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34화
“요즘 네 행적이 아주 화려하더구나.”
무심하기 그지없는 아들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약간 의아한 얼굴을 하던 준성이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 준 외모가 워낙에 눈에 띄다 보니 자꾸 그렇게 되네요.”
“넌 연예인이 아니야. 주목은 받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쓸데없는 가십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어야지.”
얼마 전 붉어진 뺨으로 남은 일정을 치러야 했던 날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적나라하게 남은 흔적은 본의 아니게 남은 오후 시간 동안 제 뺨을 물들이고 있었고, 덕분에 인트라넷은 평소의 세 배는 넘는 분량의 게시글로 북적거렸다.
그 와중에 정작 그런 사고를 쳐 놓은 여자는 지금껏 저를 달래러 오기는커녕 연락조차 없다. 괘씸하게도.
“여자에게…… 뺨을 맞았다?”
지나는 말투로 되묻듯 중얼거리던 한 회장이 슬쩍 코웃음을 친다. 며칠 동안 사내 게시판을 휩쓴 루머를 전해 주던 윤 이사는 정작 제 입으로 말을 꺼내면서도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소문이 나돌았던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뭔가 소스가 있으니 그런 소문도 도는 거겠지.”
묵묵히 듣고만 있는 아들을 흘깃 보며 툭하니 내뱉은 말이었다. 다분히 떠보는 말투가 된 건 실은 남편 송 교수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는 탓이다.
‘참, 준성이한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긴 모양입니다.’
본가에 들렀던 준성이 저녁을 먹고도 꽤 오랫동안 머무르다 돌아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다음이었다. 웬일로 송 교수가 서재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절 기다리고 있나 했더니만 이런 소식이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만나고 싶. 은 사람이라고요?’
그 누구도 아닌 준성이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다 해도 놀라울 판국인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람이라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층격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여자들을 만나 온 위의 형들과는 달리, 준성은 단 한 번도 그런 일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내내 그가 집까지 데려왔던 사람이라곤 수혁이 전부였다. 오죽하면 제 아들이 게이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잠깐이나마 그런 상상을 한 것조차 우스울 정도였지.
사실 지금 이런 말을 꺼내면서도 선뜻 믿기진 않았다. 바닥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는 저 눈이 상대를 향한 애정으로 순수하게 빛나던 때가 있긴 했던가. 그녀의 기억으론 유치원 시절부터 쭉 한결같았던 아이다. 이런 점이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했었는데…….
“우리 호텔 사람이니?”
“네.”
예상했던 대로 준성은 선선히 그 사실을 시인했다. 이것이 그녀가 굳이 제 아들의 뒷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였다.
어떤 일이 생겨도 굳이 숨기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철저히 그 자신이 책임을 지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신중하면서도 신념이 강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이렇게 떳떳하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냥 생각해도 보통 감정은 아닐 터.
어느덧 도착한 다이닝 룸의 식탁 앞에서 준성의 도움을 받으며 자리에 앉고 난 한 회장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지금이면 한창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지. 다 큰 남자가 연애 한두 번 하는 거야 흠도 아니니까. 그래도 어쨌거나 회사 사람이라고 하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가급적 구설수엔 오르지 않게 조심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말하듯 지극히 차분한 어조였다. 언뜻 듣기엔 별문제 없이 해 줄 법한 조언이지만, 결국은 이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전제를 깔고서 내놓는 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아닙니다.”
역시나 준성은 바로 그 점을 짚어 냈다. 덤덤한 말투임에도 단호함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준성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한 회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네가 선택한 여자인데 어련하겠니. 언제 데려와 인사라도 한번 시켜 주든지.”
“그게,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말에 한 회장이 처음으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힘들다니?”
“조금 시간을 주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
나름대로는 초연한 태도로 불편한 감정 따윈 드러내지 않고 대화를 잘 이어 갔다고 생각했던 한 회장도 이 순간만큼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금 커진 눈으로 아들의 수려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헛, 하고 짧게 웃음까지 흘렸다.
“그 말은 지금 그 아가씨가 너랑 사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니?”
“네.”
“헛, 참. 그런 대단한 아가씨가 있었구나. 혹시 미국 대통령이 몰래 한국에 숨겨 뒀던 딸이라도 된다니?”
기막힌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말투에 준성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저리 불편해하시는 투인데, 제 얼굴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던 용감한 여자라고 덧붙였다간 난리가 나실 테지.
“저도 어디서 이런 친구가 나타난 건지 신기하긴 해요. 아주 재밌고 좋은 사람이에요. 준비되는 대로 곧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러든지.”
툭 내뱉는 말투는 다시 평소의 한 회장이었다. 때마침 윤 이사가 나타나 낮은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식사가 도착했다는 말에 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트롤리를 끌고 들어선 버틀러와 담당 지배인들이 서빙을 시작했다. 슬슬 자리를 벗어날 타이밍이었다.
“그럼 식사하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요즘 송 대표 주변이 좀 어수선하던데. 언제 시간 나는 대로 연락해 봐요.”
둘째인 준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둘만의 공간에 타인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냉철한 기업가 한 회장이 되었다. 더욱 바르게 자세를 갖춘 준성이 깍듯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얼굴 좀 보려던 참입니다. 의논할 일도 있고요.”
“그래. 형제끼리 자주 교류하다 보면 서로 보고 느끼는 게 있겠지. 그리고 송 상무도 가급적이면 골치 아픈 일을 자초하진 말아 줬으면 해요.”
“네, 알겠습니다.”
“이젠 다들 본인 인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나이라는 걸 명심하고. 그럼 가서 쉬어요.”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대로 자리를 물러 나온 준성은 묵묵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방금까지 나눈 대화를 되짚어 봤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어머니다운 반응이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분.
그녀는 누구에게도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거나 약점이 될 만한 소리를 내놓지 않았다. 강한 의지로 생각한 바를 꼭 이루어 내고야 마는 분이셨다. 거대한 그룹을 이끄는 원동력은 바로 그런 한 회장의 철두철미함과 높은 프라이드에서 비롯했다. 그런 한 회장에게 제 연애란 지극히 사소한 것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가정도 이것이 ‘연애’로 끝났을 때까지만이다. 방금 전의 대화에서 한 회장은 골치 아픈 일을 자초하지 말라는 권고로 넌지시 그 부분을 경고했다. 어떤 누구를 만나든 딱 연애까지만. 그 조건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본인이 나서서 움직일 일은 없을 거라는 일종의 협상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 번쯤은 부딪쳐야겠지.”
당연히 그녀와 연애로 끝낼 마음은 없으니까.
그녀를 다시 만나고부터 어렴풋이 떠올리기 시작한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와 제대로 연이 얽히게 된다면, 이제 그녀의 인생을 쥐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정확히 딱 집어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발상보다, 조금은 막연하게.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곁에 평생 머무르고 싶었다. 그 소망을 가능한 현실로 대입하면 결국 목표는 결혼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의 입가로 설핏 웃음기가 스쳤다. 남자란 동물은 옷깃만 스쳐도 아들딸 셋 낳아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더니. 시작도 하지 않은 연애를 두고 결혼부터 생각하는 제 꼴이 딱 그 모양새다.
“쉽진 않겠지?”
그녀가 한 회장의 마음에 찰지 부족할지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겐 김수진보다 나은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그의 고민은 좀 더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것이었다.
“문제는 네 쪽이라서.”
‘우리 엄마는 안 그래.’라는 말은 차마 양심상 입에 올리진 못하겠고.
최악의 시어머니감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아들인 제겐 좀 속상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어려워하는 한 회장이니 당연하다고는 생각했다. 거대 그룹의 수장이라는 위치만 생각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깐깐하고 철두철미한 성품까지 더해 놨으니 제가 생각해도 절대 쉬운 자리는 아니다.
그리고 수진은 지난 몇 년간, 제가 몸담은 회사의 오너로서 한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을 거다. 그녀 안에서 한 회장이 어떤 이미지로 새겨져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나마 한 가지 믿을 만한 구석이라면, 그녀가 강자에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일까.
저보다 강한 상대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순간에도 영혼은 다른 곳에 던져 놓았을지언정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이건 제 앞에서 냅다 도망쳐 버리는 것과는 궤가 다른 일이다.―
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라는 판단이 끝나면, 우직하게 제 행동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게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건, 남이 떠맡겨 놓은 짐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건 간에. 그런 성격이 한 회장의 앞에선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 아직은 선뜻 장담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 여자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 만큼, 간절하게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그녀의 마음이 저만큼은 아닌 것 같아 조금 한숨이 났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놓고도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오늘 하루만 해도 이렇게 휴대폰 화면만 멍하니 쳐다본 기억이 열 번은 족히 넘지 않을까 싶다.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게 괘씸해서라도 당장 사무실에 쳐들어가 생포해 오고 싶은데, 시간을 달라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려 꼼짝을 못 하겠다.
그렇게나 새빨개진 얼굴로, 저 때문에 심장이 터질 거 같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진짜로 터뜨려 버릴 순 없으니 관대한 내가 참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