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26화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각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잔뜩 얼어붙어 있던 수진이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아까보다는 조금 멀어진 곳에서, 그러나 여전히 가까운 자리에 머물러 있던 그가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난데없는 말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만 더 인사불성 될 정도로 취하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장난기를 걷어 낸 말투는 더없이 진지했다.
멀뚱히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자 다시금 웃음 짓던 그가 시선을 맞춘다.
“김수진.”
나직한 부름에 숨이 멎는다.
“수진아.”
이어 조금 장난기를 섞은 부름에 슬쩍 눈을 치떴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한결 애틋해진 눈빛과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미소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 다시 눈을 내리깐 순간,
“많이 좋아했다.”
무심히 지나듯 내뱉는다.
“나도 생각한 거 이상으로 널 정말 많이 좋아했나 봐.”
철렁한 심장을 가눌 새도 없이 기어이 흑역사를 꺼내 인용까지 하고.
아주 들었다 놨다, 정신이 없다.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흘기자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말해 보네. 속 시원하다.”
“너 진짜…… 그, 그런 말을 이렇게 갑자기 하는 게…….”
“기회가 없었잖아. 어쨌거나 이번엔 네가 확실하게 기회를 줬고.”
“내가 언제……!”
“자꾸 딴청 부리면 또 읊어 준다?”
또다시 흑역사를 들먹여 입을 다물게 만든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긴장하고 있으라고. 선전 포고니까.”
슬그머니 뺨을 꼬집는 손길이 더없이 다정하다. 심장이 덜컥거리는 통에 자꾸만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르게 숨을 내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잘 자고. 회사에서 보자.”
미련 없이 돌아선 그가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문이 닫힐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야 비틀거리며 침대로 쓰러졌다. 눈을 감아 보지만 커피 열 잔을 한 방에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시큰거려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어떡해, 진짜…….”
잠은 다 잤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굳게 닫혀 있던 부속실의 문을 열던 정 비서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아침……. 어머, 상무님! 그건 제가……!”
무심코 인사말을 건네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들었다. 저만치 앞에 근사하게 슈트를 빼입은 남자가 꽤 익숙한 태도로 커피 한 잔이 놓인 작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잽싸게 확인한 시간은 이제 7시 14분. 너무 이른 때인데, 왜 벌써 커피 향이 진하게 풍기고 있나 했다. 심지어 그의 어깨 너머로 제자리에 선 채 안절부절못하는 박 비서의 모습도 눈에 띈다.
“이 정돈 제가 해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그, 그래도…….”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상큼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던 정 비서는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서야 가슴에 손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지원 씨. 상무님 오늘 왜 이러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모르겠어요.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저도 이제 막 왔는데 벌써 와 계시더라고요. 머신을 또 기막히게 잘 쓰시는데 한두 번 해 보신 솜씨가 아니던데요? 완전 바리스타예요. 정 대리님이 그걸 직접 보셨어야 해요. 진심 그림이 따로 없었어요.”
“하……. 나 요즘 상무님 때문에 너무 힘들다, 진심으로.”
“저도요. 저분이 내 남자가 아니라서 괴로운데, 내 남자라고 생각하면 더 무서운 거, 어떤 느낌인지 아시죠?”
“알지, 알지. 그 맘 내가 알아.”
그렇게 때아닌 고충을 겪게 된 비서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로 돌아온 준성은 책상 위를 가득 메운 경제지와 온갖 소식지로 눈을 돌렸다. 아침 운동의 흔적으로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리곤 그중의 하나를 집어 들어 보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대신에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서늘한 공기 중으로 갓 내린 커피 향이 스며들자 그의 입가에도 느긋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게 냄새라 했던가.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커피처럼, 기억은 불시에 덮쳐 오곤 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제 마음속에 고이 묻어 두었을 때도, 짙은 커피 향에 문득문득 그 시절의 감정을 되뇌곤 했다. 그날의 풍경을 그리곤 했다.
반쯤 창을 가린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곧게 꽂혀 드는 빛을 타고 부유하는 작은 먼지.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던 창가의 드림캐처 하나와 느릿하게 돌아가던 천장의 실링팬.
그것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한, 초여름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 * *
그날의 그녀는 길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적당히 묶고, 목둘레를 훤히 드러내는 디자인의 얇은 니트 차림이었다. 맑게 빛나는 깨끗한 뺨. 도톰하게 모인 입술과 가느다랗게 선을 드러낸 목덜미에서 어깨로 점점 시선이 옮겨 갔지만, 그 순간조차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넋을 놓고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조막만 한 얼굴에 깃든 홍조도. 놀란 듯 둥글게 치켜뜬 눈과 짙게 그늘을 그리는 풍성한 속눈썹도. 느릿하게 벌어지는 붉은 입술 옆의 선명한 보조개도…….
“……예쁘다.”
“어맛! 깜짝이야!”
“아, 저기, 방금 그 말은 그냥…….”
“뭐, 뭐야? 왔으면 말을 걸 것이지. 놀랬잖아. 갑자기…….”
동시에 내뱉어 놓은 말이 마구 뒤엉키고 놀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찰나의 어색함이 주변을 뒤덮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굳어 버린 그 대신에 먼저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다시 눈앞의 꽃다발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봐도 예쁘지? 사장님이 놓고 가셨는데 어, 잠깐 이게 이름이 뭐라고 했는데…….”
‘예쁘다.’의 주어는 분명 다른 것이었음에도 준성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 갔다. 이상하리만치 그녀를 자주 찾던 때였다. 그동안 늘 마음에 담고 있던 생각이긴 했는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놓긴 처음이었다. 새삼스레 그 말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재빨리 말을 받았다.
“미스티 블루?”
“어! 맞다.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아. 이야, 역시 꽃미남이라 그런지 같은 꽃 계열은 또 잘 알아보는구나?”
“그럴 리가 있냐.”
“하하, 너 정색하는 거 웃겨.”
줄곧 저를 따라다니는 낯간지러운 찬사들에는 익숙할 만큼 익숙했는데도, 묘하게 그녀의 말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 사심도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들뜨곤 했다.
알기나 할까. 아까부터 이상하게 끓고 있는 열기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을. 유난히 붉어 보이는 입술과 허술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정처 없이 맴도는 시선을 힘겹게 되돌리려는 제 노력을.
이런 자신을 안다면, 절대 저렇게 웃으며 바라보지 않겠지.
“그나저나 이 시간에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냥. 커피나 한잔할까 하고.”
이상하게 네가 보고 싶었어, 라는 말은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사실 커피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쓴맛과 속을 긁어내리는 듯한 느낌 탓에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커피 마니아가 되기로 결심한 상태다.
“참 내, 그럼 그렇지. 난 또 무슨 용건이라고. 뭐 마실래? 라테? 아메리카노? 아니다, 아메리카노가 좋겠어. 마침 오늘 원두 바꿔 봤는데 반응이 엄청 좋았거든. 시원하게 마시면 너도 맘에 들 거야.”
“거기다 같이 수다 떨 시간도 좀 추가해 주시죠.”
“어머, 고객님. 전 시급이 짜서 그런 서비스까진 안 되는데 어떡하죠?”
“와, 무슨 가게가 이래. 손님은 왕인 거 몰라요?”
“그런 말 하시면 또 확 때려치우고 왕중왕전 가 버리는 수가 있어요, 진짜. 3천 원입니다.”
키득거리며 역할을 맞춰 주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작고, 하얗고, 가느다란 손. 몸 안 어딘가 바짝 죄여 드는 듯한 느낌을 억누르며 카드를 내밀었다가 손끝이 스친 곳에서부터 찌릿하게 전류가 흘러 저도 모르게 흠칫해 버렸다.
“혹시 입맛에 안 맞아도 환불은 없습니다, 고객님. 낙장불입이에요.”
기막힌 넉살을 부리며 카드를 돌려준 그녀가 생긋 웃어 보인 순간, 심장이 일렁였다. 그날따라, 유독.
그 시절의 그는 각인된 오리 새끼 같았다. 그녀가 커피를 내리는 그 잠깐도 기다리지 못하고 슬그머니 곁에 다가섰다. 방해된다는 구박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다 결국 한 잔 만들어 보는 걸 허락받았다. 엉성한 손길로 처음 내려 본 커피는 맛을 모르는 제 입에도 회생 불능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던 그녀가 그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님도 없는 조그만 카페에서, 서로가 만든 커피를 하나씩 앞에 놓은 채로 마주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었다.
막상 친구가 되어 알게 된 건 그녀가 꽤나 유머러스하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이연희와 저 자신. 그리고 수혁이 전부였다.
그 사실에 묘한 성취감과 더불어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특히나 수혁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더 강한 거부감이 들었는데, 당시엔 그게 질투심이었다는 걸 몰랐었다.
다만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한 번이라도 더 그녀를 만나며 참으로 하찮은 자기 위안을 하곤 했었다.
바로 오늘처럼.
“그럼 그걸 너 혼자 다 했단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하나라도 평가 떨어지면 바로 아웃인데, 그러다 장학금도 날아가면 끝장이라고. 더럽고 치사해도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뭐.”
자연스럽게 이어진 수다는 어느덧 학업에 관한 주제로 옮겨 갔다. 학과의 특성상 조별 과제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고, 역시나 그 악명 높은 미루기에 그녀도 어지간히 시달린 눈치였다.
“넌 참 대단하다.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 성적 유지하기 쉽지 않은데.”
“대단할 일도 많다.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난 이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일단 졸업까지 최대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버티는 게 내 목표기도 하고.”
“목표?”
“응. 난 항상 그렇게 목표를 정해 놓고 달리는 편이야. 안 그러면 한도 끝도 없이 게을러지거든. 어쨌든 지금까진 계획대로 잘되고 있었는데, 졸업한 다음이 문제야. 요샌 취업도 힘든 시기잖아.”
이제 1학년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부터 졸업 이후의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바쁜 머릿속에 또 무슨 고민을 넣어 둔 건지. 투덜거리며 커피를 머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