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20화

지난 세월이 눈앞을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마등인가.

서른 평생을 노력으로만 일궈 온 삶이었다. 꿈이 있다면,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일하다 좀 더 많은 세월이 지났을 때, 제 인생의 목표인 총지배인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당당히 그와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게 희미해져 갈 때쯤에나 ‘그런 인연도 있었지.’ 하고 편히 웃을 수 있길 바랐는데…….

‘난 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거야.’

다시금 제 손가락이 저질러 놓은 일을 떠올리니 절로 온몸이 꼬여 든다. 그 해괴한 문자를 받고 황당했을 그를 생각하니 제 얼굴에 불이 날 지경이다.

쪽팔려서 사람이 죽는다면 아마 이렇게 죽겠지.

심지어 9층에 위치한 직원용 휴게실 겸 카페테리아엔 사람이라곤 없었다. 단둘뿐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그녀는 텅 빈 카페를 보며 또 한 번 좌절했다.

정녕 도망칠 기회 따윈 없는 거냐!

“점심은 먹었지? 뭐 좀 마실래?”

“어? 어, 난 아까 마셨어……요.”

또 무심결에 반말로 대꾸할 뻔하고서 간신히 요, 자를 붙였다.

뭐지? 이 아무렇지 않게 친근한 말투는? 지금껏 깍듯했던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멀쩡한 반말이다.

“더 마시기 버거우면 다른 차로 하든가. 따뜻한 거 괜찮지?”

“아, 아니, 전 괜찮습…….”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아삼 밀크티 주세요.”

점점 불안감은 쌓여만 갔다. 분명히 괜찮다고 한 것 같은데 준성은 멋대로 주문을 넣고는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유리 너머로 비쳐 드는 진한 햇살에 흠뻑 물든 카페의 내부는 차가운 냉풍이 몰아치는 그녀의 속내와는 달리 더없이 아늑한 분위기였다.

평소엔 카운터를 포함해 두세 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고, 커피 심부름을 나온 사원들이 종종 보이는 곳인데 오늘따라 두 사람 외엔 사람 그림자도 없다.

아무리 업무 시간이라도 그렇지.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창가 자리 괜찮지?”

저 멀리 한강이 보이는 자리는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앉아 본 적이 없는 명당 중의 명당! 이지만 기뻐할 때는 아니었다. 수진은 먼저 자리에 앉는 남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해. 너 이상하다고요.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이런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진작 이렇게 시간 좀 낼 걸 그랬나 보다. 사실 너무 바빠서 영 틈이 없기도 했지만.”

화난 것처럼 보였던 게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준성이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동안 수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무지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아, 아 네.”

“둘일 때는 말 놓지?”

“네? 그, 그건 곤란합니다. 여긴 회사인데요.”

“그런가?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는데.”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원이 등장했다. 음료를 내려놓던 여직원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 얼굴을 훑는다. 순간 뭔가가 바늘처럼 후두둑, 박혀 온 듯한 느낌도 기분 탓인가? 이 소식이 10분 안에 온 회사를 휩쓸어 버릴 거란 건 내가 잘 알겠다.

“보셨죠? 어딜 가나 보는 눈이 많아서…….”

“그게 어때서? 옛 친구 사이인데 문제가 되나?”

“네.”

그건 지금 그쪽이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

정색하며 말을 자르는 대답에 준성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 황홀한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동안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커피 잔을 감아 올렸다. 아, 커피 잔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좋아. 그럼 편한 쪽으로 해. 난 그냥 말 놓을 테니까. 그보다 회사 일은 할 만해? 힘들진 않고?”

“괜찮습니다! 일도 재미있고 좋은 분들도 많고 배울 점도 많구요.”

면접장에라도 나온 기분으로 틀에 박힌 대답을 늘어놓자 그의 입가에 아까보다 뚜렷한 미소가 번졌다.

“하여간 이리저리 둘러대긴 잘하지.”

“하하…….”

정곡을 찔려 조금 부끄럽지만 대수로울 일은 아니었다. 찝찝한 인간들이 좀 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어딜 가나 그런 인간 한둘쯤은 있으니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 미래의 대표님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쓸데없는 소린 안 하느니만 못했다.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난 네가 여기서 일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거든. 진즉 알았으면…….”

“그야 뭐, 미리 진로 정해 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요. 어쩌다 보니 다 자리 잡고 사는 거죠, 뭐.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수진은 어색하게 대꾸하며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찔릴 것도 없는데 묘하게 속이 뜨끔한 탓에 자꾸 말이 헛나올 것 같다. 정신 차리자.

“……그런가? 그럼 원래부터 우리 호텔에 지망하려던 건 아니란 뜻이고?”

“네. 그냥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뭐가 재미있을까, 생각하다 오게 됐어요. 아, 물론 지금은 이 일이 좋기도 하고, 우리 호텔도 너무 좋아요.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커피 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자연스럽게 들린 얼굴엔 어느덧 살랑거리는 미소가 사라진 후였다. 굳은 눈매를 보자니 간이 졸아붙는 기분이다.

왜 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 건데. 이젠 제대로 면접관 모드인가?

“넌 어떤데?”

“네?”

“나한테 궁금한 거 뭐 없어?”

“아, 아니요! 전혀!”

대답을 해 놓고 아차, 했다.

‘완전 관심 없음’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거랑 무슨 차이야. 아무리 그래도 옛 친구인데 미쳤지!

그렇게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 그녀의 눈앞엔 사직서 양식이 잠깐 아른거렸다.

“음…… 그래? 그럼 넘어가고. 그보다 지난번 금요일 저녁에…….”

“아! 그 도시락이요! 갑자기 제가 막…… 그,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주말 내내 잠만 잤지 뭐예요. 그래서 그걸 세상에 그냥 깜빡해 버렸거든요. 그러니 그건 다음에…….”

“계속 전화했었는데 안 받더라.”

“네, 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전화도 못 받……. 네?”

“어쩔 수 없지. 뭐, 목적이 도시락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 주말은 어때? 딱히 다른 약속은 없는 거지?”

이런 질문에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말들에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동안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로 약속 잡지 마. 스케줄 봐서 연락할 테니까. 앞으로도 평일은 이렇게 잠깐 만나기밖에 못 하겠지만, 주말은 되도록 비우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좀 이르지만, 크리스마스가 두 달 정도 남았으니까. 미리 나랑 같이…….”

“저기! 자, 잠깐만요.”

당황한 수진이 얼른 손을 들어 올렸다.

주말의 데이트.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오 마이 갓!’

망상이 현실로 닥쳐온 순간은 그저 당혹스러웠다. 빤히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저, 저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 거죠?”

아니, 이딴 소리 말고!

그의 매끈했던 미간에 뚜렷하게 스며든 주름을 보며 수진은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그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죄, 죄송해요! 갑작스럽지만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그 무, 문자요! 사실은 제가 그, 도시락 싸는 걸로 뭐 좀 물어보려다가 괜히 좀 오버해서 적어 놓는다는 걸…….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장난삼아 써 본 걸 실수로 보내 버린……!”

“……실수?”

“네! 실수였어요. 기분 나쁘셨죠? 네, 알아요. 아무리 실수라도 이해 못 하실 거 다 알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그건 그냥 그렇게 잊어 주시면…… 안 될까……요?”

왠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해 절로 말꼬리가 흐려졌다. 남자는 미동조차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모호한 눈빛에 서린 의미를 당최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뭔가 제. 대. 로 잘못 건드린 것 같단 촉이……!

“하, 하하……. 저기 아무튼 지금은 업무 시간이고 하니까 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며 엉덩이를 떼려 했을 때였다.

“넌 진짜 변한 게 없구나.”

음산하리만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수진이 쭈뼛거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아니, 이번엔 더 질이 나쁘지.”

분명 미소를 짓고서 하는 말인데 눈빛과 말투는 날이 서 있다. 바짝 굳은 채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그녀의 앞에서 준성은 느긋하게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그의 입술 틈새로 스며드는 커피를 부러워할 새도 없이 잔을 내려놓은 그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잊어 달라? 어쩌지. 그럴 마음 전혀 없는데.”

“네? 무……슨 말씀이신…….”

“태어나서 그런 황당하고 열렬한 고백은 처음이라. 그래서 앞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놀아 줄 생각이거든.”

이게 대체 뭔 소리여!

기겁한 수진은 침착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 죄송하지만…… 바쁘신 분이 구,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 것 같…….”

“네가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딱 잘라 내놓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알다시피 내가 좀 바쁜 데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혼자거든. 휴일에 혼자 지내긴 싫고, 이제 와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 만나 공들이는 것도 시간 아까워. 난 시간 낭비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질색인 사람이니까 당분간은 착실하게, 내가 부를 때 잘 나타나 주길 바라.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무조건.”

“…….”

“절대로 내 연락 무시하는 일은 없도록 해. 참고로, 난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 특히, 어제처럼 휴대폰 꺼 놓는 일은 더 못 참고.”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눈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은 분명 제가 알던 그 송준성이 맞는데……. 설핏 떠오르는 웃음도, 한껏 날이 선 눈빛도, 머릿속을 울리는 단어들의 조합도 흉흉하기 짝이 없다.

너 이렇게 박력 넘치는 남자였니?

“내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거나, 후환이 두렵지 않다면 상관없지만.”

거기다 말끝에 어린 협박이라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쳐 버리겠다는 투다. 이거야말로 슈퍼갑의 횡포 아닌가!

“그, 그럴 순 없습니다. 아무리 상무님 명령이어도 그런 사적인 일에는……!”

“참, 그 젖꽃이라는 거 어디서 피는 거야?”

“아니, 지금 그 젖꽃이 문제……. 네?”

그 민망한 단어를 직접 입에 올리니 참 새롭다.

순식간에 시뻘게진 그녀의 앞에서 그는 참으로 해사하게도 웃어 보였다.

“궁금해서 열심히 검색해 봤는데 없더라.”

뭐 이런 미친!

경악한 수진이 휴대폰을 집어 들어 메시지 창을 열고 다시 그를 향해 화면을 내보였다.

“그게 아니라, 보세요! 이건 그냥 이렇게 붙어 있는 글자라서 단순히 오타를……!”

“그럼 바쁘니 이만 일어서자.”

아니, 설명은 좀 들어 달라고. 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설명 좀 하고 싶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