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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5화

좌절할 새도 없이 짝도 맞지 않는 머그컵에다 찻물을 부어 내놓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 사람을 여기서 내보내는 일에 총력을 다할 때였다.

“다른 건 없나?”

“뭐! 녹차 별로 안 좋아하니까 생각해서 홍차 주는 건데요, 뭐!”

“혹시 메이드 인 러시아인가 하고…….”

“……설마 그걸 농담이라고 하니?”

저 생각해서 영국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귀한 홍차까지 내놨더니만 짐짓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타박이다. 이제 기미 상궁 노릇까지 하라는 건가. 보란 듯이 한 모금 들이켜 준 수진이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자, 마시는 거 봤죠? 그러니까 그만 안심하고 빨리 마시고 가세요.”

“안심 못 해. 김수진은 거짓말쟁이잖아.”

“누가 거짓말쟁인데?”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대답 안 했잖아.”

정색을 안 할 수가 없는 대답에 눈을 부릅뜨자 준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곱게 눈매를 휘며 웃기 시작했다. 장난기로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어느 순간부터 존대와 반말이 뒤죽박죽 섞이고 있었지만 바로잡을 새도 없다.

“그,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한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데 그걸 어떻게 말해?”

“왜 못 합니까?”

“진짜 몰라서 그래?”

“아, 사내 연애는 싫다고? 말을 하지.”

저 천진한 대사에 머리가 울린다. 환장하겠다.

“송준성 씨.”

그래, 애초에 피하거나 무시하는 걸로 될 일은 아니었다. 이 사달이 난 것도 어설프게 무마하려다 생긴 일이 아닌가. 남은 건 정면 돌파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찰거머리, 아니 옛 친구이자 영원히 짝사랑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상무 이사님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단지 짐작이 아닌,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확인해야 할 사실을.

심호흡을 한 수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혹시 저랑…….”

“하고 싶어.”

“…….”

“연애.”

아, 진짜 쫌! 말 순서 자비 쫌!

어찌나 놀랐는지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왜 똑같은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거야!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앞에서 담담히 뒷말을 덧붙인 준성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웃음기가 만연한 입가와 가볍게 휘어 있는 눈매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화가 난다.

“지금 이러는 거 시간 낭비라는 생각 안 드세요?”

“무슨 뜻이야?”

“생각해 보라고요. 우리 이젠 적은 나이 아니라고요. 그쪽이나 저나 이제 좀 더 진지하게 상대를 고를 때잖아요. 괜히 되지도 않을 일에 한가하게 시간 투자할…….”

“음, 내 어디가 그렇게 한가해 보였을까?”

차분히 돌아온 물음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부드럽게 웃고는 있지만,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는 눈매와 말투에는 다소 불쾌한 기색마저 어렸다.

왠지 뭔가 잘못 건드렸단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

“그럼 시간 낭비 없이 본론으로 갈래?”

“아니, 사양하고 싶습…….”

“난 너랑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기왕이면, 지금, 당장.”

뭐 이런 미친 돌직구가 다 있어!

경악하며 눈을 크게 뜨자 준성은 당당히 제 시계를 보이며 재촉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며. 빨리 허락 좀 하지?”

“그걸 어떻게 허락……!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너랑 나랑 엮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면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 말은 너 이러는 게 시간 낭비란 뜻이라니까! 현실을 생각하란 말이야.”

“나 무지 현실적인 사람인데.”

빙긋 웃는 남자를 보니 이젠 현기증이 난다.

애초에 넌 태생부터 비현실적이야. 왜 그걸 모르니!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인데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으니 설득할 방법이 없다. 어질어질, 핑 도는 머리를 꾹 누르며 간신히 현기증을 견뎌 내니 이젠 진짜 현실의 문제가 눈앞에 닥쳐왔다.

아니지. 지금 난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늘 같은 상무님을 앞에 두고서.

“제가 생각보다 그쪽을……. 그러니까 저질러 놓은 짓보다는 좀 많이 그쪽을…… 아, 안 좋아할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하세요, 상무님?”

“나 생각보다 널 많이 좋아했었나 봐. 많이 보고 싶고 궁금했어. 사실은 다시 네 곁에 있고…….”

“으, 으악! 됐어! 알았어! 아, 알아들었다고! 그런 건 외우지 마!”

뭐 이런 미친 기억력이 다 있어!

기겁한 수진이 퍼덕퍼덕 손을 내저었다. 그 부끄러움의 결정체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읊어 줄 기세다.

“미안, 너무 인상적이라서 도무지 잊혀야 말이지.”

그 와중에도 비 갠 초여름 하늘처럼 상큼 청량한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피눈물이 난다.

정녕 여기서 도망칠 길은 없는 거야?

“어쨌거나 먼저 고백한 건 너야. 결론은 정해진 거 같으니까 허락만 하시지?”

이젠 답정너고?

“그, 그래요. 사귈…… 수도 있죠. 네. 사귀고 헤어지고. 사람 인연이 뭐 그렇다고 칩시다.”

“왜 사귀기도 전에 헤어질 걸 생각해?”

“앞날은 모르잖아요.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우린 같은 회사에서 얼굴 마주치고 사는 처지예요. 헤어지고 나서 그 불편함은 누가 감당하는데요? 설마 날 백조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죠?”

가혹한 현실을 내세우며 대놓고 비굴 모드로 주절거려 봤지만, 팔짱까지 낀 채 바라보는 남자는 무슨 감정이 있기나 한 건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이미 겪어 봐서 아는 일이지만 저런 표정일 때의 준성은 조금 위험하다.

“난 지금도 널 충분히 불편하게 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 매우, 확실하게, 위험하다.

후다닥 일어난 수진은 아직 홍차가 반이 넘게 남은 그의 머그컵으로 손을 뻗었다.

“자, 그럼 협상은 결렬이네요. 나머진 다음 기회에. 나 지금 무지 졸려서 치우고 이만 자야겠거든요? 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피곤하면 먼저 자.”

“네가 가야 잠을 자든가 말든가 하죠!”

“왜 못 자는데? 아, 이불이라도 주면 고맙고. 난 저기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누구 맘대로 남의 소파를…….”

“걱정 마. 나 의외로 그런 데서 잘 자니까. 신경 쓰이면 침대 반만 양보하든지.”

“미쳤……! 아니, 그게 아니라 넌 그만 그쪽 집에 가시라고요! 너희 집! 지금 외간 여자 집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어디 보자. 뭐 담요 같은 건 없어? 저기 있나?”

“야, 송준성 너 진짜!”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준성이 태연히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붙잡았다. 전혀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 버릴 기세다.

아니, 더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열려는 게 벽장이란 점이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아, 안 돼! 거긴 열지…… 악!”

튀어나오던 수진이 그만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며 풀썩 주저앉았다. 뒷골까지 짜르르해지는 고통에 정신이 다 혼미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간신히 테이블을 붙들고 일어나자 어느새 다가온 준성이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물어 왔다.

“괜찮아?”

“너…… 너, 이 씨…….”

뒤늦게 억울함이 밀려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너 뭐야 진짜! 너 이런 놈이었어? 뭐 이렇게 다 네 맘대론데!”

“미안. 그런데 나 원래 이런 놈이었어. 네 앞에서만 자제한 거지.”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이젠 정말 혼란스러워 헛웃음만 났다.

정말 미안하긴 해? 그 젠틀하고 예의 바른 송준성은 온데간데없고 다른 사람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제멋대로인 남자가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꿈을 꾸나 싶을 정도다.

글썽한 눈에 힘을 주자 다시 웃던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슬쩍 문질렀다.

“하지 마.”

움찔한 수진이 달아오른 얼굴에 손등을 대며 고개를 돌리자 손을 거둔 그가 이번엔 몸을 숙이며 묻는다.

“어디 괜찮은가 좀 봐.”

“괘, 괜찮아. 안 봐도 되니까 하지 마.”

“발톱이라도 깨진 거면 한동안 고생할 텐데…….”

“내가 할 거니까 그냥 둬. 괜찮으니까 이, 이것도 좀.”

허리를 감은 팔에 더 힘을 줘 당기는 통에 흠칫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제 눈높이까지 낮아진 남자의 옆얼굴에 시선이 간다.

모난 곳 없이 단정한 얼굴선과 고운 피부가 눈부시다. 그에 반해 우아하게 각이 진 턱선과 툭 불거져 나온 목울대가 확실한 수컷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 넋을 잃고 헤매던 시선이 천천히 남자의 그린 듯 반듯한 눈매와 그 안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닿았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 언제부터 눈이 마주쳤 걸까.

어느 틈에 그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꽤 위험한 상태였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이 굶주린 사자처럼 느껴진다. 온몸이 위험 경고를 보내는데도 눈을 돌리기는커녕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눈이라도 감았다간 당장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처음 본다. 너 그런 얼굴.”

그의 입가가 가볍게 치켜 올라간 순간 소스라치며 숨을 들이켰다. 숨을 쉬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만족한 듯 웃던 그가 슬쩍 몸을 세우더니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속삭였다.

“박스로 있더라?”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한 박스에…… 스무 개였던가?”

그 시선을 따라가니 훤히 열려 있는 벽장이 보인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짐 속에 자리한 새하얀 박스 하나.

떡하니 써진 두 글자, 라면. 싱글녀의 비상식량 라면!

아나, 메뚜기표 참라면 너 이 자식! 네가 왜 거기 있어!

태어나서 이토록 민첩해 본 기억은 없었다. 고통조차 잊고 뛰어나간 수진이 황급히 벽장의 문을 닫고 그 앞을 막아섰다. 느긋하게 뒤따라온 준성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는다. 의심의 여지도 없는 승리자의 미소!

수진은 절망하며 외쳤다.

“저, 저거 컵라면이거든? 열여섯 개야, 열여섯 개!”

“그럼 열여섯 번은 한다, 이 말이지?”

아, 지대로 낚였다. 수진은 제 몸을 감아 오는 팔과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그늘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대체 왜 네 멋대로 그런 걸 정하는 거야? 난 도, 동의한 적 없는데…….”

“괜찮아. 이제 하게 될 거니까.”

“아니, 그게…… 하지…… 마.”

“뭘?”

그거 말이다, 그거.

차마 말을 못 잇는 그녀의 앞에서 작게 웃어 버린 준성이 더 가까이 얼굴을 댔다.

“뭘 하지 말까?”

“…….”

“응?”

좀 더 낮아진 목소리. 은근한 물음 끝에 어린 미소.

코끝이 스치고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야 더 견디지 못한 수진은 눈을 감아 버렸다.

끝내 피하지도, 밀어 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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