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30화

“어머, 내 정신 좀 봐. 점심 전에 전달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연락 늦어서 담당분이 화났나 봐요. 그,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때마침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절묘하게 떠오른 핑계였다. 후다닥 식판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식당을 벗어나 복도를 뛰듯이 걸으며 화면을 켜자마자 도착해 있는 메시지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눈빛이 이상한데.]

[또 이상한 뜻으로 알아들었나.]

[말 그대로였는데 내 뜻은.]

“너 미쳤지?”

탄식하듯 내뱉은 그녀가 비척거리며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흘러내리듯 쭈그려 앉자마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건 진짜 악몽이야. 꿈일 거야.

그래. 그럴 리 없지. 저 인간이 누군데. 냉철함과 신중함의 화신 같았던 송준성이 아닌가. 꿈이 아니고서야 식사 중에, 그것도 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낼 리가……!

[밥이라도 다 먹고 가지. 그 귀한 얼굴 좀 보러 어렵게 온 건데.]

“……허허.”

이런 와중에도 심장이 뛰어 헛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그 못지않게 저도 미쳐 버린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후끈해지는 목덜미도. 헤실헤실 새어 나오는 웃음도 좀처럼 제어가 되질 않는다. 머리로는 안 된다, 하면서도 마음은 어쩌지 못하고 들뜨고 있는 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고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쩔쩔매는 아이가 된 기분이 이럴까.

‘나 정말 어떡하니.’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왜 자꾸만 제 머릿속을 휘저어 대는 거냐고. 속절없이 출렁이는 감정을 담고만 있기에도 버거워 죽겠는데.

잠시 그대로 눈을 감고 있던 수진이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걸음을 뗀 그녀가 향한 곳은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임원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비상계단에 들어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초조하게 잠복해 있길 20여 분.

복도를 걷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언뜻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살그머니 다가가 재킷의 소맷자락을 잡아챘다. 흠칫하며 돌아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간 당황한 듯 뭔가 말을 걸려는 남자에게 쉿, 표시를 해 보이곤 냅다 비상계단으로 끌고 들어왔다. 위층 계단 중간의 넓은 공간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다소 난폭하게 벽으로 밀쳐 세우자마자 아래층의 문이 열리더니 ‘상무님?’ 하고 그를 찾는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수진이 벌어지려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몸으로 눌렀다. 순식간에 훅 가까워진 얼굴이 다시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상하네. 그새 어딜 가신 거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에 이어 끼이익, 하고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비교적 상식적인 김 비서의 머리론 비상계단 어딘가에 상무님이 감금되어 있는 일 따윈 꿈에도 생각 못 할 거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쉰 수진이 준성을 노려봤다.

“잠깐 나 좀 보자고요, 상무님.”

최대한 분노를 가라앉히며 속삭인 말에 잠시 그대로 저를 바라보던 눈매가 슬쩍 휘어진다.

웃어? 남은 이래저래 미치겠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순간의 빡침도 잠시.

“헉!”

슬그머니 허리에 닿는 감촉에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낸 수진이 기겁하며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아, 미친!

너무 멘탈이 나가 있던 나머지 온몸으로 그의 몸을 덮치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제 손바닥이 정확히 그의 입술을 덮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 했다.

“잠깐……!”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준성의 행동이 빨랐다. 커다란 남자의 몸이 휙, 움직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자리가 뒤바뀌고 어느새 그녀가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흐억!”

제대로 남자와 벽 사이에 갇혀 버린 그녀가 기함하며 눈을 크게 뜨자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뭐야. 퇴근까지 못 기다리겠어? 왜 이렇게 적극적인데.”

“무, 무슨, 아니 그게 잠깐만……. 쉿! 잠깐, 쉿! 밖에 아직 사람이……!”

불쑥 다가오는 남자를 제지하랴, 조용히 시키랴,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무슨 향수를 쓰는 건지, 정확하게 제 취향을 저격하는 남자의 시원 상큼한 향이 훅 덮쳐 와 눈앞이 아찔했다. 이러다간 이 남자의 정신머리를 돌려놓기 전에 제가 먼저 정신을 놓을 지경이다.

“제발 조용히 좀!”

허겁지겁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다시 틀어막고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그사이 밖을 서성이던 걸음이 멀어지고 주변은 고요에 휩싸였다.

그제야 긴 숨을 내쉬며 손을 내린 수진이 눈을 부릅떴다. 빙글거리며 웃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 없어 간신히 주먹만을 움켜쥐고는 그의 가슴팍을 홱 밀쳐 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뭐가?”

“몰라서 물어요? 느닷없이 남 밥 먹는 자리엔 왜 끼어드는 거냐고요. 누구 피 말라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요? 아니, 남의 인생을 아주 그냥 말아드실 작정이신 거예요?”

말을 하다 보니 그라데이션으로 분노가 치미는 걸까. 점점 얼굴이 새빨개진다 싶더니 숫제 발까지 동동 굴러 댔다. 자그마한 체구로 방방 뛰는 모습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해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이런 반응이 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제 앞에서 웃고 떠들고 화를 내고. 이렇게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고작 그 며칠을 못 본 것뿐인데, 그녀가 그리워서 죽는 줄 알았다.

“올 거면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람 심장 철렁하게 만들질 않나, 밥도 못 먹게 이상한 소리나 하면서 사람 난처하게 만들질 않나. 어떻게 사람이 진짜, 아무리 그래도 밥은 편히……!”

“보고 싶어서 왔어.”

“먹……. 어?”

“보고 싶었다고, 너.”

“…….”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직구도 이런 돌직구가 없다. 제대로 된 직구에 당황한 수진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벽에 기대서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꾸 상무님이 이렇게 나오니까 사람들이 뭔가 있는 줄 알고 의심하는데.”

“의심하면 어때.”

“와, 진짜! 지금 나 죽는 꼴 보려고 이래?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렇게 장난칠 일이 아니라니까!”

“장난하는 거 아니야.”

딱 잘라 내뱉는 말에 그녀의 입술도 딱 달라붙었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에선 그의 말대로 장난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도 너 장난으로 대한 적 없어.”

또다시 직구를 던져 가슴팍을 두드려 놓고.

“난 이미 내 감정 말했어. 너랑 연인이 되고 싶다고도 말했고. 내가 그런 말을 장난으로 할 사람이야?”

그대로 한 걸음 훅 들어서 버린다. 말 그대로 직진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섭게 다가오는 남자를 수진은 두려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한결 다정해진 목소리가 섭섭함을 이야기했다. 달래듯 타이르는 말투에 가슴팍 전체로 기묘한 떨림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로지 제 앞에서만 내놓던 눈빛과 표정. 이 모든 게 그 말 한마디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내가 믿고 있는 너만은 날 오해하지 말라고.

말문이 막혀 버린 수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 낭패다. 이렇게 나와 버리는데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하라고.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선뜻 마음을 결정하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그게, 난…….”

“당장 어떻게 하자는 거 아니야. 그냥 오늘은 정말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이렇게라도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한 걸음 더 파고드는 진심에 수진은 절로 곱아드려는 손을 맞잡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널 압박하고 싶었던 건 맞아. 솔직히 너도 아쉽잖아. 우리가 한 번도 못 가 본 길이니까.”

지금까진 몰랐는데, 처음부터 이 남자는 이토록 깊은 감정을 담고서 저를 바라봤었나 보다. 분명 익숙한 말투, 익숙한 눈빛인데도 지금은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고 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 버리고 나니 도저히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다.

“해 보자, 연애.”

그런 눈을 하고 바라보면 어쩌라는 거야.

진짜 반칙이잖아, 이러는 거.

“한번 시도나 해 보고.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결정하자.”

“…….”

“정 아니다 싶으면 다시 원위치로 되돌려 놓을게. 진짜로 친구가 되어도 좋고.”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잖아.”

물끄러미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수진이 작게 덧붙였다.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이 남자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그거야 모르지. 의외로 한번 사귀고 나면 환상이 깨져서 정리가 더 쉬울지도.”

“뭐야, 그게.”

역시나 한다는 소리에 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소리나 내뱉고서 피식거리는 얼굴이 얄밉기까지 해 슬쩍 눈을 흘겼을 때였다.

“근데 난 그게 안 될 거 같아.”

“…….”

“그래서 좀 겁나, 사실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긴 시간을 잊고 지워 보려 했어도 끝끝내 남아 있던 감정이었다. 눈앞에 없으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 철석같이 믿었다. 무엇보다 이런 감정을 강요하며 상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기에 과감히 떠나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럼에도 질기게 남은 불씨는 그녀를 다시 보자마자 그 긴 세월의 노력이 무색하도록 세찬 불길로 번져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널 포기해.

태어나 처음으로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운명을 지배하는 뭔가가 나를 네 앞으로 인도해 준 것 같았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진짜 평생을 죽도록 후회하며 살 것 같은데.

“나한테 너, 절대 가볍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어렵고, 무서운 존재라고. 지금 내가 어떤 각오로 이런 말을 꺼내는 건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어떤 오해도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진솔한 말투였다. 거짓조차 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제가 아는 한 그는 늘 그녀의 앞에서 진실했다. 그것을 알기에 또다시 속절없이 흔들린다.

“더는 바라지도 않을게. 올해만. 딱 그때까지만 아무 생각 없이 감정에 솔직해 보자. 그동안 한번 제대로 사귀어 봐. 그러고도 아니다 싶으면, 내가…… 깔끔하게 물러날게.”

어째선지 이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만 삼키자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어 갔다.

“근데 그게 아니면. 그때 가서도 굳이 나랑 헤어질 마음이 없다는 결론이면, 그땐 정말 각오하고.”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그는 조금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 맞아. 그러니까 못 들은 척 넘어갈 생각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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