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22화
메일을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드르륵― 하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든 수진은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며 숨을 들이켰다.
[죽는다.]
무슨 안티팬의 저주 같은 문자냐!
그러나 그 이름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어머, 박력남.
‘이럴 때가 아니잖아!’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수진이 후다닥 휴대폰에서 눈을 떼었다. 메일 보내기를 누르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광속으로 날아온 답장이 이거다.
설마 화난 건가? 정중하고 간절한 나의 사과가 설마 씨알도 안 먹힌 거야?
[미안. 방금 문자는 잊어.]
뒤이어 도착한 문자에 더 불안해졌다. 방금 전엔 정말로 화를 냈단 소리니까!
송준성이란 남자가 뭘 해도 멋진 건 사실이지만 화를 돋우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그가 의외로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걸 이미 충분히 겪지 않았던가.
갑자기 며칠 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뒤덮는 통에 수진은 진저리를 쳤다.
‘어떻게 됐어?’
‘무슨 일이에요? 대체 둘이 무슨 사이예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나 과장을 비롯한 여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를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어 댔다. 남은 정신력을 끌어모은 수진은 애써 침착하게 둘러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이제 좀 한가해지셔서 생각난 김에 들르신 거라. 실은 제가 주말 내내 휴대폰을 꺼 놓는 바람에 연락이 안 돼서 좀 걱정도 하셨고…….’
‘뭐야, 벌써 번호까지 교환한 사이?’
‘아니요! 당연히 직원 명부 보고 전화하신 거죠! 한국에 오신 지도 얼마 안 되셨잖아요. 달리 연락할 친구들도 없으니 그냥 이런저런 소식이 궁금하신 거 같았어요. 설마 상무님이 저한테 관심 있어서 불러냈을 리도 없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다.’
‘뭐, 솔직히 수진 씨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상무님 같은 남자에 비하면 어림없는 스펙이긴 하지.’
아니, 그렇게 쉽게 납득하지 말라고!
나가떨어지라고 내뱉은 말이긴 한데 이 기분은 뭐야.
키스까지 한 줄 알면 다들 거품 물겠다?
물론 그 입맞춤의 순간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일이 이 정도로 마무리된 거였지.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카페의 직원은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복도를 달릴 때 마주쳤었다. 귀신같이 주변을 파악하고 행동해 준 준성이 진심으로 고마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힌트 줬으니까, 잘 생각해 봐.’
“흐아아…….”
다시금 떠오른 말에 수진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암만 모태 솔로라도 그런 눈치는 있다. 그 뻔한 신호를 보내 놓고, 고민할 거리는 상대에게 넘겨 피를 말리는 작전인 줄 누가 모를 줄 알고?
하지만 어떡해. 던져 준 미끼를 냅다 물기엔 뒷감당이 될 상대가 아닌데!
염치없이 그런 남자를 물고 늘어지느니 그냥 여기서 비겁한 여자로 떨어져 나가는 게 백배는 나을 거다. 그래.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짧은 고통을 위해선 여기서 끊어 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전한단 말이냐.
그 얼굴을 직접 보며 말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장담하건대, 단 한 번도 면전에서 까여 본 적이 없을 사람이다. 저처럼 인생이 달린 문제가 아닌 다음에야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신박한 첫 경험을 하게 만드는 존재가 나라니.
서늘하게 굳어 갈 그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쳤다. 그대로 역풍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의사를 전해 줄 방법이 뭘까.
고민하던 수진은 나흘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행동을 개시했다. 블라블라 미사여구와 함께 심사숙고의 흔적으로 가득한 단어들이 메일 창에 나열되어 갔지만 요지는 하나뿐이었다.
‘미안, 여기서 더는 안 돼. 그러니 제발 잊어 줘.’
망상은 망상 속에 있을 때나 아름다운 법. 짝사랑이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기에 달콤한 거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녀는 별처럼 멀었던 존재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기보다 이후로 이어질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 도착한 답변이 ‘죽는다.’였다.
곧바로 도착한 사과 메시지가 다소 그녀를 안심시키긴 했지만, 바짝 졸아붙은 심장까지 원래대로 되돌리긴 역부족이었다.
띠링.
이번엔 메신저로 준성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합시다. 어디서 만날까요?]
할 말은 메일에 다 있습니다, 상무님.
[죄송해요. 그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아서요. 그냥 여기서 마무리 지으면 안 될까요?]
[싫은데.]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해!
0.5초도 안 걸린 것 같은 대답에 경악할 새도 없이 꽤 긴 메시지가 신속하게 이어졌다.
[이런 텍스트로는 어감과 감정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인데 다시 한번 말합니다. 당장 만날 장소를 정하시든지, 당장 내 사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김수진 씨.]
아니, 잘 느껴져. 당신의 딥빡침이 무지 잘 느껴지고 있다니까!
‘당장’이 무려 두 번이나 들어갔잖아!
손끝까지 얼어붙는 느낌에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화면을 주시하는 사이, 또 한 줄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네가 오시겠습니까? 내가 갈까요?]
히익!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앉았다. 모니터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대도 이거보다 놀라진 않았겠다.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수진이 문득 시계를 바라봤다.
곧 퇴근 시간. 조금만 버티면 얼추 도망은 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면 잊어 줄지도.
“좋아.”
다시 키보드 앞으로 바짝 다가앉은 수진이 손가락을 떼었다.
[제가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 같아서요. 일단 퇴근 시간이니 이야기는 차후에 하도록 하죠.]
그러니까 제발 좀 봐 달라고!
그러고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데 1분이 지나도, 3분이 지나도. 다시 5분이 지나도 답변은 오지 않았다.
반응이 없으니 도리어 불안한 심정은 뭐란 말이냐.
납득하고 넘어가 주겠다는 건지, 정말로 시간을 주겠다는 건지…….
“어? ‘상무’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아, 저 망할 상무 이사님 덕에 하도 기를 빨려서 헛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아, 신 부장님. 마침 자리에 계셨네요.”
……가 아닌 거 같다?
지독히도 익숙한 목소리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남자가 서늘하게 입가를 늘려 웃는다.
상무님. 지금 저 맘에 안 들죠?
“생각해 보니 요즘 너무 일에만 집중하느라 우리 직원분들이랑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거 같아서요. 각 부서별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 볼 생각인데, 오늘은 마침 금요일이기도 하고, 여유 시간도 있는 김에 회식 어떻습니까?”
“회식이요?”
“와! 상무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설마 이거 상무님이 쏘시나요?”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제가 확실하게 쏘. 겠. 습. 니. 다.”
저 유난히 씹어 발음하는 단어는 뭐다?
이쪽은 가슴 한복판으로 화살이 푹푹 꽂히는 기분인데 사무실은 이미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야! 상무님 최고!”
“오예―”
“대신에 한 분도 빠져선 안 됩니다.”
“어우, 이런 자리는 당연히 가야죠!”
“당연하죠!”
“자, 자― 빨리 마무리들 하자고!”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싱글벙글 입이 찢어지는 부장님은 차치하더라도 회식이라면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 가며 뒤로 빼기 바빴던 인간들이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 건데? 이러면 혼자 빠진다고 할 수도 없잖아!
“뭐 하십니까, 준비 안 하시고.”
대리석처럼 굳어 버린 그녀의 등 뒤에서 톤을 낮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이 기분 탓이면 좋으련만.
“미리 말해 두지만, 중간에 샌다거나 하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아, 들린다. 마음의 소리가.
“제가 은근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요.”
아니, 도망칠 기회 따윈 없음을 암시하는 대놓고 집요하신 포식자의 속삭임이.
* * *
“오민영 씨 요즘 ‘레스토랑 수(秀)’에다가 뭔가 심어 놨단 소문이 돌던데 누구예요?”
“헉!”
“푸핫! 표정 변하는 거 봐!”
“자, 자, 대답 못 하겠으면 마시고―”
“마신다고 끝날 거라 생각하면 그건 경기도 오산이시고―”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쭉쭉쭉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민영의 표정이 새하얗게 바랬다. 쌓여 있는 폭탄주 중에서 하나를 집어 건네는 최 대리의 표정이 음흉하기 짝이 없다. 벌써 그녀는 세 잔째 폭탄주를 비우는 중이었다.
영업부의 명물 술자리 게임 ‘공포의 스무고개’.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꽤 높은 확률로 회식 자리에 등장해 순발력 없는 직원들의 멘탈을 초토화시키는 무시무시한 게임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스무 개의 질문에 답을 하든가, 답을 못 하겠으면 술을 마시든가.
문제는 그 질문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높은 확률로 등장하는 ‘처음’ 관련 질문은 물론, 눈치코치 밥 말아 먹은 직원이 간혹 발설해 버리는 업무적인 내용, 혹은 지극히 사적이고 성(性)스러운 내용까지.
흥신소 찜 쪄 먹는 정보력을 가진 영업부의 내공을 모아 그야말로 먼지 한 톨 안 남을 때까지 대상의 신원을 털어 버리곤 했는데, 그 피해자들은 대체로 면역이 없는 어린 직원들이었다.
“자, 자, 하나 죽었으니 다시 돌리고― 돌리고―”
그렇다고 해서 노련한 3년 차 이상들에게도 만만한 게임은 아니었다. 걸리는 순간 평균 10여 회의 폭탄주 세례가 기다리고 있고, 재수 없으면 술은 술대로 마시고 비밀은 비밀대로 까발려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회식 기피 현상을 부추기는 1등 공신이지만, 수많은 논란과 타박 속에서도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게 함정.
“그럼 상무님, 신체 사이즈는요!”
“184cm 조금 넘는 거 같습니다. 몸무게는 비밀이고요.”
“어머, 어머! 대박! 딱 좋다, 정말!”
“상무님! 저기 혈액형이랑 아! 별자리 좀 알려 주세요!”
“그건 질문 두 개 아닙니까?”
“에이― 그런 건 그냥 넘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혈액형은 O형. 잘은 모르겠는데, 천칭자리 같습니다. 10월생이거든요.”
“헉! 잠깐만요, 그럼 바로 엊그제가 생신이셨던 거예요?”
“어머, 알았으면 미리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