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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35화

“빨리 보고 싶은데.”

이 와중에 제 입술에 닿았던 감촉은 왜 떠오르는 건지.

더 정확히는 다시 그 입술을 맛보고 싶었다. 닿는 순간 등골을 찌릿하게 울리던 짜릿한 감각은 오직 그녀의 입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 그 어떤 무엇이 이보다 제게 자극적일 수 있을까.

푸딩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던 입술과 가늘게 토해 내던 숨결. 기습 키스에 놀란 듯 휘둥그렇게 뜨던 눈도, 제가 덮쳐 놓고서 점차 빨갛게 달아오르던 얼굴도 지나치게 예뻐서 곤란했다.

짧은 입맞춤만으로도 이 지경인데, 그보다 더한 짓을 하면 어쩌려고.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로 열기가 몰려들었다. 금세 고개를 들어 버린 것이 바지 앞섶을 묵직하게 채우는 게 느껴져 절로 한숨이 났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더 무섭다고, 겨우 두 번 닿아 봤던 그 감촉이 자꾸만 난잡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빨갛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마음껏 혀를 밀어 넣고 그 타액을 빨면 어떤 맛이 날까. 소담하게 부푼 젖가슴을 움켜쥐고 도드라진 유두를 입에 머금으면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할까.

뽀얗고 깨끗한 살갗을 어루만지며 굴곡이 드러난 허리선에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아래 도톰한 허벅지를 벌리면…….

“후우…….”

절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제 어디에 이런 음욕(淫慾)이 숨어 있었던 건지.

한창 혈기가 끓는다는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음란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제 곁에 현존하는 인물을 상대로 떠올리는 생각이라 배덕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드높은 도덕심을 자랑했던 송준성이 여기서 이렇게 무너지네.

묘한 갈증에 그새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며 허탈하게 웃어 버렸을 때였다. 휴대폰 화면이 검게 바뀌더니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차수혁.

밤 11시가 넘었으니 지금은 클럽이 한창 바쁠 타이밍이다. 이런 시간에 전화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다 준영과 연락을 해 보라던 한 회장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어, 무슨 일…….”

― 지금 수진이 룸에서 죽어 가니까 빨리 클럽으로 와라. 입구에 오면 직원이 안내해 줄 거야.

“……뭐?”

제 할 말만 냅다 뱉어 놓은 수혁이 그대로 전화를 뚝 끊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얼떨떨하면서도 딱 하나 머릿속에 콕 박히는 이름이 있었다.

“수진이가?”

나직하게 되뇌는 남자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 갔다.

* * *

언제 잠이 들어 버린 걸까.

설핏 눈을 떴는데,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를 곳에 누워 있는 상태.

여기가 어디인지.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건지. 지금의 상태를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멍한 머리로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끄응,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는데, 동시에 두통이 밀려들어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아, 슬슬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갈증으로 목구멍이 찢어질 거 같은 와중에 뒤집힐 것처럼 속이 역한 걸 보니.

“욱, 으…… 물이…….”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더듬더듬 주변으로 다른 손을 뻗었다. 몸을 움직인 보람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 장소가 클럽의 룸이었다는 게 번뜩 떠오른 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을 뻗는 곳마다 허허벌판이었다. 제가 누운 곳이 소파라면 당연히 바로 근처에 테이블에 있어야 하는데……. 의아하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제 손에 물기가 맺힌 컵이 닿았다.

“아, 고마워.”

“천만에.”

컵을 받아 들자마자 무심결에 말을 걸었는데, 불쑥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위험한 느낌으로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앉아 있던 소파도 이상하리만큼 탄성이 느껴졌다. 뭔가 소파 특유의 폭신한 쿠션감이 아닌, 탄탄하게 받쳐 주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예를 들자면, 침대의 매트리스 같은.

아니, 잠깐……. 침대?

술 먹고 정신을 잃은 다음에 침대라니. 섬뜩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는 바람에 기겁한 수진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제 옆을 바라봤다.

핏 좋은 운동복 바지부터 깔끔하게 골반 위로 떨어지는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남자임이 분명한 실루엣을 확인한 순간 다시 한번 온몸의 피가 촤르륵,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설마.

“수, 수혁이니?”

“그랬으면 좋겠어?”

다시 들려온 대꾸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준성의 얼굴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한껏 커졌다.

“헉!”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 체중이 실린 자리가 푹 꺼지는 바람에 크게 기우뚱한 몸이 그대로 침대 바깥을 향해 휘청했다.

“꺄, 엄맛!”

떨어질 뻔한 찰나,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그가 재빨리 그녀의 몸을 받치며 잡아 냈다. 동시에 컵까지 낚아챈 이 남자의 민첩함에 감탄할 새도 없었다.

“괜찮아?”

“어, 어. 괜찮아.”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이 이미 이 남자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쓸데없이 깔끔한 코튼 계열 향기를 풍기는 남자의 얇은 천 하나로만 가려진 가슴팍에다 얼굴을 처박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너.”

“미, 미안!”

황급히 몸을 추스르며 그의 품을 벗어났다. 가뜩이나 놀란 심장이 이번엔 다른 의미를 실은 채로 맹렬하게 뛰어 댔다. 아, 정말 이 남자 심장에 안 좋다!

그의 몸과 맞닿았던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했다. 몸 안이 꾹 죄여 들고, 아랫배 깊은 곳이 움찔거렸다. 순간 뭔가 훅 당기는 듯한 이 느낌이 굉장히 낯설었다. 이게 뜻밖의 성욕이었음을 모를 만큼 무지하진 않았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술기운이 남아 있다 해도 그렇지, 이 상황에 느닷없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그것도 저 남자를 상대로!

“일단 이것부터 마셔.”

다시 눈앞으로 다가온 물컵을 쭈뼛거리며 받아 들었다. 쩍쩍 마르다 못해 갈라질 것 같은 목구멍에 수분을 보충하니 이제야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수분이 부족해 뇌까지 피가 돌지 않고 있었나 보다.

“고마워.”

아까보다는 좀 더 침착해진 머리가 그제야 눈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정보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분명 마지막 기억엔 수혁과 함께 클럽의 룸에 있었는데, 잠깐 잠이 든 사이에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 버린 건지 모르겠다.

일단 커다란 침대가 있는 걸 보니 침실 같긴 한데, 삭막하게 느껴질 만큼 심플하기 그지없는 인테리어는 흡사 사무실을 방불케 해서 오묘한 느낌이었다. 별다른 가구 한 채 보이지 않아 뭔가 더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여, 여긴 어디야?”

“우리 집.”

“뭐? 집이라니! 설마……!”

“아, 정확히 말하자면 내 집이야.”

“허헉!”

그녀의 놀람 포인트를 제대로 짚으며 정정해 준 건 고마웠으나, 그의 집이라 해서 놀랍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알기로 그는 현재 독립을 한 상태. 고로 이 밤중에, 집에, 무려 침대 위에 이 남자와 단둘이란 뜻이었다.

“어, 그렇구나. 내가 실례를 좀 한 거…… 어맛!”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번엔 손을 짚어야 할 거리를 잘못 계산했다. 그대로 허공을 짚게 된 그녀의 몸이 크게 기우뚱하다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붙잡아 주려는 그에게 재빨리 손을 내저은 수진이 애써 덧붙였다.

“아니, 아니, 괜찮아. 나 이제 완전 멀쩡해. 술도 다 깼고. 그런데 지금 몇 시지?”

준성은 대답 대신에 침대 머리맡의 협탁을 가리켰다. 기다란 스탠드의 조명이 비치는 곳에 다소곳이 놓인 전자시계에 떠오른 숫자는 정확히 01:15.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할 욕설이 잇새에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11시가 되기 좀 전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거냐고!

“저기 혹시 내 휴대폰이랑 작은 가방 하나 있었을 텐데 못 봤……. 아, 여기 있네. 챙겨 준 거구나. 고마워.”

조심조심 침대를 내려와 옆에 놓여 있던 제 소지품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에 제 겉옷도 있을 것 같은데, 묘하게 긴장하며 몸이 굳어 버린 탓에 고개를 돌리는 것도 쉽지가 않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저를 향해 있을 그의 시선. 그 미묘한 열기를 못 느낄 만큼 둔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굶주린 뱀 앞에 던져 놓은 개구리 한 마리 모드였다.

“저, 도와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가 볼…….”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그, 그야 집에…….”

“지금 그 꼴로 밖에 나돌아 다닐 생각이야?”

“어? 그 꼴이라니?”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낮게 잠긴 목소리에선 묘하게 까칠한 느낌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눈을 뜬 시점부터 쭉 굳은 얼굴로 저조한 기분을 숨기지 않던 남자였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라고 생각하기엔 그 사달을 내고 도망친 게 바로 엊그제고, 그 일이 있고서 처음 얼굴을 본 날이다.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란 건 동네 유치원생도 알겠다.

뭔가 대답하는 대신 눈치껏 그의 시선이 향했던 방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드넓은 파우더 룸과 욕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불을 켜고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화장대의 커다란 거울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헉!”

어제저녁, 모처럼의 클럽 나들이라고 나름 차려입었던 원피스의 치마 부분이 토사물인지 음식의 잔해인지 모를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검은색 스타킹은 왼쪽 허벅지 중앙이 완전히 찢겨 맨살이 드러난 채로 길게 올이 나가 있는 상태.

산발한 채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렇다 치자. 거울 속, 떡지고 번져 버린 화장으로 번들거리는 피부의 여자가 저를 마주한 순간엔 말문이 턱 막혀 버리는 기분이었다. 누구냐고 묻고 싶은데 너무나도 제 얼굴이었다.

설마 내내 이 몰골을 저 남자에게 보이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지?

그래. 조명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주라!

“씻고 싶으면 씻고 나와. 앞에다 갈아입을 옷 준비해 놓을 테니까.”

경악으로 굳은 그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이, 문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진 수진은 고분고분 몸을 돌려 욕실로 향하며 결심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씨로 성을 갈아 버릴 거다.

개수진으로 개명해 버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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