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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33화

“그러니까 결론은 서로 좋아하는 걸 알았단 소리잖아. 그럼 이제 사귀면 될 일 아닌가?”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아니, 나도 그럴까 했어. 근데…….”

“근데?”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문 그녀의 얼굴이 아주 침울해졌다.

“……좋았다가 식으면 어떡해.”

이미 각오를 한다고 하는데도, 아무리 술을 마시며 지워 보려 애를 써도, 마음 한편에 딱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깟 백조 되는 거…… 그래. 다른 일 구하면 돼. 뭘 해도 먹고는 살겠지. 그딴 걸 걱정하는 게 아냐. 난…… 좌절할 내 마음을 걱정하는 거지.”

이번엔 정말 너무 아플 거 같아서.

끝까지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받을 거 같아서.

“그래서 자꾸 고민하게 된다? 걔랑 같이하면서 잠깐이나마 행복할지. 아니면…… 그런 거 없이 그냥 내 현생 찾아가며 안전하게 살아갈지.”

술잔을 쥔 채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 가던 수진이 나른하게 웃었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원래는 당연히 후자 쪽이거든, 내가. 그래야 정상인데 계속 고민을 해. 막…… 그냥 아까워 미치겠는 거야. 그래서 막 여지도 주고, 생각도 해 본다고 막…… 그러고 있더라?”

말을 하면서 점점 취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폭탄주로도 금세 돌아왔던 정신인데, 이번엔 꽤 오래갈 것 같다. 역시 양주 한 병은 무리였어. 비싼 값을 하는구만.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 그냥 나도 모르게 저울질하게 돼……. 난 겁쟁이니까.”

무엇보다 그를 상대로 이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게 좀 환멸스러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겁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준성이는 좋은데 그 배경이 너무 부담스럽다, 이거잖아.”

수진은 묵묵히 남은 술잔을 비웠다. 이미 외모부터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평범한 조건이었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자주 그랬다. 왜 하필 그렇게나 잘나서. 왜 하필 그렇게 멋져서, 제 시선까지 잡아끈 건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그걸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 그 사람이 가진 배경도 어차피 그 사람의 일부야. 아마 네가 좋아하던 송준성의 장점 몇 퍼센트는 분명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을 거고. 그걸 왜 부정하려는 건데.”

냉정하게 이어진 말에 수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네가 속물이라는 뜻이 아니야. 그 배경을 몰랐을 때도 넌 이미 준성이를 좋아하고 있었잖아. 사람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왜 고민을 하냐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뼈아팠다.

“……그럼 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어쩌긴. 눈앞에 떡하니 상까지 차려 줬는데 먹어 줘야지.”

“머, 먹긴 뭘 먹어! 미쳤나 봐 얘가.”

“뭐래. 뭘 그렇게 정색해? 그냥 비유잖아. 너 가만 보면 안 그런 척하면서 이상한 생각 잘하더라?”

“헐, 이건 네가 말을 오해하게 한 거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고!”

“뭐 어쨌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만, 너 까놓고 생각해 봐. 지금 그렇게 각 재고 고민할 때 아니야. 기회가 왔는데 왜 망설이냐고. 그 나이 먹도록 모태 솔로인 거 너 자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지금 누굴 뭐로 보고……. 나 모쏠 아니거든?”

“됐고. 네 첫 남자가 무려 송준성이 될 거란 말이지. 그쯤 되면 뭐가 어찌 되든 결국 남는 장사 아니냐 이 말이다.”

이게 진짜 여사친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나처럼 보수적인 유교걸 앞에서 뭔 소리라니.

저 뉘앙스를 알아듣는 거 자체가 이미 틀렸다는 증거지만, 그딴 건 뇌리 저편에 밀어 둔 그녀의 입술이 떡 벌어졌다. 이걸 대체 뭐라고 수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한참 동안 수혁을 노려보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던 수진이 이내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 모쏠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리.

“몰라. 그리고 어차피 다 틀렸어, 이제.”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린 그녀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 봤자 현실은 무려 상무님의 뺨을 때린 여자일 뿐. 현실을 되뇌니 모든 게 다 부질없었다.

“난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쪽팔리는 일도 정도껏이어야지.”

더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만 윙윙댈 뿐이었다.

“나도 되게 멋진 사람이고 싶은데, 자꾸 걔 앞에선 실수만 해. 진짜 그러기 싫은데…….”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전 비상계단에 있던 때로. 아니, 그에게 문자 실수를 하기 전으로. 아니, 기왕 돌린다면 아주 오래전, 그를 처음 봤던 때로.

하지만 알고 있다. 어차피 그렇게 시간을 돌려도 제 성격은 변할 리 없으니 또 같은 역사가 반복될 뿐이라는 걸.

그래서 좀 슬퍼졌다. 이런 자신이 못나게만 느껴져서.

그럼에도 이런 자신이 너무 가엾어서 나까지 욕하고 외면할 수가 없다.

그냥 지금은 힐링이 필요했다. 고통받아도 좋아. 상처받아도 좋아. 이런 날 보며 경멸해도 좋을 거 같아, 지금은. 그냥.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웅얼거린 말은 그녀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결국 잠이 들어 버린 수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수혁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넌 남자를 모른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이토록 무방비하게 잠이나 자 버릴 수 있는 거겠지.

“준성이 눈엔 이미 네가 뭘 해도 귀엽기만 할걸.”

그러니까 내 속이 이렇게 쓰라린 거지.

이게 바로 콩깍지의 위력이라는 거다. 진짜 무서운 거라고.

결국 또 너를 위해 이런 짓까지 하게 되는 걸 보면.

“자, 그럼 오랜만에 보스 몹이나 소환해 볼까.”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수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익숙한 번호를 불러내다 문득 쓴 입맛을 다셨다.

“하소연 들어 주기도 지긋지긋해서. 이젠 니들끼리 알아서 좀 해결해라.”

* * *

외부 일정을 모두 끝마친 시각이 오후 10시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걸음은 다시 호텔로 향했다. 주차를 마치고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도착한 곳은 본관의 34층. 문이 열리자 늦은 시각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보인다.

“상무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를 안내한 지배인에 이어, 커다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어디론가 무전으로 연락을 취했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30년 가까이 한 회장의 곁을 지켜 온 윤 이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상무님.”

“오랜만에 뵙네요, 윤 이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무탈했지요. 상무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윤 이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공간은 드넓은 거실이었다. 독일의 유명 디자이너가 제안했다는 감각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와 그림처럼 도심지의 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통창이 인상 깊다. 이곳은 주로 한 회장이 휴식을 취할 때 쓰는 스위트룸으로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늘 비워 두는 곳이었다.

“왔니?”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쌓인 서류를 들춰 보고 있던 여자가 콧등에 걸친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얼굴엔 피곤이 가득하지만, 자세는 꼿꼿하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가 기억하는 한 한 회장은 단 한 번도 타인의 앞에 흐트러진 모습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네.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이제 들려고 준비시킨 참이구나. 너는?”

“모임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이에요. 거기서 식사도 때웠고요.”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식사를 잘 하고 있다는데도 기어이 잔소리 하나를 더 얹어 주신다. 이것이 한 회장 나름의 모정임을 알기에 준성은 나직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왜 집에 들어가시지 않고요.”

“일이 좀 많았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그래야 할 거 같구나.”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을 물려준 건 확실히 한 회장 쪽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전할 내용이 있지 않는 한 한 회장은 길게 말을 끌지 않는 편이었다. 피곤할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특징이었다. 보통 때라면 적당히 대화를 이어 가다 어느 쪽이든 먼저 자리를 뜨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한 회장이 저를 호출한 건 단순히 서로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 같았다. 역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한 회장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다.

“왜 그러세요?”

“네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한참인데. 아직까지 밥 한번을 같이 먹질 못했다는 게 갑자기 생각나는구나.”

“어쩔 수 있나요. 이렇게나 바쁘셨는데.”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차분한 말끝에 그녀 자신만 감지할 수 있을 만큼의 한숨이 스며들었다. 이젠 체념이라는 말 정도로는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조차 없다.

“그 한 번이 뭐가 힘들다고 이렇게까지 어긋나는 건지.”

기껏 시간을 내서 불러낸 날엔 준성이 오지 않았고, 모처럼 집에서 함께 저녁을 하기로 한 날에는 제가 움직이지 못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좀 덜 번잡해야 시간이라도 맞춰 볼 텐데, 애초에 두 모자는 바빠도 너무 바쁜 게 문제였다.

“어쨌든 건강하게 잘 지내면 된 거지. 아쉽지만 식사는 다음에 하는 거로 하고.”

언제 그렇게 감상적이었나 싶게 냉정히 내뱉은 한 회장이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그 곁으로 다가가 부축하는 준성을 흘깃 바라본 한 회장의 눈매가 미세하게 휘어졌다.

올곧은 인성에서 묻어나는 배려가 제 아들임에도 참 바람직하게 잘 컸구나 싶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제 기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아들이기도 했다.

두말하면 입 아픈 잘난 얼굴만 봐도 마음이 흡족한데, 거기다 남달리 뛰어난 두뇌와 월등한 신체적 조건까지 타고났다. 진즉부터 그룹의 후계 1순위 후보로 꼽히며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고 자란 엘리트였다. 타고난 재능이 그토록 넘치는 것도 모자라 성실함마저 갖췄으니 정재계를 통틀어 이만한 신랑감이 없을 터. 아마 제게 딸이 있었대도 분명 이런 사윗감을 찾으려 애를 썼을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완벽한 탓인지, 미묘하게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미인 저조차 가끔은 이 다정한 태도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 몸에 밴 매너일 뿐인지 헷갈리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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