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39화

궁금했다. 그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지. 왜 그렇게 냉정한 얼굴로 제 곁을 떠나 버렸던 건지.

그런데 그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딘지 불만스러운 투로.

“너도 안 했잖아.”

“그, 그거야 난 그럴 처지가 아니었단 말이야. 솔직히 그때 너 좋아했던 사람이…… 한둘이었어야지.”

가장 큰 이유였던 연희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아 잠시 멈칫해 버렸다. 만약 그때 연희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이어졌을까.

‘나도 현성이 좋아했는데……. 너랑 현성이랑 사귀어 버리면 내가 끼어들 틈이 없잖아.’

왠지 이 순간 기억 저 멀리 밀어 둔 옛 친구 미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아니다. 털어 내듯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절대 미연이와 같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절대 연희를 미워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더 큰 고통이었겠지.

“수진아.”

조금 어두워진 얼굴을 본 걸까. 조용히 그녀를 부른 그가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가볍게 접힌 손가락이 그녀의 뺨과 입가를 매만졌다. 그게 조금 간지러워 목을 움츠린 순간 더욱 진지해진 그의 물음이 이어졌다.

“나 기다리고 있던 거 맞지?”

“…….”

“나 만나고 싶어서 우리 호텔에서 일하려고 마음먹은 거 맞지?”

‘난 네가 여기서 일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 진즉 알았으면…….’

‘……그런가? 그럼 원래부터 우리 호텔에 지망하려던 건 아니란 뜻이고?’

그녀의 입가에서 보조개가 수줍게 피어났다. 그날의 질문과 미묘했던 표정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한 순간이었다.

지금껏 아니라고 우겨 왔고, 나중엔 스스로도 정말 아니라 믿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의 입에서 그 질문을 들으니 처음의 감정이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취업 원서를 넣으며, 언젠가는 다시 그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던 그때의 설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도 꽃처럼 미소가 피어났다. 뿌듯함과 벅찬 감정에 들뜬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를 훌쩍 당겨 안았다.

“너무 좋다. 왠지 실감이 안 나. 너랑 이러고 있는 게 꿈 같아.”

“흣, 어, 아니, 잠깐만.”

단단히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품은 아주 넓었다. 이대로 푹 빠져들 수 있을 만큼.

다만 둘 다 상의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서둘러 그와의 사이에 손 하나를 끼워 넣긴 했지만 크게 효과는 없어 보였다.

뭉근하게 눌린 젖가슴의 감촉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질 거라 생각하니 도로 등골이 바짝 긴장했다. 기껏 가라앉은 제 숨소리도 빠르게 거칠어지고 있다.

“저기, 나 잠깐…….”

“쉿, 가만있어. 그냥 이렇게 안고 자자.”

“여, 여기서? 이대로?”

상식적으로 잠이 오겠니? 쭈뼛거리며 그의 품을 빠져나온 수진이 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건 좀……. 저기, 나 옷도 입어야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뻗은 그가 어딘가에 널려 있던 티셔츠를 집어 와 그녀의 머리부터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황당하다는 듯 눈만 깜빡이는 그녀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옷은 입었으니 괜찮지?”

아니, 너랑 침대에 같이 누워 있는 게 이상하다니까.

정확히는 아직 날 못 믿겠다고!

또 언제 홀라당 넘어가 버릴지 어떻게 알아.

속으로 탄식하는 사이,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훌쩍 당겨 안더니 벌렁 드러누웠다. 얼결에 그의 팔을 베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수진이 눈만 깜빡이는 동안 준성은 엷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걷혀 나간 머리카락이 귓바퀴에 감기며 그의 손길이 스친다.

“너랑 자고 싶다는 말, 꼭 그 뜻만은 아니었어.”

“…….”

“그러니까 안심하고 자. 도망가지 말고.”

졸린 듯 느른해진 미소를 떠올린 그가 이불을 덮어 주고는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하자고 했어도 어차피 못 했을 거야. 콘돔이 없었거든.”

“뭐? 누가 하자고……! 아니, 잠깐. 그럼 속옷은 어디서 난 거야? 편의점 다녀온 거 아니었어? 거기서 안 사고 그냥 나온 거…….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떠오른 의문을 마구마구 내뱉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놀리듯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가 은근하게 묻는다.

“왜, 섭섭해? 지금이라도 사 올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언제…….”

“하긴, 어차피 지금 사 와 봐야 분위기 다 깨져서 되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넘어가.”

“그게 아니라니까!”

“좀 아깝긴 하지? 홀려 있는 사이에 그냥 해 버릴 걸 그랬나.”

“홀리긴 누, 누가 홀렸다고 그래. 그 정돈 아니었거든?”

품 안에서 뻗대는 새끼 고양이처럼, 덧없고 사랑스럽기만 한 반항에 준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뻔해서는 여우 짓을 하려 드는데, 그 어설픔이 자꾸만 가슴에 불을 질러 버리니 큰일이었다. 정말 제대로 송준성 맞춤형 미끼가 따로 없었다. 아, 그래서 자꾸만 저 입술이 먹고 싶어지는 건가?

“알았으니까 그만 자자.”

종알종알 움직이는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움찔거리며 도망가려는 여자의 머리맡에 코를 박고서 한껏 숨을 들이켰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그러니까 기운 좀 줘.”

피곤한 건 바쁜 네 탓이지 내 탓이 아닌데.

그런데 그 불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새삼 깨닫게 된 현실이 좀 더 강하게 와닿은 탓이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그녀가 그를 끌어안으며 등을 살살 토닥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했던 그 사람이 지금 이 품 안에서 위안을 받고 있다. 언제나 그리웠던 그 사람이 그녀를 안고서 숨을 쉬고 기뻐한다.

모든 게 기억했던 그대로의 모습이고,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던 그 미소인데……. 성격은 전혀 달라진 내 첫사랑이.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녀석이었나 싶을 만큼 어이가 없다가도 이런 막무가내에 더 설레는 건 왜일까.

아니, 아니다.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어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알던 송준성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우정이란 이름으로 아껴 주었던 그때처럼, 그녀를 존중하고 지켜 주겠다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는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켜봐 온 그녀이기에.

그러니 이제 어떡해. 이젠 밀어낼 수도 없는걸.

“너 진짜 못됐어.”

더 도망칠 수도 없게, 그녀의 템포에 맞춰 함께하겠다는 이 남자를 어떻게 거절할까.

“그래도 나만 한 남자 없잖아.”

너무도 당당히 내뱉는 말에 허탈하게 웃어 버린 수진이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래. 아무렴 어떠랴.

그의 품이 너무나 포근해서. 따뜻해서.

왠지 나중 일은 아무래도 좋단 생각이 들었다.

* * *

언제 다시 잠이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제 어깨를 슬며시 건드리는 손길에 깨어난 수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짙게 먹물을 탄 듯한 푸른빛으로 가득한 방이 눈에 들어온다. 부스스한 몸을 일으킨 수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시 봐도 낯선 이 느낌은…….

“잘 잤어?”

“아!”

깜짝이야.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준성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나는 잘 잤지. 너는?”

“글쎄. 내가 잘 잤을까?”

짐짓 퉁명스러워진 말투에 살짝 당황할 뻔했다가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을 발견하고 보란 듯 눈을 흘겨 줬다. 이젠 제 앞에서만 묘하게 짓궂어지는 저 말투에도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더군다나 이렇게 상큼한 웃음은 더더욱 좋지 않다. 아침부터 또 누구 혼을 빼놓으려고 이러는 거야.

당연히 어젯밤 일을 잊어버리는 둥의 유치한 사건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되는 이 남자의 얼굴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듯한 설렘도. 갑작스럽게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감도. 하나같이 모두가 그녀에겐 너무도 낯설었을 뿐이다.

저도 모르게 배시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사리물던 그녀가 문득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살짝 꼬집어 봤다.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는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왠지 얄미워서.

다시 한번 느끼지만, 자고 일어났는데도 이 남자는 어찌 이렇게 멀끔한 건지 모르겠다.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거의 4시에 가까웠다. 이제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니 길어야 두 시간이나 잤을까. 타임 라인으로 따지면 최소 두 시간 넘게 물고 빨고 시시덕거리다 간신히 잠들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제 다리 사이에 닿았던 그 엄청난……. 아니, 크기는 둘째 치고 어쨌거나 그런 상태로 편히 잠을 잤을 리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남자는 그런 상태를 굉장히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선지 잠결에 어렴풋이 그가 방을 나서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래저래 어쨌거나 저보다 늦게 잔 건 확실한데, 정작 이 남자의 얼굴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다못해 눈 밑에 다크서클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살짝 충격이었다. 게다가 말끔한 피부의 감촉이며 도톰하게 혈색이 깃든 입술은 또 어떻고.

“아침부터 시동 거는 거야?”

“응?”

“지금 엄청 참고 있으니까 괜히 불붙이지 말라고.”

그르렁. 나지막하게 경고하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해서 손을 거둬 냈다. 아니, 이놈의 손가락이 언제 저 입술에 붙어 있었던 거야!

“어, 미,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밀도를 올린다. 팽팽히 당겨지는 듯한 긴장감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새 익숙해진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가 눈에 들어오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저 차림 그대로 제게 이런저런 짓을 했던 간밤의 기억이 바로 눈앞에서 재생되는 것 같아 잽싸게 머리를 털어 냈다.

게다가 저건…….

저도 모르는 새에 저만치 선 남자의 하체를 훑어보던 그녀가 황급히 시선을 거둬 냈다. 뭐지? 저 부피감은 대체. 어젯밤에도 뭔가 굉장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실루엣이 그려지고 있었다.

저게 정말 가능한 크기인가? 이게 말이 되나?

그보다 뭔가 엄청난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인가?

“……아깝다.”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린 수진이 제 입술을 툭 때렸다. 요놈의 입술이 지금 뭐라고 했니. 이런 변태 같은. 아니 변태냔 같으니라고.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좀 피곤하긴 했나 봐.”

저도 모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지긴 했나 보다. 잠시 의아한 듯 서 있던 준성의 얼굴에 뒤늦게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미안. 오늘만 고생하자. 다음엔 꼭 일찍 재워 줄게.”

“…….”

“씻고 있어. 옷 가져다줄게.”

싱긋 웃으며 돌아선 남자가 방을 나서자 수진은 작게 신음하며 침대 시트에 머리를 콩콩, 부딪쳤다. 기회를 놓친 제가 밉고, 다음이라는 말에 또 기대감을 부풀리는 제가 너무 변태 같아서 괴롭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니. 차라리 죽자,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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