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31화
대놓고 드러낸 섹슈얼한 뉘앙스에 대답 대신 눈을 치뜨며 노려보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진지하고. 어딘지 좀 날카로운. 먹잇감을 가늠하는 맹수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넌 진짜 몰라. 내가 그때 널 그렇게 떠나 버리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난 그, 그렇게 너무 눈에 띄는 타입은 좀 별로라서. 내 취향은 좀 무난하거든.’
‘수혁이가 어때서? 잘생겼지, 성격……은 좀 못됐지만 그래도 은근 다정한 구석도 있어. 그리고 사실 준성이가 친구긴 하지만 편하게 대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서. 뭐랄까, 왠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그해 늦여름.
벼락처럼 내리꽂힌 말은 생각 이상으로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떤 호감의 뉘앙스도 느낄 수 없었던 저 자신에 대한 평가. 발밑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름 몇 개월을 친구로 지내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 왔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매일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고,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를 찾았다. 머리를 맞댄 채 같은 컵라면을 먹고, 같은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것도 예사였다. 친구라기엔 지나치게 가깝고, 연인이라기엔 살짝 거리가 있는 관계.
아슬아슬하게 그 사이를 넘나드는 짜릿함을 즐겼다. 자연스럽게 친구에서 연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제 생각일 뿐이었다.
그녀는 제게 전혀 그런 감정이 없다고 했다. 취향이 아니라고. 심지어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이던 수혁을 지목하면서까지 저에 대한 감정을 부정했다. 그저 친구이자, 이쪽에서 손을 놓는 순간 끊어져 버릴 그런 인연임을 못 박아 버렸다.
‘괜찮아. 취향인데 뭐.’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만, 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잘려 나간 감정의 단면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난 아니냐고. 정말로 나와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거냐고.
붙잡고 따져 보고 싶었지만, 끝내 묻지 못하고 떠나 버린 건 정말 그렇다는 말을 들을까 무서워서였다.
그녀의 입으로 확인 사살을 당해 버리고 나면, 어떤 꿈조차 꿀 수 없게 될까 봐.
“지금도 엄청 긴장되고 무서워. 또 네가 밀어낼까 봐. 죽어도 안 된다고 할까 봐. 하지만 아니잖아.”
꿈이 없던 제게 그녀는 처음으로 생긴 꿈이자, 처음 겪어 본 절망이었다.
그리고 한때 꿈을 잃었던 그는 다시 그녀를 만나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너도 같은 마음 맞잖아. 아무 말 못 한 거 계속 후회하고 있었잖아.”
“…….”
“나 기다린 거 맞잖아.”
또다시 정확하게 꽂힌 직구에 수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말로 얻어맞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라고 잡아떼고 싶었지만 너무도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서 차마 거짓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간절히 직구밖에 던지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다시는 그렇게 바보 같은 짓 안 할 거야.”
“…….”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붙잡고 싶어. 마음 같아선 널 잡을 수만 있다면 네 앞에서 벗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니, 몸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정말로.”
“……자꾸 그쪽으로 어필하는데, 자신 있어?”
기막힌 소리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꼬투리를 잡아내자 그가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제 얼굴만 달아올라 시선을 피해 버렸다.
“궁금하면 직접 시험해 봐.”
덤덤한 말투에서 도리어 자신감이 묻어나는 이유는 뭔지.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 줄 테니까. 너도 손해는 아닐걸?”
무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농담처럼 한다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그가 밉지 않으니 큰일이다. 저도 모르게 그를 흘겨보던 수진이 슬며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췄다. 곤란한 척 하얀 이로 아랫입술을 물고서 생각했다.
제가 몸담은 회사의 임원인 것도 모자라 오너 일가의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며 신데렐라를 꿈꿀 만한 나이는 진즉에 지나 버렸다. 그녀에게 그는 주변의 시선부터, 서로의 집안, 지금의 위치까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장애물만 즐비한 존재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한순간 뜨거운 감정에 매달려 인생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순수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고작 2년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끈끈했던 감정이 걷힌 자리에는 뭐가 남아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감정이 아니어도, 제게 그를 잡아 둘 만한 다른 장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나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현실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그의 열렬한 눈빛이 점차 흐려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각오가 필요했다. 그와 함께하는 행복을 택하기 이전에 제 마음부터 다잡아야 했다. 깨끗하게 물러날 각오를 다지고서 시작해야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추스를 수 있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났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시작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남자는 정답이 아니라던 어느 가십지의 구절도 떠올랐다.
분명 쉽지 않은 길인데.
마음고생을 하다 못 해 숯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갈 제 미래가 눈에 선한데.
“생각할 시간을 좀 줘.”
결국 질러 버렸다.
그녀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이고 과감한 말이었다. 엄청난 양보이자 큰마음 먹고 뗀 일 보 전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와 함께해 보고 싶었다. 부질없는 시간 낭비라 해도 이 남자에게라면 한 번쯤 던져 보고도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다. 이 남자와의 연애는 끝이 정해진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걸 가슴 깊이 새겨 둘 시간이.
“내가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이미 이렇게 말을 꺼낸 것으로 마음은 정해져 버렸다. 망설이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큰마음 먹고 내놓은 그녀의 결심을 읽어 내지 못한 건지, 대번에 굳은 얼굴로 묻는다.
“내 10년을 허비하게 한 것도 모자라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기다린다고 우리가 잘될 거란 보장도 없잖아. 그런 확답도 없이 기다리라고만 하는 건 고문 아니야?”
“잠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난 지금 당장 너 안고 싶어 미치겠다고. 하루 종일 네 입술만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지? 지금 눈앞에 있는 널 보면서 손끝 하나 못 대고 있는 게 얼마나 사람 피 말리는 건지 알기나…….”
“그게 아니라니까! 아, 정말!”
맹렬하게 불만을 토해 내는 남자를 바라보던 수진이 울컥하여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세게 당기는 힘을 따라 놀란 눈을 한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조금 벌어진 그의 입술에 그대로 제 입술을 가져다 꾹 눌러 버렸다. 슬쩍 고개를 튼 채로 가볍게 그의 입술을 맞무는 버드 키스였다.
기억하던 것보다 좀 더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지그시 눌렸다. 말랑하고 부드럽지만, 탄력이 느껴지는 감촉은 세상 그 어떤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그 감촉을 만끽하듯 입술을 움직여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슬쩍 떼었다. 그리고 다시 쪽, 소리가 나게끔 그의 입술에 도장을 콕 찍고서.
“……!”
천천히 물러나며 꼭 붙들었던 그의 옷깃을 놓았다.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가 입술을 벙긋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내내 멋대로 사람을 몰아붙이며 곤란하게 굴 땐 언제고, 기습 키스 한 번에 이렇게 고장이 나 버리는 남자다. 저 못지않게 놀랐을 그를 생각하니 조금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봐. 너도 당해 보니 알겠지? 내 기분.”
물론 그녀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수습이 불가능했다. 이 망할 새가슴으로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낸 건지. 뛰어 대는 심장이 이러다 가슴팍을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떨려 나오는 숨을 몇 번에 걸쳐 짧게 내뱉은 수진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나도 너 때문에 미치겠다고.”
“…….”
“네 앞에선 숨도 못 쉬겠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얼굴도 똑바로 못 보겠어. 이런 상태로 너랑 뭘 하라는 건데. 이러다 내 심장 터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내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무언가를 실감한 얼굴. 천천히 움직인 그의 손이 그의 입가로 옮겨 가는 과정을 지켜보려니 자꾸만 온몸이 움츠러들고 가슴속에서는 스파클링이 터져 나간다. 그 간지러운 느낌을 더 견디지 못한 수진이 재빨리 남은 말을 쏟아 냈다.
“암튼 지금 내가 이런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지 좀 말라고. 사람 설레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무슨 남자가 이렇게 성질도 급하고 막무가내야, 진짜. 하, 내가 정말 어쩌다가…….”
꿋꿋하게 제 할 말을 다 하고 나니 또다시 얼굴로 열기가 치솟는다. 뒤늦게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되뇌려니 이대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다.
“그럼 난 이만 일하러…….”
후다닥 그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고개를 치켜든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감싸더니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기겁한 수진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았다기엔 너무도 또렷하게 짝, 소리가 나도록 양 뺨을 후려쳐 버렸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로 굳어 버린 그녀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양손에 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빤히 그녀를 바라본다. 황당함 가득한 시선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묻는 것만 같다.
“아…… 그, 그러니까, 이건…….”
한참 만에야 밀어 낸 목소리가 도로 뚝 끊어진다. 네 얼굴에 모기가 앉아 있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명백한 거절로도 모자라 감히 상무님의 뺨까지 치고 말았다. 삐걱거리며 경직된 뇌는 여기서 더 생각하기를 멈췄다.
이대로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럴 리 없는 그녀 대신에 준성이 친히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제야 머리로 피가 도는지 뒤늦게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뭔가 이 자리에 이대로 머물러선 안 될 것 같다는 촉이 아주 강하게 밀려온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뭐다? 스피드!
“미…… 미안해!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니야!”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후다닥 뛰쳐나가려던 그녀의 몸이 남자의 몸에 툭, 부딪치고 튕겨 나가더니 도로 벽에 콩, 부딪쳤다.
“캭! 엄맛!”
미처 붙잡아 줄 새도 없었다. 분명 아팠을 텐데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그녀가 우당탕탕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이어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 미치겠네, 진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남자의 입에서 잠시 후,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