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40화

함께 집을 나선 건 그로부터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원래는 가까운 전철역에서 혼자 출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준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피스는 다들 사무 건물로 출근할 거고, 프런트는 이미 오전조 업무 시작한 시간이니, 주차 요원만 조심하면 된다는 말에 설득을 당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준성의 고집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된 갑질이 뭔지 보여 줄 기세였으니까.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차 안에서 수진은 거리의 표지판을 보며 현재 신사역 부근 어딘가를 지나고 있음을 짐작했다. 목적지인 청담까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다행이라 생각한 순간, 엉뚱한 골목으로 진입한 차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콩나물해장국집 앞에 멈춰 섰다.

“어? 여기는 왜?”

“어제 술 많이 마셨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준성이 문을 열고 나섰다. 얼결에 따라 내린 수진이 앞장서는 남자의 뒤로 따라붙었다. 원래 아침은 아주 간단히 시리얼로 때우거나 그도 아니면 거의 잘 챙겨 먹지 않는 편이었지만, 굳이 여기서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제 상태를 생각해 챙겨 주려는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와 본 적 있는 곳이야?”

평범한 외관에 비해 내부는 상당히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해장국집 특유의 찌든 느낌은 없어도 꽤나 맛집의 포스를 풍겼다. 준성이 이런 가게도 찾아다녔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맞은편 자리에 앉던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침에 검색해 봤지. 내 여자 속 좀 풀어 주려고.”

“어?”

“속은 어때? 새벽엔 좀 힘들어 보이는 거 같던데.”

“어어, 괜찮아. 이 정도로 막 탈 나고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네.”

방금 묘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미처 물을 새도 없이 화제가 흘러 버렸다. 툭하니 대꾸한 그가 언제 준비한 건지 숙취 음료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마셔 둬.”

“어, 어……. 고마워.”

대체 이건 또 언제 사 둔 걸까. 연이어 어, 라고밖에 대꾸를 못 한 것에 신경이 쓰인 것도 잠시. 심장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에 푸스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보인 채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잠시 멈칫하던 그가 이내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웃지 마.”

“왜? 이상해?”

“설레서 심장 터질 거 같으니까, 나도.”

순간 얼굴로 훅 하니 열이 오른다. 아니 진짜, 무슨 돌직구를 이렇게 막 던지고 갑자기. 게다가 그 말은 그녀 자신이 먼저 했던 말이었다. 남의 말을 허락도 없이 인용해 놓고 저리 뻔뻔하게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건 또 뭐람.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재빨리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음료를 깠다. 괜히 귀가 뜨거워서 슬그머니 귓가를 붙든 채로 황급히 음료를 원샷 해 버린 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 근데 이거 맛 이상해.”

그가 낮게 웃는 사이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작은 뚝배기 안에서 뜨끈하게 끓고 있는 콩나물국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은 수진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

씩 웃으며 감사를 표한 수진은 뜨끈한 국물에 냉큼 밥을 덜어 넣었다. 곁들여 나온 수란에도 야무지게 국물을 부어 넣어 준비를 마치고는 바로 식사에 집중했다. 이상하게 쑥스럽고 등골이 간질거려 혼났는데 때맞춰 나와 준 음식이 고마울 정도였다. 그나마도 두어 숟갈 입에 넣자마자 들려온 말에 도로 흠칫해 버렸지만.

“너무 어색해하지 마. 나름 사귀기 시작한 첫날인데.”

“흡!”

아이고야, 입천장을 홀랑 데어 버렸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남자를 바라보며 간신히 뜨거운 덩어리를 삼켜 냈다. 아니, 정말 이 남자가. 그 와중에 잘생긴 웃음을 마주하고 제 얼굴만 빨개지고 말았다.

“그렇게 불편해하지 말라고. 난 네가 내 앞에서 좀 더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어.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어색해하고 거리 두는 게 싫어서 그래.”

“어, 해장국 먹으면서 할 이야긴 아닌 거 같은데…….”

또다시 쑥스러움을 못 이긴 수진이 농담처럼 대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컵을 집어 드는 손끝이 조금 떨려 왔다.

“생각할 시간 못 줘서 미안해.”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에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던 어색한 웃음도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도 내 행동 난 후회 안 해. 앞으로도 후회 안 할 거고. 그러니까 너도 후회하지 마. 그럴 일 없도록 내가 더 잘할게.”

미안하다는 뉘앙스의 말치고는 내용이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상대방의 의견은 들을 것도 없다는 투. ‘거절은 거절한다’는 말도 이거보단 덜 단호박이겠다.

어쩌면 이런 남자가 다 있을까.

“뭐야, 정말……. 내가 뭘 할 수가 없잖아. 네가 이래 버리면.”

이렇게까지 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해. 무슨 남자가 정말 빠져나갈 틈이라곤 주질 않는다니까. 멸치잡이 어망도 이거보단 덜 촘촘하겠어.

중얼중얼 투덜대는 여자의 귓불도 어느덧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준성의 눈빛에는 은근한 열망이 깃들었다.

“아주 천천히 와도 되니까, 방향만 바뀌지 마.”

오로지 나만 보고 나를 향해 오면 돼.

내가 너만 바라보듯이. 너 역시 나만 바라보고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고. 그날이 언제가 되든 기다릴 거라고.

무려 10년이란 시간을 가슴에 품고만 살았다. 어떤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잊지 못할 첫사랑으로 영원히 제 가슴만 미어지게 했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때의 절망과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넌 내 눈앞에 있고, 이렇게 손을 뻗으면 만질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렇게 날 기다리게 한 만큼 너한테 바라는 게 늘어날지도 몰라.”

조심스럽게 뻗어 나간 손이 그녀의 입가를 문질렀다. 의아함을 품은 눈이 그를 향했다. 겁먹은 토끼처럼 불안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그 눈동자가 이른 아침부터 제 음심(淫心)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걸 이 여자는 죽어도 모를 테지.

“내가 뭘 더 바라게 될지, 한번 기대해 봐.”

딱 한 순간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뿐인데,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버렸다. 아깝고 아까운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그렇게 잊고 싶어도 잊지 못했던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으로 그 모든 대가를 치렀으니 이젠 상을 받고 싶다. 네게서.

“짜릿하게 해 줄게.”

바라는 건 오직 너뿐이니까.

* * *

“경기도 ㅇㅇ시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오게 되어 독립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으신 분으로 현재는 ㅇㅇ시 ㅇㅇ초등학교에서 교장직을 역임 중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슬하에 다른 형제는 없이 외동이고요.”

차분히 말을 마친 윤 이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은은한 국화차 향이 가득한 한 회장의 집무실은 그가 말을 멈춘 순간 고요에 휩싸였다. 조금 긴장한 시선이 투명한 찻잔을 집어 든 채 그 향을 음미하는 한 회장에게로 향했다.

워낙에 표정과 행동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긴 세월 묵묵히 그 곁을 지켜 온 윤 이사는 불편하고 못마땅한 한 회장의 심사를 눈치챈 지 오래다. 몰래 한숨을 삼킨 윤 이사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대학 생활에서도 상당히 두각을 보여 수석으로 입학해 졸업까지 수석으로 마쳤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호텔에 입사했을 때의 성적도 가장 높았고요. 3년 넘게 오퍼레이션 업무를 하다 현재는 객실판촉팀에서 기업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데, 근무 태도가 아주 성실하고, 용모도 단정해서 거래처나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도 평판은 꽤나 좋은 편입니다.”

이미 한 회장의 앞에 놓인 서류에도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제가 설명을 더하는 건, 더 정확히 사실을 확인시켜 드리고자 하는 목적 이외에도 차분히 뭔가를 되뇌기 시작한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송 상무와 함께 대학을 다닌 사이라고요?”

“네. 상무님께서 K대학 경영학과로 진학하신 그해에 함께 수학하며 알게 된 사이라고 합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도 꽤나 친밀하셨던 것 같고요. 또 같은 대학에 다녔던 차수혁 부사장과도 현재까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흠.”

찻잔을 내려놓은 한 회장은 입을 다문 채 눈앞의 서류로 시선을 던졌다. 조그만 증명사진 속에서도 꽤나 반반한 얼굴이다. 어딘지 좀 낯이 익은 느낌인 걸 보면 몇 번 마주치기도 했을 거다. 사진으로만 봐도 이렇게 고우니 실제로는 더 눈에 들어왔을 터.

그게 꼭 제 아들이라고 다르진 않았겠지.

빤히 사진 속 얼굴을 바라보던 한 회장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 들었을 때였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진지한 관계였다면 상무님께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이미 겉으로 드러내시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다시 인연이 닿은 것도 아주 최근인 것 같고요. 서로 옛정을 되뇌기에도 짧은 시간입니다. 신중하신 상무님이니 섣불리 관계를 이어 나가는 일도 없으셨을 거로 사료됩니다.”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별다른 정보가 없다면 그녀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준성에게서 심상치 않은 이야기들을 들은 이후였다. 다시금 찜찜한 생각이 떠올라 더욱 불쾌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저 자신이 고작 자식의 결혼 문제에 연연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여느 철없는 부모들처럼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저열한 짓을 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매우 불쾌한 상태였다.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얼마나 깊은 관계가 되었는지, 얼마나 지속될 것 같은지 따위의 저속한 이야기가 궁금한 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차갑게 떨어지는 말에 앞서 나간 충성심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깨달은 윤 이사가 정중히 사과했다. 두통이 일 때처럼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던 한 회장이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런 저속한 이야기라면 더 해결이 쉬웠을 텐데.”

나지막하게 곁들이는 말에 윤 이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한 회장의 입에서 더 이상의 설명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발칙한 계집애가 제 아들을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따윈 절대로.

‘어찌 보면 인재로군.’

대학 시절엔 친구로 접근을 한 것도 모자라, 굳이 이 호텔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착실하게 프런트 오피스를 돌며 일을 배우고 백 오피스로 전향하는 아주 전형적인 승진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건 지나친 억측일까.

지나치게 뛰어난 성적도. 그에 따르는 주변의 호의적인 평가도.

‘조금 시간을 주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제 아들을 애태우는 솜씨까지도.

절대 보통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야망으로 그렇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 야망을 이룰 만큼의 능력도 있어 보였다.

지금껏 그녀가 인재를 평가해 온 조건은 하나였다. 바로 얼마만큼의 그릇을 갖추고 있느냐. 그리고 그 그릇의 크기는 보통 야망과 비례하는 편이었다.

어떤 자리에 올려놓아도 그 역량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고난 배경이든 학벌이든 논외로 뒀다. 받아들일 그릇만 된다면, 나머진 그 자리가 인재를 완성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곁에서 살아남은 인재들은 그렇게 대부분 밑바닥에서부터 건져 올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작 제 아들의 배필이 될 사람이라 생각하니 생각지도 못한 조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준도 엄청 높아지고 있다. 저 자신도 몰랐던 제 적나라한 민낯을 이렇게 깨닫게 될 줄이야.

단순히 직원으로만 생각하면 꽤나 탐나는 인재긴 한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멈칫한 한 회장이 다시 냉정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서류가 밀려 나왔다.

“당분간 예의 주시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류를 집어 든 윤 이사가 그대로 물러났다. 다시 굳게 문이 닫힌 회장실에서 한 회장은 이후로도 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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