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21화
뭔가 할 새도 없이 일어서는 모습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는데 그는 모든 게 해결된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휴대폰 배터리는 항시 체크해. 수시로 연락할 테니까.”
“저기, 아니 그게! 잠깐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저한테…….”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 무작정 따라 일어선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손길이 급했다. 순간 멈칫하나 싶던 남자가 휙 돌아서더니 갑자기 가까워졌다.
“어……?”
반사적으로 움츠린 몸이 훌쩍 끌려갔다. 허리를 감아 오는 힘과 신속하게 얼굴을 붙든 손길. 그리고 정확히 입술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에 숨이 턱하니 막혀 버렸다.
그 찰나와 같은 순간, 감지도 못한 시야에 새하얀 남자의 피부와 기다란 속눈썹이…….
한순간 저 멀리 날아갔던 영혼이 돌아옴과 동시에 심장이 벌컥거리며 피를 쏟아 냈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뭐야. 이게 뭐야?’
가까스로 단어들을 집어내려는데 좀 더 깊게 맞물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감싸 왔다. 그제야 눈을 감아 버렸다.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감촉이 입술에 비벼지고 물컹하고 따뜻한 뭔가가 느른하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훑으며 움직였다.
왠지 시간이 아득하게 길어졌다.
지나치게 가까운 남자의 얼굴에서 뜨거운 숨이 쏟아지고 있다. 감히 상상으로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성역(聖域)의 것이 집요하게 그녀의 벌어진 잇새로 침범했다.
입안을 감도는 씁쓸한 커피의 맛. 이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감촉이 그녀의 혀에 감겨듦과 동시에 머리털 끝까지 짜릿하게 일었던 전율.
‘이게 지금 설마……?’
그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 후에야 수진은 뒤늦게 소스라치며 남자의 몸을 밀쳐 냈다.
“으, 으악! 송준성 너 지, 지금…… 무슨……!”
“말도 잘 놓고.”
허겁지겁 입을 가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사이 준성은 씩 웃으며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그 와중에도 바로 코앞에서 넘실거리는 얄궂게도 매력적인 눈웃음이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왜 너냐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글쎄. 왜일까?”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굳은 그녀의 앞에서 남자는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힌트 줬으니까, 잘 생각해 봐.”
* * *
지난 주말은 그에게도 인고의 시간이었다. 문제의 메시지가 도착한 건 집 근처의 횡단보도에서 마지막 신호를 받았을 때였다.
당연히 일 관련이겠거니 생각하며 무심결에 휴대폰을 집어 떠오른 글자들을 읽다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당황하며 다시 휴대폰을 꽉 붙들자마자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차를 몰아 길가에 세웠다.
“……허.”
절로 헛웃음이 났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제가 뭘 본 건지, 그 해석이 맞는 건지. 제 눈과 머리를 의심하며 한참 동안 멍해 있다가 간신히 혼란을 누르고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려 그 내용을 확인했다. 덜컥 내려앉았던 심장이 미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좋아했었다, 라니.
지금껏 저 한마디를 듣지 못해 돌아온 세월이었다. 어떻게든 잊어 보고 지우려 애쓰며, 한편으론 무심하기만 한 그녀를 원망하기까지 했던 그 시간들을 그 한마디에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차를 돌렸다. 돌아가는 길 내내 애타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미 휴대폰은 꺼진 상태였다. 그녀의 집 앞까지 도착해서도 한참을 고민하며 망설였다. 혼자 사는 여자의 집을 예고도 없이 멋대로 들이닥치기엔 그는 지나치게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주변을 서성이다 아쉬운 마음을 꾹 접어놓은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시간이 빨리 가길 기다려 본 적이 있었을까.
미치도록 움직이지 않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월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실수로 제 감정을 오픈해 놓고 부끄러움에 몸부림치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저를 애태워 왔으니 맘고생 좀 해 봐라, 싶다가도 힘들어할 그녀가 안쓰러워 더 빨리 제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우린 쭉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그런데…….
간신히 시간을 내어 사무실에 들른 그의 앞에서 그녀로 보이는 그림자가 후다닥 숨어드는 것을 봤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뻔히 보이는 움직임을 따라 다가선 순간,
‘잠시만요. 일단 나중에 설명할게요. 저 지금은 스텔스 모드니까…….’
들리는 목소리라니.
그러니까.
……날 보고 숨었겠다?
“상무님?”
울컥한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준성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문홍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강 본부장님께서 5시에 공항으로 출발하실 예정이랍니다.”
“아…….”
초조한 듯 시계를 힐끗거리는 김 비서의 모습에 준성은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덧 석양의 햇살이 길게 번져 든 책상 위로 반듯하게 자리 잡은 결재판과 언제부터 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꾹 눌러 번진 잉크 자국을 발견한 순간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대로 사인을 마친 준성은 김 비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자료 전달하는 대로 바로 총지배인님께도 보고드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면세점 입찰 건 서류 도착하는 대로 출국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 두시고요. 기획실 회의는 돌아온 직후에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러 의미가 담긴 되물음이었다. 문홍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호텔 라비타의 면세유통사업부에서는 현재 호텔 본점 내의 면세점 신설을 위한 서울 시내 면세점 입찰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2년 전 공항 면세점 입찰 과정에서의 비리 건이 터져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특허를 받지 못했을 몇몇 사업체가 심사자를 매수해 추가 특허를 받아 냈다는 의혹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호텔 라비타 역시 1차로 탈락의 쓴맛을 봤고, 이후 낙찰이 취소된 구역에 재입찰을 시도해 기사회생한 전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어 냈음에도 가장 먼저 의혹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그때의 책임자가 바로 한정원 회장이 해외 체인 사업에 눈을 돌린 사이, 야심차게 면세 사업에 손을 뻗은 한정균 사장이었다. 누구보다 유리한 입장이었기에 그저 콩고물만 주워 먹으려 했던 게 화근이었다.
기업의 힘만 믿고 준비에 미흡했던 한 사장은 예상치 못하게 치고 올라온 경쟁 업체에게 밀려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다행히 그 업체가 지나치게 높았던 낙찰가를 다 치르지 못해 사업권을 반납했고, 그 틈을 노린 한 회장이 전면에 나서 재입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사업자 선정 비리 건이 터져 나온 게 그 무렵이었다. 전혀 관련이 없는 사안임에도 시기가 비슷한 탓에 관세청과의 유착 혐의로 더불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혐의는 금세 풀렸지만, 그런 구설수에 오른 것만으로도 몰려드는 의혹의 시선들을 피하긴 힘들었다.
덕분에 한창 상승세였던 한정균 사장의 기세가 꺾인 참이었다. 한 회장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번 시내 면세점 입찰 건부터 네가 맡아 주면 좋겠구나. 한번 실패하면 그다음은 없다는 걸 보여 줘야지. 그래야 정신 차리고 일하지 않겠니?’
이 역시 한 사장을 향한 경고였지만, 깐깐한 한 회장의 기준이 제게만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저 역시 다음 기회가 없기는 마찬가지.
모두의 관심과 기대, 혹은 적대감.
그 속에서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막중한 책임감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무엇 하나 편할 리가 없는 상황인데도 준성은 그저 평온한 얼굴로 되물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일이 너무 많으십니다. 요즘 통 잠도 못 주무시잖습니까. 시내 면세점 건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 유렵엔 내년 1월 중순쯤 다녀오셔도…….”
“제가 무리하는 것 외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네? 그건 아니지만…….”
문홍이 말끝을 흐리자 준성은 흠, 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달리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금세 눈치챈 문홍이 다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럼.”
문홍이 자리를 비운 후에야 길게 한숨을 내쉰 준성은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대앉았다.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이 피곤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준성은 잠시간 눈을 감고서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혔다.
“하여간 사람 미치게 만드는 데 뭐 있지.”
고민이나 걱정 따위완 담을 쌓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세상 무엇도 그를 흔들 만한 파괴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매사에 시큰둥하고 다소 냉소적이나, 차분히 자신의 방식을 유지하는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며 열광했다. 저 역시 그것이 자신의 최대 무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게 만들었다.
‘저기, 아니 그게! 잠깐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저한테…….’
끝내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제 옷을 잡아채는 손길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도 그 감촉이 잊히질 않는다. 하얗고 작은 여자가 품에 쏙 들어오던 순간 또한.
훌쩍 가까워진 입술에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겹쳐 버렸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하고 폭신했던 입술의 감촉과 달콤했던 숨결. 잠시 주변을 잊어버릴 만큼 짜릿하게 젖어 들었던 황홀함은 지금껏 상상해 온 그 어떤 감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젠장.”
눈을 뜬 준성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거칠게 넥타이를 당겼다. 느슨하게 풀어 놓았음에도 왠지 모를 조급함이 목을 바짝 조이는 것만 같다.
아니, 그 조급함의 원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은 금요일.
그날로부터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녀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신사답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까지 선사해 준 이 관대함에 보답은 못 할망정 사람을 초조하게나 만들 줄이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실수긴 하지만, 그녀는 제 손으로 좋아한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다소 빡침이 섞이긴 했지만, 저 역시 같은 마음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아 줬잖아.
물론…… 직접적으로 ‘널 좋아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다소의 협박성 발언들을 늘어놓았다는 것도 조금 찔리긴 하지만……. 그건 끝내 도망만 치려고 한 김수진이 잘못한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어쨌거나 키스까지 했잖아.
그쯤했으면 바보 천치라도 알아듣겠다.
띵.
그때 갑작스러운 알림 음이 들려왔다. 인트라넷을 통해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송준성 상무님께.」
발신자는 김수진.
그리고.
「죄송합니다.」
로 시작하는 메일의 전문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의 반듯한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