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36화
꽤 긴 시간 동안 샤워를 했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복잡하게 얽힌 생각과 감정으로 타들어 가던 몸과 머리에 한참 동안 뜨거운 물을 붓고 나니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후……. 내 신세야.”
욕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세면대 근처에서 폼 클렌징을 찾아내 열심히 얼굴의 화장기를 지우는 일이었다. 이놈의 아이라인은 번질 때는 잘도 번지면서 지울 땐 또 왜 죽어라 안 지워지는 건지.
대체 그 정신에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고 이런 화장까지 한 거냐고. 후회만 골백번은 한 것 같았다. 혹시나 메이크업 전용 세안제가 있을까 주변을 더 뒤져 보긴 했지만 당연히 그런 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왔다면 더 충격이었겠지. 욕실 안의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하게 혼자 사는 남자의 정석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아 내심 흐뭇했던 건 비밀이다.
그 와중에 얌전히 홀로 꽂혀 있는 칫솔 한 개가 왜 그렇게 예뻐 보이던지.
제 변태력에 살짝 멘탈이 흔들릴 뻔했지만, 굳건히 마음을 다잡은 수진은 수납장을 뒤져 새 칫솔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하나만 빌리자.”
빌린다고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세안과 양치를 마친 후에야 샤워기 아래로 진입했고, 20분이 넘도록 뜨거운 물을 맞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씻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옷을 벗을 때부터 꼭 누군가 곁에서 저를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자꾸만 몸이 굳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준성의 집이라는 걸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이제 어떡하지?”
한참 만에야 간신히 욕실을 빠져나온 수진은 커다란 수건을 몸에 감은 채로 또다시 망설이고 있었다. 욕실과 파우더 룸 사이는 반투명한 유리 벽과 문으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라, 사실상 파우더 룸의 문을 잠가야 안전(?)한 문단속이 가능했다. 아마 옷을 가져다 놓았다면 문밖에 있을 터.
그런데 좀처럼 그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꽤 한참을 앞에서 서성이고 심호흡을 한 후에야 문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조금 열린 틈새 바로 앞에 곱게 개켜 놓은 옷가지가 보인다. 잡아채듯 집어 들고서 다시 후다닥 문을 닫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어 댔지만, 어쨌거나 한 차례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센스 있게 안이 비치지 않도록 짙은 먹색의 티셔츠와 검은색 트레이닝 반바지를 놓아 뒀다는 것에 감격한 것도 잠시.
“되게 크네.”
티셔츠를 집어 들자마자 튀어나온 말이었다. 워낙 키 차이가 있기에 대강 예상은 했는데 이건 커도 너무 크지 않나. 제가 입으니 티셔츠가 아니라 무슨 원피스를 입은 느낌이다. 바로 현실로 와닿는 체격 차에 괜히 어깨만 더 움츠러들었다.
“냄새도 좋고.”
그 와중에 옷을 걸치자마자 몸을 감싸 오는 향기에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슬며시 앞자락을 쥐어 얼굴에 대며 눈을 감았다. 그대로 크게 숨을 들이켜자 포근한 섬유 유연제의 향기 사이로 희미하게 그 남자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제멋대로 불쑥 다가올 때마다 훅 하니 저를 덮쳐 오던 그 향기가.
“하,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여기서 더 하면 진심으로 변태 모드지. 잽싸게 정신을 챙기며 다음으로 집어 든 건 조그맣게 포장이 된 여자 속옷이었다.
“그새 편의점까지 다녀온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참으로 고마운 일이긴 한데, 그가 골라 온 속옷을 입어야 하는 이 상황이 썩 내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제 속옷이 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어쩌겠니.
어쨌거나 입었던 속옷을 도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긴 입어야겠고. 주섬주섬 반바지까지 끼워 입고 난 수진이 다시 문을 연 건 10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달칵.
쭈뼛거리며 파우더 룸을 나섰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더욱 긴장한 수진이 품 안의 옷가지를 끌어안으며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자 탁 트인 거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의 풍경만큼이나 심플한 거실을 둘러보다 커다란 소파에 앉은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끝났어?”
“어, 어. 다 씻었어. 고마워.”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차마 똑바로 바라보진 못하고 흘깃거렸다. 티셔츠 안쪽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게 신경 쓰였다. 아주 얇은 소재도 아닌 데다 워낙에 사이즈가 커서 크게 티는 나지 않겠지만, 빤히 저를 보는 시선이 그걸 다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꼭 사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
그의 시선을 의식한 수진이 품에 안은 옷가지를 더 추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옷 좀 빨아야 할 거 같은데 혹시 세탁기 좀 빌릴 수 있을까?”
“이리 줘. 내가 할게.”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 위치만 가르쳐 줘.”
제발 부탁이니 이건 날 시켜 주지 않으련?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반쯤 빌다시피 하는 말에 잠시 그대로 서 있던 남자가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이동했다. 따라오라는 뜻임을 알아챈 수진이 조금 거리를 두고 걸음을 떼었다.
정말 휑하니 넓은 집이었다. 별다른 가구가 없어 더 넓어 보였다. 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져 더더욱 불안했다.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와, 집 되게 좋다. 여기서 호, 혼자 사는 거야?”
“어.”
“부럽네. 완전 운동장이야. 거실에선 축구해도 되겠다. 우리 집은 너무 좁아서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자꾸 여기저기 부딪치는데. 아, 그때 봤었지, 참. 하하……. 아무튼 나도 나중에 돈 많이 모아서 이런 집에.”
“줄까?”
“어?”
불쑥 튀어나오는 말에 멈칫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그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갖고 싶으면 너 줄게.”
얘가 미쳤나.
“그게 무슨……. 아니, 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장난도 참 요상하게 치고 있어, 정말.”
“장난 같으면 달라고 해 보든지.”
“…….”
이건 농담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싱긋 웃어 보인 그가 슬쩍 옆으로 돌아서더니 문을 열고는 안쪽을 가리켰다. 그제야 제 용건을 떠올린 수진이 후다닥 그의 앞을 지나쳤다.
“일단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빨래를 돌려 놓고 다시 처음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들려온 말이었다. 그냥 아주 담백하게 잠만 자고 가라는 뜻임에 분명한데 순간 몸 안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어색함을 못 이긴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어, 고마워. 그런데 저기, 여기가 손님용 방 같지는 않아서. 혹시 다른 방은 없어?”
언뜻 지나치며 가늠해 본 바로는 남자 혼자 살기엔 상당히 큰 평수의 주상 복합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다른 방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괜찮으니 그냥 편하게 써.”
“그건 아니지. 집주인 내쫓고 어떻게 그래. 나 다른 방에서 잘게. 침대 없어도 그냥 바닥에 이불 하나만 깔고도 잘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재워 줄 만한 공간이 없어. 아직 짐 정리도 다 안 되어 있는 상태라 죄다 어수선해서 그래. 남은 데라곤 소파뿐이야.”
“그,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잘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덥석 팔이 붙들리고 흠칫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바짝 움츠린 어깨를 뒤로 빼며 그를 바라봤다. 어찌나 놀랐는지 온몸으로 튀어 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놀란 저와는 달리 남자는 지독히도 차분한 얼굴이었다. 찌르는 듯한 시선에 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누구보다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이건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었다.
천천히 아래로 움직인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헐렁한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 언저리를 응시했다. 그 뜨거운 눈빛이 품은 의미 역시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제가 씻고 나온 후부터 이 남자는 쭉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안 된다고 했지?”
위협적으로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에 전율이 일었다. 또다시 움찔해 버린 수진이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저히 저 눈길을 똑바로 받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싶은데,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 그럼 어떡하라고. 이러면 내가 너무 염치없잖아. 난 이런 거 싫단 말이야. 집주인 내쫓고 어떻게.”
“소파에서 재워 주는 것도 싫다고 매정하게 내쫓을 땐 언제고.”
“그, 그거야 네가……!”
그땐 네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였잖아. 그런 위험한 눈을 하고 따라 들어온 남자를 어떻게 재워 주냐고. 항변하려는 순간,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고 끝맺지 못한 말은 입안에 머물렀다.
“넌 주인 침대를 차마 혼자는 못 쓰겠고, 난 너를 거실에 못 재우겠고.”
“…….”
“그럼 방법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한층 진해진 시선이 닿는다. 더욱 뚜렷해진 의도가 단숨에 덮쳐 오는 것만 같아 말문이 막혔다. 천천히 몸을 숙인 그가 눈높이를 맞췄다.
“어떡할래?”
유혹하듯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말이 더욱 은근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농밀해진 공기가 버겁다.
그의 의도대로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훤했다. 아직도 제 마음을 확정 짓지 못한 지금 상황에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좋아.”
그럼에도 어째선지 제 입은 머리로 생각한 것과 다른 말을 꺼냈다.
이건 취해서다. 아직 술이 덜 깨서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둘 다 침대에서 자면 되겠네, 그러면.”
이런 미친 소리가 가능하다니.
부러 강하게 내뱉은 수진이 똑바로 남자를 바라봤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며 꼿꼿이 섰다. 오기라면 오기였다. 어차피 닥쳐올 결말은 하나뿐이고, 더 도망칠 곳도 없는 상황에서 놀리듯 천천히 올가미를 죄여 오는 사냥꾼을 향한 소심한 반항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도발일지도 모르겠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남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 눈에 이채가 서린다. 깊은 호수처럼 잔잔하던 눈동자가 짙은 욕정으로 물들어 가는 순간이었다. 그의 입가로 설핏 매혹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너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 있다.”
“왜. 그래서 싫어? 정떨어질 거 같아? 그럼 말고. 나 혼자 쓰지 뭐.”
더욱 되바라지게 대꾸한 수진이 휙 하니 몸을 돌려 침대를 향해 갔을 때였다. 곧장 등 뒤로 따라붙은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돌려세웠다. 동시에 훅 끌려간 몸이 그의 몸에 바짝 밀착되었다.
“나, 돌려 말하는 거 못해.”
이마를 스치는 목소리에서 열감이 느껴진다. 단단한 남자의 팔. 코앞에서 그의 선명한 쇄골과 목울대가 어른거려 눈을 감아 버린 순간.
“너랑 자고 싶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벼락같이 꽂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