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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4화

“너 지금, 하아……. 그렇게 정신 놓을 때냐? 남자들도 있는 데서 그렇게 될 때까지 마시고 뭐 하자는 거야. 이 멍청이를 진짜.”

너른 가슴팍에 뺨을 대자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뒤통수를 누르는 손길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겠어? 데려다줄 거니까 정신 좀 차려 봐.”

좀 더 가까워진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어떻게 그 술을 다 마시도록 대답도 못 해? 그렇게 말하기 싫었어? 너 바보야?”

이어 나지막이 투덜거리는 말투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럼 그걸 어떻게 대답하는데, 이 나쁜 놈아.

모든 것이 가물거리는 회식 자리였지만, 딱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있었다.

‘하긴, 회장님 성품만 생각해도 그렇죠. 결혼 상대 같은 건 진즉에 정해졌을걸요? 생각해 봐요. 어설픈 여자랑 연애하다 애라도 생겨서 엉뚱하게 발목 잡히면 큰일이잖아요. 그런 집안은 결혼도 사업이나 다름없을 텐데.’

난 알고 있었다고, 처음부터.

넌 그것도 모르는 주제에 누구더러 멍청이래.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너무 뼈저리게 차이가 느껴지니까 안 된다고 말했던 건데.

“쳇. 부르주아.”

투덜거리듯 작게 뱉은 말에 종이컵을 내밀던 준성이 멈칫했다.

“갑자기 무슨 소린데?”

“…….”

“핫초코 괜찮지?”

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이 준성은 같은 택시에 올랐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조그만 동네 마트 앞에서 같이 내렸다. 이제 혼자 갈 수 있다는 말에도 준성은 차 한잔하자는 말로 태연히 그녀를 붙잡았다.

불빛이라곤 침침한 가로등뿐인 외지고 어둑한 길이었다. 이미 문을 닫아 버린 마트 앞에 걸터앉은 그녀가 불편한 듯 몸을 움츠렸다.

“술은 좀 깼어?”

“네. 덕분에요. 소맥 몇 잔 마신 거로는 안 죽거든요.”

불퉁한 투로 내뱉자 그의 입가가 조금 치켜 올라갔다.

“그래도 술 냄새 풍기면서 다니기엔 너무 외진 곳이니까. 되도록 밤늦게 다니지 마.”

“회사에서 이런 회식 같은 걸 안 해야 일찍 다니죠.”

“그런가?”

이번엔 그의 웃음이 좀 더 짙어졌다.

“웃음이 나오세요? 난 지금 월요일 날 어째야 하나, 머리가 터질 거 같은데.”

“어째서?”

“몰라서 물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웠다고 데려다주니 마니…….”

약간 무게감이 있는 트렌치코트가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흠칫한 눈을 치켜뜨자 어느새 몸을 숙여 앉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딱딱해진 눈빛과는 달리 옷자락을 여며 주는 손길이 부드러워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다시 일어난 그가 자판기에서 두 번째 종이컵을 꺼내 쥐었다.

“그런 것도 마실 줄 아세요?”

“겨우 정신 좀 드나 했더니만 한다는 소리하곤. 잊었어? 자판기에서 커피 빼서 마시고 있으면 귀신같이 덤벼들어서 백 원짜리 뺏어 갔던 게 누구더라?”

“그거야…… 뭐.”

그와 수업이 겹칠 때면, 언제나 수업 시간보다 조금 일찍 경영대 건물로 뛰어갔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웠었다. 소매를 접은 하늘색 옥스퍼드 셔츠에 적당히 실루엣을 드러내던 네이비 색의 치노 팬츠. 특별할 것 없이 무난한 차림이면서도 누구보다 눈에 띄었던 그의 모습이.

“아주 깡패가 따로 없었지. 남의 주머니를 막 뒤지지를 않나, 그래 놓고 갚지도 않고.”

“쩨쩨하게 돈도 많으면서…….”

왠지 모를 위화감에 입을 다문 수진이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뭔가 제 입으로 말했으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 기분이다.

빤히 시선을 맞춘 준성이 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하여간 눈치도 더럽게 없다니까. 내가 너 때문에 아침마다 백 원짜리 구해 놓느라 얼마나 성가셨는지 알아?”

“성가…… 하! 누, 누가 일부러 구해 놓으랬어요?”

“나한테 없으면 다른 놈들 주머니도 막 뒤질 거 아냐? 아무 남자나 만지는 걸 보고 있으라고?”

만지면 어때서. 왜 그걸 네가 신경 쓰는 건데. 그냥 친구인 네가 왜…….

할 말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짝사랑……인 줄 알았죠. 얼마 전까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들어 버린 후였으니까.

얼마나 마주 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은은하게 미소가 깃든 얼굴을 마주 보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자꾸만 숨이 가빠진다. 평소엔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숨쉬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내가 독점욕이 좀 있거든.”

뜬금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순간, 미소가 깃든 입술이 더 짓궂게 호선을 그렸다.

“내 장난감이 마음대로 다른 놈이랑 놀아나는 꼴은 못 보지.”

“자, 장난감? 너 지금 그거 나 말하는 거야?”

“이제 말 막 놓네?”

“에이 씨! 그래! 놓는다, 어쩔래? 너 이제 보니까 나보다 생일도 느리더라? 나 처녀자리거든? 어디서 천칭자리 주제에 누나한테 까불고 있어!”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말에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여전히 벌렁거리는 심장도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차마 준성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후다닥 고개를 돌려 버린 수진이 급히 종이컵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불행히도 뜨거운 음료라는 걸 깜빡한 채.

“앗 뜨!”

“아!”

동시에 놓친 컵이 정확히 준성의 허벅지로 돌진했다.

“엄맛! 어떡해! 죄, 죄송해요!”

“됐어. 괜찮으니까 그냥 둬.”

잽싸게 바지 자락을 잡아 올린 준성이 놀란 그녀를 다독였다. 다행히 크게 덴 건 아닌 모양이었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슈트를 제대로 망쳐 놨단 사실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그래도 그럼 안 되죠! 일단 우, 우리 집에라도 가서…….”

“왜. 네가 빨아 주게?”

“뭐?”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던 수진이 그 순간 외마디 신음과 함께 휘청거렸다. 뒤따라 일어난 준성이 제 몸을 붙드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아, 난 썩었구나.

“왜 그렇게 놀라?”

“노, 놀라긴. 이건 그냥 술이 덜 깨서……!”

황급히 얼버무리긴 했지만, 준성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심각한 얼굴로 묻는다.

“그래서 일상생활은 가능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나같이 평범하고 건전한 사람한테!”

애초에 네 목소리가 너무 두근거리는 걸 어쩌라고. 그렇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면 섹시하게 들리는 게 당연하지!

‘……변태 맞네.’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좌절해 버린 수진이 뿌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준성의 얼굴이 이상하게 얄밉다.

“하여간 그때 문자 내용도 그렇고, 너 좀 그쪽으로 의심을…….”

“허, 헐? 그건 그냥 오타라고요, 오타! 상무님 때문에 긴장해서!”

“나 때문에 긴장했다고? 진짜?”

“그게 아니……. 에잇, 됐어요!”

견디다 못한 수진은 놀리듯 미소 짓는 얼굴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던져 버리곤 후다닥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남은 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곧 나른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김수진 씨, 빨아 준다면서 왜 그냥 가는데?”

“악! 진짜 변태같이 정말!”

“그러니까 빨아 주는 게 왜 변태냐고. 설명 좀 해 보시죠?”

“악! 으악! 그만! 난 그냥 응급 처치만 해 주려고 했죠! 네가 괜찮다면서요!”

“생각해 보니 별로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내 옷은 괜찮지만 많이 취한 김수진 씨가 집에도 못 들어가고 얼어 죽으면 어떡해? 걱정돼서 갈 수가 없잖아.”

“아직 11월도 안 됐는데 얼어 죽긴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집이 코앞인데! 요!”

티격태격 다투다 결국 현관 앞까지 도착했다. 보란 듯 문을 열어 보인 수진이 한 손을 들어 내저었다.

“됐죠? 안 얼어 죽을 거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가세요.”

“너무하네. 집까지 바래다줬는데 그냥 보낼 거야? 이 추운 날에?”

“그럼 이 밤중에 내가 미쳤다고 외간 남자를 내 집에 들여보냅니까?”

“매정하네, 김수진.”

“제발 좀 가라, 응?”

심장이 벌렁거려 미치겠는데 남자는 꿋꿋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도망치듯 현관에 들어서며 문을 닫으려 했을 때였다. 턱, 소리와 함께 반쯤 닫히던 문이 멈췄다. 순식간에 따라 들어온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놀란 얼굴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입술이 묻는다.

“차 한잔 주지, 누나?”

“바, 방금 마셨잖…….”

“라면이 해장에 괜찮다던데.”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넌 술도 안 마셨……!”

“좋아. 이제부터 뒤져서 나오면 한 봉지당 키스 한 번씩.”

“뭣!”

그 순간 가볍게 밀쳐진 몸이 툭, 하고 신발장에 부딪쳤다.

철컥. 그의 등 뒤로 문이 잠기고, 그녀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박스째로 나오면 어쩌나?”

자연스럽게 그녀를 두 팔에 가둔 준성이 씩 웃어 보였다.

* * *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완벽하게 제 몸을 가두고 있던 남자의 단단한 두 팔.

평생을 살아오며 주변의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을까.

아득하게 멀어졌던 감각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린 줄도 모르겠다. 넋을 잃은 채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입술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 놓을 겁니까?”

“어…… 으엉?”

뭐야. 이 바보 같은 대꾸는!

“꼭 뭔가 기대한 얼굴입니다?”

“시, 시끄러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도 못했다. 남은 술기운을 몽땅 그러모아 뻔뻔하게도 웃고 있던 남자를 확 밀쳐 내며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려 가방을 내려놓는 척 식탁을 짚고 난 후에야 간신히 뒤를 돌아보는데 그가 넉살 좋게 따라 들어오고 있다.

“뭐, 뭐야! 너 왜, 그, 그냥, 막, 들어오는 건데!”

“그럼 집까지 찾아온 친구를 차 한잔 안 주고 돌려보내려고?”

그건 내가 너를 초대했을 때의 이야기지!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먹이며 밀고 들어온 준성은 당연한 듯 들고 있던 코트까지 내밀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누추한 원룸과 자체 발광 포스를 뿜는 남자의 지나친 대비에 현기증이 난다.

아, 이 위화감은 뭐야.

“그럼 일단, 뭐 따뜻한 거라도 좀 내주시죠.”

심지어 느긋하게 다리를 꼬더니 대놓고 명령이다. 술 한 모금 안 했으면서 하는 짓은 취객 뺨을 친다.

“뭐 드실……. 커피……는 좀 그런가?”

“아무거나.”

“…….”

어쩔 수 없이 조그만 티 포트를 꺼내 찻잎을 담았다. 어색함을 못 이겨 싱크대 주변을 서성이는 동안 전기 포트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했다. 얼른 물을 따라 넣는데 의문이 생겼다.

‘난 왜 또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건데?’

그야말로 뼛속까지 노동자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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