여름엔 쪄 죽고 겨울엔 얼어 죽고.”

퇴근을 앞둔 시각.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나 과장이 죽는 소리를 해 댔다. 마침 유리에게 찻잔을 건네고 있던 수진이 오셨어요, 묻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잘 오셨어요. 유자차 좀 얻어 왔거든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이야, 이게 웬 횡재야. 고마워. 부탁할게.”

이어 털썩 자리에 앉은 나 과장이 투덜투덜 말을 이어 갔다.

“올해는 늦더위까지 난리였잖아. 이제 숨 좀 쉬어지나 했더니만, 어떻게 된 게 한 달을 못 버티고 바로 겨울이냐고.”

“그러게요. 살 만한 날이 1년에 한 달도 안 되는 거 같죠?”

“진짜 딱 10월이랑 그나마 5월 정도만 살 만한 거 같아. 봄엔 미세 먼지에다 여름엔 지옥 불. 겨울엔 시베리아 특송까지, 아주 그냥 골고루 경험 가능하다니까.”

“아, 10월 하니까 하는 말인데, 개천절이 왜 10월 3일인 줄 아세요?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 세우러 왔다가 10월 날씨만 보고 덥석 계약해 버린 거래요. 완전 이건 부동산 사기 아니에요? 최소 1년은 살아 보셨어야지.”

“뭐? 푸하학……. 야, 그거 말 된다.”

나 과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작은 찻잔 하나를 가지고 들어서던 수진의 입가에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뭐야. 그런 이야긴 또 어디서 들었어?”

“인터넷 서핑하다 봤어요. 주임님도 웃기죠? 이거 어디서 본 건지 알려 드릴까요? 완전 드립 장난 아닌 데라서 우울할 때 들어가서 보면 딱이에요. 함 봐 보실래요?”

유리의 얼굴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인터넷 창부터 켜 보일 기세다. 그런 유리의 폭주를 막는 건 사수인 제 역할이었다. 일거리를 꺼내 드는 나 과장에게 유자차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온 수진은 옆자리의 유리를 향해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설마 유리 씨. 업무 시간에 그런 거 보면서 월급 루팡 하는 건 아니지?”

“아잉, 주임님. 너무해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세요?”

“어,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이이잉, 진짜.”

“알았어, 아니라고 할게. 얼른 일이나 하자. 아까 구매부에 연락해 놓으라는 건 어떻게 됐니?”

장난기 가득한 앙탈을 가볍게 받아 주고서 바로 일에 집중했다. 빠르게 자료를 확인해 작업 중이던 서류와 대조해 가며 후다닥 정리를 끝내고, 프린트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해 깔끔히 철해 놓기까지. 막힘없이 이어지는 움직임을 존경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유리가 슬그머니 말을 건네 왔다.

“주임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크게 별일은 없는데. 왜?”

“되게 활기차 보여서요. 꼭 무슨 좋은 일 있는 사람처럼 행복이 뿜뿜 하는 느낌? 꼭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요.”

생각 외로 예리한 지적에 지레 놀란 심장이 살짝 졸아붙었다.

연애하는 게 벌써 티가 나는 건가. 제가 생각해 놓고도 연애라는 말이 그렇게 간지러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 와중에 남자의 얼굴과 완벽했던 슈트 속의 사정이 불쑥 떠오를 건 뭔지.

갑자기 목덜미가 후끈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당황한 수진은 열심히 머릿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효과가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표정에서 티가 나진 않은 모양이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유리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아까 점심때 일이요. 혹시 마음 상하셨을까 봐 계속 조마조마했거든요.”

어째 유독 제 웃음에 크게 반응을 한다 싶더라니.

자연스럽게 점심때 있었던 민 주임과의 트러블을 떠올린 수진이 쓴 입맛을 다셨다.

같은 해에 주임을 달았지만, 입사는 민 주임이 무려 2년이나 빨랐다. 한마디로 민 주임에게는 빠르게 제 자리까지 치고 올라온 자신이 사사건건 눈엣가시란 뜻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가급적 일로는, 특히 고객 관련한 일로는 절대 부딪치지 않으려 노력해 왔지만, 오늘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마자 외국인 손님 몇이 공항에서 아주 불쾌한 상태로 호텔의 조치를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민 주임이 담당한 고객사의 임원들로, 바뀐 일정을 서로 체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호텔 측에서 고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일.

다른 고객사와의 회동으로 연락이 닿지 않는 민 주임 대신에 급히 룸을 준비시키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사람을 보내 그들을 모셨다. 정중한 사과도 제 몫이었다. 재계약 건까지 들먹이며 피를 마르게 하던 그들은 그제야 화가 풀렸는지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를 떠났고, 수진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황급히 돌아온 민 주임이 갑자기 화를 내며 펄펄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를 우습게 봤다며, 이 일은 월권이라며 몰아붙여 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좋아요. 주임님이 저보다 더 오래 일하셨으니 아는 것도 더 많으시겠죠. 더 나은 방법이 있었는데 제가 미처 몰랐나 봐요. 거기서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고쳐 볼게요.’

수진은 그에 맞서지 않았다. 조용히 민 주임의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진지하게 의견을 제시한 것이 반응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대로 입을 다문 민 주임은 외근을 핑계로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게 대략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솔직히 저라면 그런 모함까지 받으면 진짜 온몸이 벌벌 떨리고 눈이 뒤집혔을 거 같은데, 주임님은 너무 초연하고 당당하시더라고요. 좀 멋있었어요.”

“별소릴 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뒷말하는 거 아니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두 눈 가득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하는 말이 낯간지러워 얼른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을 털어 내는 시늉을 하던 유리가 생긋 웃는다.

“근데 솔직히 요즘 민 주임님 상황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요. 컴플레인이 벌써 몇 번째예요?”

또 뭔 소리를 하려는 건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을 말릴 새도 없었다.

“아무튼 다들 이번에 김 주임님이 대리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서 더 그런 거 같다고 하세요. 솔직히 제 생각도 그렇고요. 실적이 엄청 차이 나는 건 사실인데 그걸 못 받아들이시면 어쩌자는 건지.”

비슷한 이유로 최 대리도 요즘 제게 한창 까칠하게 굴곤 했다. 사실 저도 딱 그 이유 같아서 선뜻 아니란 말은 안 나왔다. 씁쓸해진 표정을 숨기려 모니터로 눈을 돌린 수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지나는 투로 대꾸했다.

“실적이야 뭐, 내가 운이 좋았던 거고. 알잖아. 거래처 좋은 곳 만나는 것도 운인 거.”

“에이, 그런 거면 영업 잘하는 사람이 왜 따로 있겠어요? 그거 다 실력이에요.”

새침하게 대꾸한 유리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하여간 눈치는 빤해 가지고 정말 노빠꾸 직진이로구나. 정말 어린것들 무서워.

“이제 그만 떠들고 마저 일 마무리해야지?”

“네. 아, 맞다. 아까 주임님 잠시 자리 비운 사이에 영진그룹에서 연락 왔었어요. 오시는 대로 바로 연락 달라시던데요.”

“아니, 이 사람아. 그걸 왜 이제 말해.”

“헤헤. 그럼 저 홍보실에 좀 다녀올게요.”

샐쭉 웃어 버린 유리가 총총 사무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젓고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30여 분 전쯤, 한창 부장실에서 헛소리를 듣고 있던 그 시간에 연락이 온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서 과장님. 김수진 지배인입니다.”

2년째 저와 거래 중인 담당자 서 과장은 이제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의 여자였다. 다행히 꽤 늦은 연락에도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대신에 좀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만두신다고요? 아, 혹시 지난달에 고민하시던 거 결국 하기로 하신 거예요?”

― 네, 맞아요. 역시 기억하시네요.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더라고요. 벌써 의사 선생님한테도 엄청 혼났어요. 바로 입원부터 하라고.

“어우, 저런. 어떡해요.”

잦은 두통에 시달리다 검진을 받았는데, 뜻밖에 뇌에서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악성은 아니었지만, 위치가 좋지 못해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지나치게 과도한 업무량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언제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하소연을 들어 준 기억도 있었다.

담당이 바뀌는 일이야 흔했다. 문제는 당장에 영진그룹과 관련해 큰 행사가 목전에 있다는 점이었다.

영진그룹은 매해 연말이면 호텔에 전 직원을 초대해 큰 행사를 치르곤 했다. 그룹 회장님의 특별 지시하에 만들어진 중요한 연례행사로 2박 3일간 약 300여 명의 사원들이 함께하는 아주 통 큰 자리다.

당연히 준비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300명분의 숙소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특별 세미나와 단체 체육 대회부터 중간중간 식사와 레크리에이션 등의 자잘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만찬을 곁들인 특별 초대 가수의 공연까지.

필요한 인력을 찾아내 조율하고 미리 계약해 두는 데만도 꼬박 몇 주는 걸리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도 중간에 손을 떼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수술을 미뤄 왔으나, 더는 힘들어진 모양이다.

― 미안해요. 내가 다 처리하고 나가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건강을 먼저 생각하셔야죠. 워낙에 준비를 철저히 잘해 놓으셔서 새로 오신 분께서도 금방 적응하실 거예요.”

― 그렇지 않아도, 그 후임 건으로도 할 말이 좀 있어서 따로 연락해 주십사 한 거예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 실은 급하게 일을 그만두다 보니 완벽하게 인수인계를 하지 못했거든요. 이쪽 업무야 나중에라도 주변 사람한테 배우면 된다 쳐도, 당장에 이번 행사 관련한 일에는 많이 서투를 거예요. 연회팀에도 따로 말씀은 드릴 테지만…… 김 지배인님께서도 각별히 신경 써 주셨으면 해서요. 제가 믿을 만한 분이 김 지배인님뿐이라서. 어려운 부탁 해서 미안해요.

“어우, 그거야 당연히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죠. 저희가 어떤 인연인데요. 그런 걱정 마시고 쾌차하세요. 빨리 건강해지셔야죠.”

흔쾌히 웃으며 하는 말에 서 과장은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어찌 보면 크게 문제가 생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후임을 언급하면서 살짝 머뭇거리는 느낌이었던 건 기분 탓인가?

“에휴. 나도 연말이라 예민한가 보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어느 누가 마음이 편하겠냐고. 괜한 생각을 지우며 휴대폰을 집어넣은 수진이 마저 남은 일거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퇴근 시간까지 집중해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야 수진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사무실 건물을 나서자마자 수진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메시지 창이었다.

[잘 잤어? 늦지 말고 출근 잘 해. 오늘은 많이 춥다. 옷 단단히 챙겨 입고. 난 지금 호텔이야.]

[점심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 시간 나면 전화할게.]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혹시나 하고 봤더니 역시나, 오늘 날짜로는 더 이상 도착한 메시지가 없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갑자기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참,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데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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