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23화
준성의 차례가 되자마자 질문을 쏟아 내던 여직원들의 입술에서 동시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를 놓쳤음을 개탄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정작 그 사심 가득한 관심의 대상자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멋진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요. 선물은 이미 다 받은 것 같습니다.”
“……어머!”
나직한 감탄사와 함께 감동으로 가득한 눈동자들이 준성을 향했다.
아마 이 순간 그녀들의 머릿속엔 이 남자를 위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새겨졌으리라.
하여간 고단수지, 이 남자.
힐끗 준성을 훔쳐본 수진이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벌써 2차로 옮겨 온 유흥 주점이었다.
오자마자 기다란 테이블의 구석으로 숨어들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잘만 구겨져 있으면 눈에 띄지 않고 이 순간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사심 가득한 질문들로 낭비된 덕분에 남은 술잔은 어느덧 여섯 개뿐. 아직 한 잔도 먹이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남자 직원들이 서로 옆구리를 찔러 대나 싶더니, 그중 가장 어린 서 대리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혹시, 애인 있으세요?”
다시 고요해진 룸 안에서 모두의 눈은 준성의 입술을 주시했다.
“없습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하는 대답에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럼 첫사랑은 언제?”
“대학 1학년 때요. 중간고사 전이었으니 아마 4월 중순쯤 시작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쿨럭.
순간 입안에 든 액체를 뿜어낸 수진이 황급히 티슈를 들어 입을 가렸다.
“어머! 사귀셨어요? 그분이랑?”
“아니요.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어서 제가 먼저 친구 하자고 해 버렸거든요.”
“헉, 상무님씩이나 되는 분이 어떻게……. 그, 그럼 설마 짝사랑?”
“짝사랑……인 줄 알았죠. 얼마 전까진.”
“잠깐만요, 그럼 지금 그 여자분이랑 연락을 하고……!”
“잠깐잠깐! 그렇게 마구 물어보면 질문 찬스 다 날아가잖아, 여기서 스톱!”
벌떼같이 일어난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사이 준성은 느긋하게 제 앞에서 네 잔의 폭탄주를 덜어 냈다.
이제 남은 질문은 두 개.
황급히 컵의 개수를 확인한 효은이 잽싸게 선수를 쳤다.
“저기…… 혹시 이상형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웃을 때 여기, 입꼬리에 보조개 들어가는 여자요.”
꿋꿋하게 손을 들어 올린 준성이 제 입가를 가리켜 보이곤 미소를 지었다.
“예쁘거든요. 여기 들어가면.”
그의 손짓을 따라 몇몇 직원들이 홀린 듯 제 입가를 찔러 댔다. ‘보조개 들어가는 사람?’, ‘그 첫사랑이 보조개 들어가나 보다.’ 등등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미심쩍은 듯 가늘어진 나 과장의 눈이 수진을 향했다. 그 시선에 기겁한 수진은 저도 모르게 볼 안 가득 공기를 불어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질문, 없습니까? 없으면 다음 순서 지목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저 있어요! 저기…… 아직도 그분 생각하고 계신가요?”
기회만 보고 있던 막내 유리의 질문에 준성은 마지막 남은 잔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훑은 시선이 마지막에 수진의 얼굴에서 멈췄다.
잠시였지만, 눈을 마주치기엔 충분한 시간.
당혹스러움으로 떨리는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이내 술잔으로 눈을 돌렸다. 곧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죠.”
마지막 잔이 깔끔하게 그의 앞을 벗어났다.
“이제 제가 지목하면 되는 겁니까?”
10년의 역사를 가진 게임 사상 초유의 완벽한 승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김수진 씨로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녀에게는 대재앙이 떨어졌다.
* * *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던져진 첫 질문이었다.
뻔히 답을 아는 이가 있기에 없다, 라고 둘러댈 수도 없고 대답을 하지 않으면 긍정이 되는 아주 고약한 상황.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직원들 앞에서 수진은 이 술을 다 마셔 버리고 죽어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떤 질문이 나오건 입도 벙끗하지 않고 그냥 마셨다. ‘오늘은 술이 당겨서요.’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는 짓도 하지 않았다. 여덟 잔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몇 잔을 더 마신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어떻게 도착한지도 기억나지 않는 화장실에서,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와. 술독에 빠져 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영업부 직원으로 살며 웬만큼은 술에 면역이 된 거 같다 생각했는데, 연이은 폭탄주 세례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정신을 잃고도 걸을 수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그렇게 한참 숨을 돌리는데 문득 바깥이 소란해졌다.
“과장님. 제 얼굴 이상해요?”
“괜찮은데? 립은 다시 좀 발라야겠다. 내 거 좀 주련?”
“어후…… 그나저나 덥네요. 벌써 10월도 다 갔는데 왜 이리 덥죠?”
“어? 이거 엊그제 공홈에서 직구 하셨던 신상 맞죠? 색 엄청 예쁘다.”
“그치? 색은 진짜 잘빠졌는데 너무 잘 지워져서 골치야.”
나 과장과 효은. 그리고 유리까지. 익숙한 목소리들이 내놓는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괜히 찔리는 마음일까. 왠지 이대로 나가기가 힘들어졌다.
“그보다 과장님. 오늘 상무님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치? 그 첫사랑 진짜로 못 잊는 거 같던데.”
“아우, 부럽다. 대체 누굴까.”
“1학년 때 같은 학교 다녔다고 하셨으니 K대학교 출신인 건 확실하겠죠?”
“경영학과였을까? 왠지 느낌상 무용과 뭐 이런 사람 같기도 하고. 왜, K대학 무용과도 유명하잖아.”
“그러고 보니 수진 씨가 같은 학교였잖아요. 오늘 수진 씨한테만 괜히 눈길 한 번 더 주는 것도 그렇고. 설마 수진 씨가……!”
뭔가를 깨달은 걸까. 길게 이어지던 효은의 말이 뚝 끊어졌다.
왠지 긴장한 수진이 바짝 몸을 움츠렸을 때였다.
“맞네. 유리야 기억나지? 그때 수진 씨 불러낸 적 있잖아. 이거, 그 첫사랑이랑 수진 씨랑 아는 사이 아닐까? 그래서 찾아내려고 수진 씨 불러낸 거!”
“세상에! 그런 남자가 그렇게 기를 쓰고 찾는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예쁘겠지. 아니, 진짜 연예인일 수도 있고.”
“진짜 연예인이면 TV에 나올 텐데 진즉에 찾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거기다가 상무님 정도 되는 남자를 누가 거절해요? 어지간한 대스타가 아닌 이상 얼씨구나 하고 덤비고도 남았지. 그러고 보면 상무님도 남잔데. 그, 욕구는 어떻게 풀까요?”
“상무님 정도면 완전 자동으로 수급되지 않겠어? 어떻게든 연락만 할 수 있으면 아주 줄을 서서 대기할 텐데. 어우, 나도 한 번만 해 봤으면.”
“하긴 뭘 해? 위험한 소릴 하고 있네.”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틈에서 끌끌 혀를 차던 나 과장의 타박이 이어졌다.
“어차피 너희들한테는 그림의 떡이니까 신경 꺼. 은혜롭게 안구 정화하는 걸로 만족하라고.”
“하긴, 회장님 성품만 생각해도 그렇죠. 결혼 상대 같은 건 진즉에 정해졌을걸요? 생각해 봐요. 어설픈 여자랑 연애하다 애라도 생겨서 엉뚱하게 발목 잡히면 큰일이잖아요. 그런 집안은 결혼도 사업이나 다름없을 텐데.”
이죽대듯 이어지는 효은의 말을 끝으로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지만, 수진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
그런데 이 복잡한 기분은 뭘까.
서운함도 아니고, 허탈함도 아닌. 아니, 그 모든 감정에 왠지 모를 분노가 섞인 그런 느낌이었다. 대체 무엇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지금 떠오르는 사람에게라면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을 텐데.
* * *
“어이구, 우리 수진 씨가 너무 많이 취했네.”
“그러게요. 오늘 게임에서 타격이 너무 컸나?”
“어째 많이 무리한다 했더니 아주 그냥 훅 갔네.”
두런두런 이어지는 목소리에 수진은 가만히 실눈을 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비척거리며 주점을 나섰고, 살갗을 스치는 칼바람에 간신히 정신이 돌아오려는 참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이 망할 회식이 드디어 끝났구나.
“수진 씨. 정신 들어? 집에는 들어갈 수 있겠나?”
최 대리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제 옆의 누군가가 최 대리란 사실을 깨닫고서 붙잡힌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술기운 탓인지 쉽지가 않았다.
“어어, 넘어진다. 안 되겠다. 좀 쉬었다 가야겠네.”
“아니에요. 전 괜찮…….”
“어이구, 혀가 다 꼬였네. 이렇게 취해서 들여보내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일단 나랑 어디 가서 좀 쉴래?”
내가 그쪽이랑 가긴 어딜 가는데!
시꺼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리에 울컥 짜증이 치밀어 다시 팔을 뿌리치려 했을 때였다.
“김수진 씨. 괜찮습니까?”
“어? 사, 상무님!”
갑작스럽게 끼어든 준성의 목소리에 주변의 소음이 일순 잦아들었다. 뭔가 켕긴 건지 최 대리가 슬쩍 그녀의 팔을 놓았다. 그 틈에 나 과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우리 김 주임이 많이 취했나 봐요. 혼자는 조금 힘들어 보여서 데려다주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알겠습니다. 같은 방향이니까 제가 가는 길에 데려다주도록 하죠.”
“네?”
“헛?”
정작 말을 꺼낸 나 과장도, 주변 사람들도, 그녀 자신도 놀랐다. 심지어 주저 없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을 때는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달려들 하이에나 떼들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라서 더 놀랐다.
……예지몽인가?
“그럼 이만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 네, 그럼.”
“월요일 날 뵙겠습니다.”
두런두런 이어진 인사말도 멀어지고 어느덧 둘뿐이었다.
하나하나 돌아오기 시작한 감각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쯤 그의 품에 안겨 밤거리를 걸었다. 비틀거릴 때마다 억센 힘이 그녀의 몸을 당겨 올린다. 등을 가로지른 남자의 팔. 제 손목 따윈 한 줌에 쥐어 버리고도 남는 커다란 손. 좀 더 단단히 밀착된 몸에서 풍겨 오는 남자의 향.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 열기가 술기운 탓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나 괜찮…….”
뿌연 안개라도 낀 듯 좁아진 시야 바깥으로 아른아른 불빛이 쏟아졌다. 점점 더 머리가 어지러워 다리에 힘이 풀린 순간, 눈앞으로 남자의 품이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