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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7화

“왜 그렇게 열심히야?”

“음?”

조금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던 걸까. 동그랗게 뜬 눈을 본 순간 얼른 말을 바꿨다.

“아, 미안.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보기에 정말 열심히 사는 거 같아서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래서…….”

“아아, 뭔지 알아. 그렇게 설명 안 해도 돼. 전혀 나쁘게 안 들렸어, 걱정하지 마.”

하하, 웃던 그녀가 이번엔 조금 멋쩍은 얼굴을 했다.

“글쎄. 생각해 보니 그러네. 아까 말한 대로 나중에 먹고살 일 걱정돼서 그렇기도 하고,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 쌓으니까 나도 덩달아 하게 되는 것도 있고. 이유야 뭐,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을까?”

그러고는 그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 넌 어쩌다 경영학과를 선택한 거야? 혹시 가고 싶은 회사라도 있었어?”

“아니. 아직…… 정확한 진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어째선지 순간 머뭇거리는 대답이 나왔다.

“난 딱히 꿈이 없어. 미래에 대한 생각도 구체적으로 해 본 적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너무도 완벽하게 짜여 있던 삶이었다. 끝이 정해진 미래. 저는 그저 묵묵히 정해진 길을 걷는 게 전부였다.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거대하게 굴러가는 기계 속 작은 부품이 된 느낌으로 살아왔고 그걸 당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현실에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사는 건 좀 이상한가?”

정확히는 이런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착실하게 자신만의 삶을 계획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여자를 보니 더더욱.

“흠.”

그녀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이내 싱긋 웃음을 머금고는 운을 뗐다.

“이상하다는 것의 기준을 모르겠어. 그건 내가 판단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에게서 이내 좀 더 진지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만 내 생각은 그래. 꿈이나 목표 그 자체로 삶을 재단하면 안 된다고 봐.”

“…….”

“그런 거 없으면 좀 어때? 세상엔 별사람이 다 있는데 꼭 다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 필요는 없잖아.”

그럼 세상이 무슨 재미야. 농담처럼 뒷말을 곁들이며 부러 짓궂게 말을 마친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험한 세상 살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많이 힘들건 적게 힘들건 힘든 건 똑같은 거잖아. 크든 작든 누구나 맡은 자리에서 자기 역할 하는 것도 다 노력이 필요한 거고. 그래서 그냥,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낸 누군가에게 ‘넌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칭찬해 주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나직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한 잔 더?’라고 묻고는 머신을 향했다. 멍하니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뛰는 심장도. 뭉근히 피어오르는 감각도. 하나같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저 그녀의 가녀린 어깨부터 바쁘게 움직이던 작고 하얀 손. 곧이어 풍겨 나는 짙은 커피 향기까지. 그 모든 걸 가만히 눈에 담으며 생각했었다.

이러니 내가 널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그렇게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너라서, 당연히 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 * *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 순간, 때마침 집무실로 들어선 문홍이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입니까?”

저 자신이 듣기에도 들뜬 목소리였다. 준성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머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진 얄궂기만 했던 기억이었는데, 지금은 눈앞까지 다가온 희망에 취해선지 고통으로 흘려보냈던 순간조차 달콤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할 줄이야. 그래선지 빤히 느껴지는 시선에 얼굴이 따갑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니, 뭔가…… 낯선 느낌이라서요.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 처음 봅니다.”

적어도 제가 모신 동안은요, 라고 중얼거리듯 덧붙인 문홍은 이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한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덧붙이자면 금요일 날 예정됐던 출국도 미루시고 갑자기 회식을 한다고 하셨을 때도 딱 이런 느낌이었죠.”

준성은 나직하게 웃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준성의 태도에 자신을 얻은 건지 문홍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리고 토요일 새벽에나 돌아오셨고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지막 술자리에서 한 여자분이랑 동행하셨다고. 혹, 그분이…….”

“제 행적으로 추리해 보는 놀이인가요? 당하는 입장에선 별로 재미없군요.”

“아, 죄송합니다.”

서늘한 말투에 그제야 너무 깊게 발을 들였음을 안 문홍이 서둘러 사과했다. 평소와 달리 어딘지 말랑말랑해 보이는 태도를 접하고 그만 너무 마음을 놓았나 보다.

“어쨌거나 현장에 없었던 김 비서님이 그 정도로 알아챌 정도면, 제 행동이 그렇게 자연스럽진 못했다는 뜻이겠군요. 같이 있던 사람들에겐 더 눈에 띄었을 수도 있고……. 괜히 이상한 오해나 받느니 차라리 공개 연애가 나을 텐데.”

“……상무님?”

그래서 이어지는 말에 문홍은 진심으로 당황해 버렸다.

공개 연애라니요? 대체 언제 그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진행이 된 겁니까?

“압니다. 한쪽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좀 생각이 많아지네요.”

확실한 건 사생활을 너무 캐 대서 불쾌해한 게 아니라는 것뿐.

문홍은 점점 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싱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지하게 정신 상태가 걱정되는데, 차마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상사가 조만간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참이다.

토요일 오전 중에 출국했던 준성은 일을 마치자마자 귀국을 서둘러 화요일 새벽 4시쯤에야 간신히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하루 정돈 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정확히 2시간 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출근할 테니 준비하라는 준성의 선언에 문홍은 깊이 좌절했다.

자고로 윗사람이 너무 부지런하면 아랫사람이 피곤해지는 법.

심지어 똑같이 시차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임에도 초췌해진 자신과는 달리 묘하게 싱그러운 준성의 모습에 문홍은 또 다른 의미로 좌절감을 느꼈다.

고작 다섯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이러기 있냐.

제길. 이게 다 나이 때문이야.

“그만 잠 깨셨으면 바로 일과 시작하죠. 오전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그의 걱정이 무색하도록 준성은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문홍이 스케줄러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7시 30분부터 팀장 회의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10시부터는 면세사업부와 면세점 시찰, 11시 30분부터 임원 회의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시간대로 보아 오찬을 겸하실 것 같아 예정된 차 의원님과의 점심 약속은 모레 이후로 미뤘으면 한다고 말씀드려 놓았고, 오후 일정 또한 2시 이후로 잡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피곤할 상사의 몸을 생각해 알아서 모든 일정을 잘 조율해 두었다는 유능한 비서가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글쎄요. 굳이 오찬을 함께할 일이 있을까 싶은데…….”

“네? 아, 그, 그럼 차 의원님께 다시 연락을 드려야 할까요?”

멋대로 스케줄을 바꾼 게 영 탐탁지 않아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황한 문홍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요. 일단은 그대로 가죠. 다른 약속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대로 멈칫한 문홍이 준성을 빤히 바라봤다. 눈빛만으로도 그렇게나 많은 질문이 가능한 줄은 몰랐다.

“아, 그리고 오늘 점심은 직원 식당을 이용할 예정입니다.”

“…….”

“업무 현장 분위기가 어떤지 제대로 알아보고 싶어서요. 직원분들이랑 같이 식사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파악해 볼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데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저 자신이 생각해도 꽤 그럴듯한 핑계였다. 그래서 김 비서 또한 이 난데없는 상황에 침착함을 잃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으리라.

“차 의원님과의 약속을 미루신 건 잘하셨습니다. 날짜 확정되는 대로 다시 알려 주세요.”

그러나 그 표정에 어린 혼란까진 숨기지 못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혼자 남은 준성이 뒤늦게 웃음을 머금었다.

“다행이네요. 나만 어이없는 게 아니라.”

당혹스럽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번쩍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내뱉은 적은 처음이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서. 잠시 잠깐도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저 어떻게든 그녀를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독한 갈증을 채우기엔 이것도 턱없이 부족했다. 모든 일과가 끝나길 기다리기엔 너무도 숨이 막혔다. 여전히 야속한 그녀는 먼저 연락을 해 주는 법이라곤 없다.

지난 며칠 동안의 그녀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지난 주말을 보낸 건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저를 발견한 순간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해 죽겠는 걸 어쩌느냔 말이다.

“진짜 미친 거 같네. 이러니까.”

가벼운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어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표정엔 들뜬 기색이 여실했다.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 기분 좋은 박동을 유지했다.

* * *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화요일 아침이었다. 서류로 가득한 책상 앞에 바짝 붙어 앉은 수진은 모니터를 가득 메운 자료들을 훑어보며 한쪽 귀에 휴대폰을 댄 채, 남은 한쪽 귀로는 사무실에 떠도는 말들을 열심히 주워듣고 있었다. 사회생활 5년 차의 멀티태스킹 능력이 빛을 발하는 중이다.

“유리야, 쿠폰 북 자료 받아 왔니? 오늘 내로 확인해서 보내야 하는데.”

“네, 과장님. 출근하자마자 받아다 책상 위에 올려 뒀어요.”

“민 주임. 나 지금 나가 봐야 하니까 연간 계획서 작성 끝나는 대로 내 거랑 같이 프린트해서 부장님 책상에 가져다 놔 줘.”

“아니, 그걸 왜 또 절 시켜요! 저 지금 회의 자료 정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회의를 앞둔 탓인지 오가는 목소리들이 다소 날카롭다. 회의만 시작하면 평균 세 시간이 넘도록 영양가 없는 소리를 늘어놓느라 팀원들을 놓아주질 않는 신 부장 덕에 오전엔 항상 일이 밀리고 촉박했다. 덩달아 다들 마음도 급했고.

원래도 주초엔 일이 많은 편이지만, 연말 시즌을 앞둔 지금은 유독 바빴다. 현재까지의 매출액 달성 상황을 점검하고, DM 발송을 위한 고객 명단을 정리하는 와중에 판촉팀의 행사인 ‘부커스 파티’의 준비 상황을 살펴야 했고, 그 와중에 연말 행사를 미리 준비하는 기업 고객들과의 연락까지 주고받아야 했다.

“네, 연회팀에 전달해 놓았으니 바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또 문의하실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이 뜨끈해질 때까지 통화를 하고 나니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꼭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 잠시 의자에 기대앉은 순간이었다.

‘많이 좋아했다.’

바로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또 생각나 버렸어!

가뜩이나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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