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28화
폭탄을 맞은 직후인 주말 동안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려 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뭔가 집어 먹은 흔적은 있어 다행히 밥은 굶지 않았구나, 했을 뿐.
물론 이후로도 정신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종일 외근이 기다리고 있던 월요일엔 길을 다니다 슈트 차림의 남자 실루엣만 봐도 심장이 펄떡거렸더랬다. 덕분에 거래처 담당자와의 미팅 때도 지레 깜짝깜짝 놀라며 저답지 않은 자잘한 실수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다행히 평소의 그녀를 잘 아는 담당자가 가볍게 웃어넘겨 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실례가 되었을지도 모를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내가 일에 집중이 되겠냐고!
‘더 긴장하고 있으라고. 선전 포고니까.’
으윽!
또다시 떠오르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말 안 해도 언제 어디서 그가 튀어나올지 몰라 가뜩이나 긴장돼 죽겠는데 대놓고 더 긴장하고 있으라니. 진짜로 날 골로 보내 버릴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이럴 순 없는 거다!
“설마 진짜로 오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져 저도 모르게 사무실 입구를 흘깃거렸을 때였다.
“슬슬 말 좀 해. 어떻게 된 건지.”
“엄맛!”
귓가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언제 온 건지 제 귓가에 바짝 얼굴을 대고 있던 나 과장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설마 그 오싹함의 진원지가 여기였던 건가?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 자기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네? 뭐, 뭐가요?”
“다들 보고 떨어지기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며칠을 묵혔으면 알아서 척척 내놔야지, 어쩌면 그렇게 입 싹 다물고 있어? 오죽하면 내가 나서야겠냐고.”
기가 막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하다. 슬그머니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조차 나질 않는다. 설마 모두 제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자기 챙기는 거 보니까 뭔가 무지 자연스럽더라. 몸에 손 올라가는 게 예사롭지 않던데?”
최대한 어색하지 않도록 미소는 지어 보이지만, 속은 벌써 시커멓게 타들었다. 물론 이런 일쯤이야 이미 예상하긴 했다. 어제처럼 외근을 핑계로 피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건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겪고 넘어갈 일이었다.
몰래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다진 수진은 태연히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에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냥 옛날 친구예요. 친구.”
“그건 아는데, 10년이 다 돼서 다시 만난 게 포인트지. 그런 고래 심줄 같은 우정이 세상에 얼마나 있다고? 더군다나 남녀 사이에.”
“에―이. 아니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니까 더 반가운 거죠!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상무님 젠틀하신 거야 다들 인정하잖아요. 너무 취한 여자를, 그것도 친구였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냥 둬요. 솔직히 제가 그날 너무 취하기도 해서…….”
“그래그래. 자기가 그렇게 취해 버린 그 과정이 수상하단 말이지. 자기처럼 술이 센 사람이 말이야. 상무님이 바로 자기한테 순서 넘기고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도 물어보지 않았던가? 내 눈엔 그거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던데?”
“그거야 아는 사이니까 괜히 장난을…….”
“그게 아니지. 그건 호구 조사하겠다는 뜻이잖아. 그동안 혹시 애인이라도 생겼나 걱정하는 딱 그런 뉘앙스였는데, 자긴 못 느꼈어? 하필 타이밍도 딱 본인 첫사랑 이야기까지 내놓았을 때고.”
“어우, 무슨 말씀이세요. 솔직히 그런 분이 어디가 모자라서 그냥 평범한 사원을 신경 쓰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평범한 사원에게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니까.”
이분이 간밤에 ‘명탐정 코난’이라도 정독하고 오셨나!
평소답지 않은 합리적 의심에 소름이 돋는다. 유난히 예리하게 핵심을 찔러 대는 나 과장의 공세에 진땀이 흐른다. 제 기분 탓만은 아닌 게 슬그머니 주변을 살핀 순간 저를 향해 있던 시선들이 휙휙 돌아가는 게 보인다.
와, 이거 완전 세렝게티 초원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임팔라 모드 아닌가요?
“거 아니라면 아닌 줄 아시지 뭘 그렇게 캐묻고 그러세요?”
그 위기의 순간, 반갑지 않은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자 파티션 너머로 최 대리의 기름진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수진 씨는 허황되게 신데렐라나 꿈꾸는 그런 여자 아닙니다. 그렇지?”
“네? 네. 아, 아니 뭐…….”
뜬금없게 무슨 소리야.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리자 최 대리는 이상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여간 요즘 여자들 남자 재산이나 따지고 주제도 안 되면서 명품 가방이나 들고 다니는 거 무지 꼴불견인 거 알아요? 그런데 우리 수진 씨는 봐요, 명품 하나 안 들고 검소한데 어디 가면 꼭꼭 더치페이까지 하거든. 이런 여자가 언감생심 상무님 같은 남자나 노리면서 허황된 꿈이나 꿀 거 같냐고요.”
기가 차서 절로 입이 벌어지는데,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아니, 명품 가방을 안 드는 거야 내 마음이고, 더치페이 꼬박꼬박 하는 건 그쪽이랑 엮이기 싫어서인데? 꼭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니?
“어머? 최 대리님. 그 말 좀 웃기네요? 그럼 다른 여자들은 다 남자 재산 보고 명품에 환장한 것들이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웬일이야, 대리님. 대체 언제 적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국민 소득 3만 불 시대에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논밭 한가운데서도 폰만 있으면 해외 직구 가능하고요, 심지어 밭일하는 아저씨들도 죄다 아웃도어 브랜드 걸치고 사는 나라예요, 우리나라가.”
포문을 연 효은부터 민영과 유리까지, 불쾌한 얼굴로 하나둘 참전을 선언했다. 이러다 자칫 된통 덮어쓰는 수가 있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 수진이 그녀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럼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취향이죠, 취향. 그리고 저는 잡화보다 화장품 마니아라서요. 다들 아시는 그런 브랜드 엄―청 많이 쓰고 있어요. 그쵸, 과장님?”
“그럼, 알다마다. 난 수진이 파우치 뒤져 보는 게 낙인데. 하여간 최 대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별소릴 다 한다.”
“아니, 다들 뭐 찔리는 거 있어요? 뭘 그렇게 발끈하고 정색들이세요? 난 그냥 수진 씨 칭찬한 거뿐인데. 그리고 수진 씨는 명품 가방 들고 출근한 적 한 번도 없잖아. 내가 매일 체크하는데.”
헐!
그야말로 위험한 소리에 경악한 수진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전 그냥 전철 타고 다니다 망가질까 봐 안 가지고 오는 거뿐이라고요.”
“그래, 그래. 물건 함부로 안 쓰는 거. 그것부터가 제대로 개념을 갖춘 증거라니까.”
대체 머릿속에 무슨 필터를 껴야 저렇게 들리지? 사고는 최 대리가 치고 있는데 애꿎은 저만 새우 등 터질 기세다. 점점 차가워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눈알에서 땀이 날 지경이다.
“저기요, 최 대리님. 뭔가 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두고 봐요. 수진 씨는 ‘사내 연애’로 같은 수준의 ‘평범한 남자’ 만나서 성실하게 맞벌이하면서 살 여자니까.”
이건 또 뭔 ㅆ…….
진짜로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씹어 삼켰다. 심지어 목적이 무엇인지 뻔히 알 만한 단어들에 강세를 두며 말을 마친 최 대리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인다. 수진은 그 순간 진심으로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이쯤 되니 최 대리의 속이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훤했다. 가장 눈치가 없는 유리조차 알아챌 정도로.
“헐. 웬일이야. 이제 보니 최 대리님. 김 주임님한테 관심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 뭐 관심이랄 거까지야.”
거기서 얼굴은 왜 붉히는 건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최 대리를 모두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와, 진짜 상상도 못 한 전개네.”
“이거 잘되면 우리 영업부에서는 처음으로 사내 커플 배출하는 거죠? 미리 축하해 드려야 하나?”
“에이, 뭘. 아직 그 정돈 아니라니까. 하하…….”
걸핏하면 일이나 떠맡기고 사고나 치기 일쑤인 최용민 대리.
그의 유일한 특기는 바로 이 광역(光域) 어그로(Aggro)로 욕을 긁어모으기다. 그 위력은 대단했다. 덕분에 준성에 대한 화제가 쏙 들어 가 버린 건 다행인데……. 이 불길함은 뭐지?
‘아 놔, 제대로 똥 밟았네!’
그것도 코끼리 똥에 버금가는 빅 똥으로!
“뭔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셔? 회의 때나 그렇게 하지. 그리고 민 주임. 잠깐 나 좀 보고.”
“네, 네. 부장님.”
“어머, 내 정신 좀. 메일 확인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아이고,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만.”
불쑥 나타난 신 부장의 일갈과 함께 쉰 떡밥에 관심을 거둔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틈을 타 최 대리가 은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하여간 수진 씨. 수줍음이 많아서 큰일이네. 칭찬 하나 제대로 못 견디고 말이야.”
“괜히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거 없죠. 그럼 전 일이 바빠서…….”
“아, 그보다 말이야. 지난번에 내가 부탁한 일 잘 처리해 준 게 고마워서 말인데, 나 이번 주말엔 특별히 약속도 없고 모처럼 시간이 좀 나거든. 오랜만에 같이 식사라도…….”
“어머, 어떡하죠? 저 이번 주말부터 시간 날 때마다 지인분 가게에서 일 돕기로 했거든요.”
“그래? 무슨 아르바이트? 서빙인가? 놀러 가도 돼?”
“‘바 블루’라는 곳인데 이태원에 있어요.”
“이태원?”
“네, 꼭 놀러 오세요. 게이바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요.”
상냥하게 대꾸해 준 수진은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최 대리를 무시하며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이따위 뻔한 수작질을 쳐 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진짜 무서운 건, 또 어느 순간 느닷없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웬 높으신 분이지.
‘하긴. 지난주에 그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어 놨었는데 설마 또 그러겠어?’
정말 사람 말려 죽일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작게 한숨을 내쉰 수진이 이내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곱씹지 않으려 애쓰면서.
* * *
점심시간이 되자 오전 업무를 마무리한 직원들이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외근이나 선약이 있어 나간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하 1층에 위치한 직원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들이었다.
“점심 드셔야죠, 과장님!”
가장 먼저 일어난 민 주임이 나 과장의 팔짱을 끼고 나서자 민영과 유리가 뒤따랐다. 수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녀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럴 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마음 편히 외부 식당을 이용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굶주린 채로 이 넓은 호텔 부지를 걷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서 포기했다. 오전 내내 지나치게 머리를 많이 쓴 탓인지 시장기로 눈이 핑핑 돌 것 같았다.
“오늘은 웬일로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 슬슬 연말 다가온다고 다들 바쁘긴 한가 본데. 아, 냄새 좋다. 오늘은 튀김 우동인가?”
나 과장의 목소리에 설렘이 묻어났다.
“난 세상에서 점심 약속이 제일 싫더라. 왜냐면 그날의 식단을 알 수가 없잖아.”
“어우, 누가 보면 과장님은 우리 호텔에 밥 먹으러 입사하신 줄 알 거예요.”
“그게 어때서?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 살지.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키득거리며 식판을 채운 직원들이 줄지어 빈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에 끼어 앉은 수진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묘하게 몸이 차고 기름기가 당기던 차에 좋아하는 새우튀김을 얹은 우동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져 모처럼 표정이 밝아진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