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9화

“어머, 어머. 저기 좀 봐요. 상무님 오셨어!”

“헐, 웬일이래? 오늘은 식사하러 오셨나 보네. 지금 줄 서 계시는 거 맞지?”

“뭐? 상무님이 여기서 식사를 하신다고?”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온 건 이제 막 우동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 지난번과는 달리 김 비서만 대동한 채 배식구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아니야. 침착해.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식사를 하러 온 것뿐일 테다.

그래. 우리 같은 일반 직원들과 달리 수많은 모임과 회담 일정을 소화하느라 종일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가끔은 직원 식당 밥을 먹는 날도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오늘처럼 ‘우연히’ 시간이 겹치는 날도 있지 않겠어?

그렇게 그녀는 필사적으로 정신 승리를 하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두 남자를 애써 외면했다. 그의 걸음이 이 근처에서 멈추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아, 여기들 계셨네요. 자리가 마땅치 않아 그런데 같이 앉아도 될까요?”

물론, 무신론자인 그녀의 기도를 받아 주는 신 따윈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김수진 씨.”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차마 무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쓸데없이 빛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너무 눈이 부시는데, 차라리 그냥 눈이 멀어 버렸으면 좋겠다.

“아, 네. 상무님. 어서 오세요.”

이럴 때 필요한 건 숙련자의 영업용 스마일이지.

영혼이라곤 1g도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묵례를 한 수진이 그대로 눈을 돌리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엉거주춤 앉을 준비를 하던 김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초조함과 곤란함으로 얼룩진 얼굴을 마주하니 심히 착잡하다. 분명 저 사람의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어우! 물론 당연히 되지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기.”

테이블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나 과장이 잽싸게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객실판촉팀원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팀장으로서, 그녀들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임에는 맞다.

문제는 그 자리가 바로 수진의 옆자리라는 점이다.

준성의 입가로 짐짓 난처하다는 듯 너털웃음이 떠올랐다.

“아, 고맙습니다. 괜히 식사하시는 자리에 끼어들어 불편하게 해 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만 좀 옆으로 옮겨 앉으면 다 같이 상무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게 되는데 이런 눈치도 없으면 영업직 못 하죠.”

“그럼요, 그럼요. 상무님이랑 점심 식사를 같이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어떡해요, 저 오늘 일기 써야 할 거 같아요!”

극도로 흥분한 그녀들의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대답을 하는 건지 비명을 지르는 건지. 언뜻 들어서는 구별이 힘들 정도였지만, 용케 알아들은 건지 준성의 입가로 그린 듯 반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직한 대꾸와 함께 준성이 자리에 앉았다. 또다시 어디선가 숨죽인 비명이 들려왔다. 수진은 그 소리가 제 목구멍에서 난 게 아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지난 주말엔 다들 집에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네, 물론이죠. 상무님 덕분에 저희들 모두 기분 좋게 놀고 스트레스도 싹 풀렸어요.”

“다행이네요. 일일이 다 챙겨 드리지 못해서 걱정 많이 했었는데.”

“어휴,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건 일상이라 괜찮습니다.”

“그럼요. 당연한 일로도 이렇게 걱정해 주시고. 저는 그냥 완전 너무 감동이에요오!”

아무리 사회생활 만렙 인간들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 아부성 발언들이 아니신가. 이대로 가다간 ‘상무님 찬가’라도 지어 부를 기세다. 이어지는 주접들 속에서 내내 분위기를 주도하던 나 과장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왜, 우리 김 주임만 데려다준 거 때문에 다들 재밌어하던 참이었어요. 알고 보니 김 주임이랑 상무님이 같은 대학 다니셨다고.”

저도 모르게 휙 하니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나 과장이 음흉하게 웃는다. 아, 이분이 진짜!

“아아, 네. 같은 학과에다 성격이 잘 맞다 보니 거의 매일 같이 다녔죠.”

“어머, 어머. 그럼 진짜로 두 분이 친구 사이였어요?”

“김수진 씨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던가요?”

거기다 이분은 또 왜 이렇게 흐뭇한 반응인 건데?

저도 모르게 옆자리의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가 심장이 철렁했다. 저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라니. 뭔가……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이 와중에 이놈의 심장은 왜 또 방정맞게 콩닥거리는 거고.

‘미치겠네!’

저에게 쏟아진 시선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준 수진이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 지금 제 눈앞으로 젓가락이 움직이는 건지 면발이 공중 부양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저기요, 혹시 찾으신다던 그분은 만나셨어요? 그 왜, 첫사랑이라는!”

그 와중에 들려온 말이라니!

해맑게 질문을 꺼낸 유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본 찰나.

“네. 이미 만났습니다.”

컥!

면발이 제대로 목에 걸리는 바람에 수진은 황급히 물컵을 집어 들었다. 꺅꺅거리는 소리에 괴상한 기침 소리가 그대로 묻혀서 다행이었다.

“만나셨다고요? 진짜요?”

“헐, 대박! 그래서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다시 만나기로 하신 거예요?”

“어머, 그분도 좋아하셨어요? 기다리셨대요? 웬일이야, 진짜!”

그야말로 그녀들의 머릿속엔 한 편의 로맨스 미니 시리즈가 펼쳐지고 있었다. 절규하다 못해 끙끙 앓을 기세로 내뱉어 대는 질문들 속에서 싱긋 웃어 보인 그가 짐짓 풀 죽은 척 목소리를 낮췄다.

“별로 크게 반갑진 않은 모양이에요. 자꾸 절 피하려고 하더라고요.”

“헉! 미친……! 아니, 말도 안 돼!”

“진짜요? 진짜로 현실에 그런 미친, 아니 그런 간땡이 부은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 감히 상무님을 피해요?”

장르는 순식간에 주말 드라마로 바뀌었다. 막장 전개에 제대로 분기탱천한 여자들의 입에서 두 번이나 튀어나온 ‘미친’이란 단어가 등골을 푹푹 찔러 왔다. 더 웅크릴 수도 없을 만큼 몸을 웅크린 수진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머금었다.

네. 그 미친 여자가 바로 납니다, 여러분. 허허.

“그럼, 그분이랑은 그대로 끝나 버린 거예요? 기대하셨을 텐데 속상해서 어떡해요.”

뛰어난 공감 능력의 소유자인 민영이 촉촉해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 공감 능력 나에게도 좀 발휘해 주면 안 되겠니?

“괜찮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려니 생각하고 있어요. 얼굴이라도 자주 보자고 이야기는 해 뒀는데, 모르죠.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 정도는 해 줘야죠! 얼굴 좀 보여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러게요! 와, 진짜 뭐 하는 분인지 얼굴 좀 보고 싶네요! 진심으로!”

유리와 민영은 젊은 만큼 혈기도 왕성했다. 그녀들의 반응을 보니 그 여자가 누구든 머리카락의 안녕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납량 특집이 따로 없다. 지극히 호러블한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자 점점 더 얼굴이 그릇 위로 처박혔다.

“맛있습니까?”

나직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대답이 들려야 할 타이밍인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정신을 놓은 채로 음식을 밀어 넣던 수진이 문득 멈칫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의 시선이 정확히 제 얼굴을 향해 있다.

그제야 그 질문의 대상이 저였음을 깨달은 수진이 소스라치며 옆자리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김수진 씨가 튀김 우동을 좋아하긴 했었죠. 제 얼굴도 안 보고 식사에만 집중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얘 지금 뭐라는 거니!

기함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지그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던 준성이 싱긋 웃어 보인다. 어딘지 그 웃음이 삐딱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손을 움직인 그가 제 그릇에 있는 새우튀김을 집더니 그녀의 그릇 위에 다소곳이 올렸다.

“……!”

동시에 사람들의 입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뒤섞인 탄성이 튀어나왔다. 저절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선 더 이상 신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천천히 먹어요.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아니, 잡으러 온 거 맞잖아.

지금 내 제삿날 잡으러 온 거 맞지?

“괘…… 괜찮습니다, 상무님.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이젠 옛날처럼 편한 사이도 아니고 다른 분들도 계신 자리인데 굳이…….”

“아, 미안해요. 수진 씨랑 같이 있으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좋은 추억이라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앞으론 그냥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최대한 침착하고 정중하게 말을 마친 수진이 서둘러 그릇으로 눈을 돌렸다. 맘 같아서는 식사고 뭐고 당장 튀어 나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반도 못 비운 그릇을 든 채로 일어나려니 너무 대놓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아니, 도망치고 싶은 건 맞는데 여러모로 후환이 두렵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날 방법은 이 그릇을 비우는 것뿐.

다행히 제게로 쏠린 관심도 잠깐이었다. 다시 준성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수진은 열심히 우동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나 쫄깃하던 면발이 마른 당면을 씹는 것처럼 버석거렸다.

결국 목이 메어 물컵을 집어 들려는데 반짝, 하며 테이블에 놓아 둔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급한 연락이라도 들어온 건가, 생각하며 무심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안고 싶다.]

저도 모르게 케이스 뚜껑을 탁 소리가 나게 덮고서는 잽싸게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뭔데, 이거!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식도로 넘어오는 줄 알았다. 기침하는 척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던 수진이 조마조마한 눈을 돌려 옆자리를 바라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손에도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깜빡.

이어 불빛이 들어온 순간, 그녀의 심장도 깜빡 멈춰 섰다. 뭐가 나올지 모를 판도라의 상자를 들여다보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키며 굳어 있는 사이, 또 깜빡. 깜빡. 연이어 불빛이 깜빡댄다.

이쯤 되면 일부러 들키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다. 이거 맞다.

분명 대낮처럼 밝은 직원 식당인데 이 조그만 휴대폰 화면이 깜빡이는 건 왜 이리 눈에 콕콕 박히는 건지. 게다가 뭘 하느냐 묻는 듯이 저를 흘깃거리는 나 과장의 시선을 대하려니 다시금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