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32화
“그래서 오늘, 굳이 이 바쁜 날에 클럽 구석방까지 기어 들어와서 우거지 죽상을 하고 있는 이유는?”
찬물이 가득 담긴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수혁이 팔짱을 꼈다. 룸 바깥은 화끈했던 주말의 여운을 마저 태워 버릴 것 같은 열기로 가득한데, 저만치 구석진 자리에 잔뜩 웅크린 채 구겨져 앉은 여자의 주변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다. 기막히게 대비되는 이 광경에서 겁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땅굴 파 놓은 깊이를 보니까 보통 일은 아닌 거 같고.”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자였다. 보기엔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치이고 살 것 같은데도, 의외로 심지가 굳고 단단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그런 타입. 감정은 터질 것 같아도 겉모습만큼은 완벽하게 태연을 가장하고 사는 저 여자가 이 지경이 된다면 원인은 하나뿐이지.
“이번에도 준성이야?”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도 여자는 눈에 띄도록 흠칫하더니 이내 한층 우울한 기운을 뿜어 대며 느릿하게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어지간히 큰 사고를 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결국 못 참고 덮쳐 버렸어?”
“아니거든!”
아니긴 개뿔.
제대로 정답이었다. 더욱 좌절한 수진이 이내 절규하듯 제 얼굴을 붙잡고서 몸부림쳤다. 또다시 제가 저지른 만행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자 딱 죽고 싶어졌다.
지난 며칠을 무슨 정신으로 흘려보낸 건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는 비상계단을 뛰쳐나온 후부터 세상 모든 일이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몽롱했다. 이런 상태로도 일 처리는 완벽했다는 게 기적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은 채로 주말을 맞이하고, 일요일인 오늘 아침엔 준성에게 미친 듯이 사과하는 꿈을 꾸다가 눈을 떴다.
다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심장만 졸아붙는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몸을 일으키곤 물끄러미 제 손을 내려다보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세상에. 이 미친 손이 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거니.
아무리 실수였다 해도 그렇지. 무슨 당근과 채찍 전략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연애하자는 둥, 몸으로 꼬신다는 둥, 너 때문에 미치겠다는 둥, 온갖 닭살스러운 소리를 하며 핑크빛 기류를 뿜어 대다 느닷없이 뺨이라니!
그 조용한 공간을 울리던 섬뜩한 소리. 이어 황당함으로 가득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런 짓을 해 놓고도 감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냐고 자신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수진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 과장과 유리를 발견했다. 한 손에 커피 잔 하나씩을 든 채로 다 같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것이 막간의 티타임에 뭔가 이슈가 생긴 모양새였다.
‘헐, 저거 뺨 맞은 거 같다는데요? 세상에. 이게 정말일까요?’
그대로 들어서려던 걸음이 절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주어를 몰라도 알 것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있냐. 감기 기운이라도 있으셨겠지. 양쪽이 다 벌겋잖아.’
‘그렇긴 하죠? 사실 뭐 상상도 안 가잖아요. 감히 누가 우리 별님 얼굴에 손을 대요? 말도 안 돼.’
‘농담이 아니라고. 진짜 맞은 거라 생각해 봐. 누가 되든 피바람이 몰아칠 것 같은데 끔찍하지 않냐?’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유리의 옆에서 나 과장이 심각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뭔 놈의 소문이 이렇게 빠르냐고 한탄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표정 변화 하나까지 낱낱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며 온갖 궁예질이 판치던 때였다. 하물며 그 용안(龍顔)에 그렇게 티가 나는 흔적이라니. 온 천지에 널린 별님바라기들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가 없었을 터.
‘그나저나 상무님이 찾았다는 분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그야 모르지. 난 의외로 가까운 데에 있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저는 혹시 김 주임님이 아닌가, 싶었거든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 말투에서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너무도 악의가 없어서, 해맑게 생각하는 바를 다 말해 버린다는 게 유리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동안 상무님이 우리 팀에 자주 나타나셨던 것도 그렇고요. 진짜 친구 사이셨던 것도 맞았잖아요. 거기다 또 주임님은 상무님 나타날 때마다 너무 곤란해하시고.’
‘원래 강한 부정은 긍정이랬거든. 수상하긴 했지.’
‘그렇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전 진짜 김 주임님이 주인공이면 응원하려고요. 두 분 왠지 잘 어울리시지 않아요? 외모 합이 너무 좋잖아요. 완전 드라마같이 대리 만족 하기도 딱이고.’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딱 잘라 내는 나 과장의 말투에 조금 들뜨려던 유리가 축 가라앉았다.
‘그렇긴 하죠. 아무튼 요즘 김 주임님이요. 상무님 이야기 나올 때마다 너무 피하려 하시는 게 눈에 보여서 좀 안타깝더라고요. 따지고 보면 상무님이기 전에 옛 친구인데, 속으로는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근데 쓸데없는 소리 들을까 봐 친한 척도 못 하고.’
‘어제 상무님도 그러셨잖아.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황인 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거기서 친했던 사람을 만나니까 되게 반갑고 든든했다고. 그래서 자꾸 찾아오게 된다고. 솔직히 수진이라고 같은 마음 안 들었겠어?’
‘외로워서 더 찾아오셨던 거겠죠? 생각하니 제 맘이 다 짠해요.’
‘근데 애초에 친구 이전에 회사 상사인데 부담스러운 건 당연하지. 이래저래 김 주임만 맘고생 많았겠다, 싶네. 자, 커피 다 마셨지?’
대화가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자 수진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대로 화장실을 향해 도망치듯 걸었다.
제가 먼저 사라진 직원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갔을 줄은 몰랐다. 저를 가장 곤란하게 만든 사람인 주제에, 정작 제가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불안해하는 건 또 마음이 쓰여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건가.
고양이 쥐 생각하고 있네, 싶다가도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훅 다가오는 그의 진심이 애틋했다. 지금껏 그답지 않았던 언행조차, 실은 그의 서툰 간절함을 드러냈던 게 아닌가 싶어 기분이 복잡해졌다.
저 하나 보고 싶다고 무작정 찾아왔던 남자인데. 그러면서도 혹시 문제가 될까 뒷수습까지 했던 남자인데.
“그런데 난 거기서 대체…….”
가벼운 입맞춤 한 번에 그렇게나 놀라워하며 기뻐하던 남자를…… 나는…….
“……차라리 덮치기만 했으면 내가……. 크흡.”
죽도록 자괴감에 시달리다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무작정 수혁을 찾아왔다. 차라리 취해 버리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죽도록 독한 술이 간절했다.
그렇게 친구 찬스를 이용해 룸에 퍼질러 앉아 주절거리며 홀짝홀짝 마셔 낸 양주는 두 시간 만에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취기가 오른 그녀의 감정도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뭔 짓을 한 건지 감도 안 잡힌다만. 적당히 마셔. 대체 누굴 믿고 겁도 없이 여기서 퍼지는 건데?”
“누구긴 누구야. 내 십년지기 소중한 친구 차수혁이지. 이렇게 멍충한 나도 친구랍시고 거둬 준, 심술궂고 못됐지만 은근 마음만은 따뜻한 남자 차수혁이…….”
“……차라리 욕을 해라, 욕을.”
한껏 뭉개진 발음으로 낄낄거리는 여자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수혁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놀려 먹으려 해도 당최 뭔 사정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나마 제대로 맛이 가 버린 여자가 횡설수설 내뱉는 말들을 퍼즐처럼 짜 맞춰 몇 가지 알아낸 건 있었다. 엉뚱한 실수를 저질러 고백을 해 버렸고, 득달같이 달려온 준성에게 한동안 지독히도 시달렸다는 게 그녀가 한 시간 40여 분 동안 주절거린 말의 요지였다.
참으로 버라이어티하게 접근했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선해 보이는 인상에, 차분하고 예의 바른 태도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은 준성을 아주 얌전하고 신사적인 남자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주 대단한 착각이다.
제가 아는 준성은 그 어떤 누구보다 무서운 사냥꾼이었다. 사람이니 사냥꾼이지, 동물로 치자면 살육의 본능으로 점철된 맹수다. 먹이 사슬 최상위 포식자.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지만, 그에겐 특유의 오만함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파고들거나, 도전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라이벌이 생기면 선의의 경쟁을 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보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짓밟아 놓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게 성적이든, 운동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물론, 이건 그와 적이 되어 보거나, 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절대 모르는 것이었다. 저야 이런 친분을 이용해 종종 그의 신경을 건드리며 노는 걸 즐기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경계를 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을 넘는 순간 제게도 가차 없이 이를 드러내고도 남을 놈이다.
이런 놈이 세상 누구보다 젠틀하고 다정한 남자 취급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했게요.
그런데 이렇게 결국 본색을 드러내 버릴 줄이야.
‘제대로 물렸구만.’
다른 건 몰라도 수진에게만큼은 극진했던 놈이 맞다. 그녀의 무관심에 좌절하고 떠난 후에도 제 질척이는 마음이 그녀를 불편하게 할까 봐 아예 연을 끊었던 독한 놈.
그런 놈이 이렇게 눈이 뒤집혔다면, 그녀 특유의 철벽이 제대로 흑화(黑化) 스위치를 눌러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당장 팝콘 기계라도 들여놔야 될 판이다.
그나마 수진이 겪은 준성의 본성은 나름 귀엽기라도 하지. 진짜 모습을 봤다면 진즉에 도망치고도 남았다. 제가 보고 겪은 게 ‘불닭볶음 맛’ 버전이라면, 이건 ‘아주 순한 맛’ 버전쯤 될까.
어쨌거나 그리 요란하게 대시를 했으면 뭔가 결과가 있어야 하는 건데……. 지금 이 여자는 왜 또 이러고 있는 건지.
거기서부터 스토리가 이어지질 않으니 꼭 일 덜 보고 화장실을 나와 버린 것처럼 찜찜하고 불편해 죽겠다. 이야기가 끊어진 시점을 짚어 낸 수혁이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