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19화
더욱이 괴로운 건 그렇게 피해를 당하는 저를 벌레라도 보듯 구경하는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이었다. 아이들은 어린만큼 잔혹했다. 잠자리 날개 뜯는 걸 구경하듯, 즐거움 가득한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들에겐 이 모든 게 말 그대로 놀이일 뿐이었다. 마치 경쟁하듯 누가 더 그녀를 괴롭히느냐로 웃고 떠들어 댔다.
열심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그 모두를 절묘하게 조종하는 인경의 표독스러움이 아니었더라도 그녀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한번 가장 약한 존재로 낙인찍힌 이상, 그녀는 모두의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이 모든 걸 견뎌 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알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몇 개월 후면 졸업이었다. 이 아이들이 없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날 거라 믿으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작스럽게 미연이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딱딱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앞에서 미연은 눈물을 글썽였다.
‘미안해. 그때 전화했던 거…… 실은 나랑 인경이가 인경이네 오빠 시켜서 한 거였어.’
‘뭐?’
‘현성이가 널 좋아한대. 근데 너도 현성이 마음에 든다며. 나도 현성이 좋아했는데……. 너랑 현성이랑 사귀어 버리면 내가 끼어들 틈이 없잖아. 그래서 그냥 너랑 현성이랑 사이만 좀 어색해졌으면 싶어서 도와줬던 건데……. 인경이가 너 꼴 보기 싫다고. 너랑 놀면 다음엔 날 따 시킨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너무도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배신의 이유가 고작 그것이라니.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무서웠다고, 나도. 아무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미워하지 마.’
차라리 말이라도 말지.
너무도 허탈해 눈물만 났다. 그런 그녀보다 더 서럽게 울던 미연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그녀 가슴에 대못만을 박아 놓고서 홀가분하게 떠나 버렸다. 정작 그녀가 받아야 했던 상처는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얻은 것이라곤 뼈아픈 교훈뿐이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타인을 음해할 수 있는 거구나. 그렇게 쉽게 타인의 믿음을 배신할 수도 있구나. 질투라는 감정 앞에 우정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한때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함께 있을 땐 멀쩡히 웃고 떠들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미련 없이 혼자만의 세계로 돌아오곤 했다. 천성이 모질지 못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렇게 다가온 그들조차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금세 흥미를 잃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생긴 별명이 철벽이었다. 그녀도 많은 사람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제 평가를 모를 리 없었다.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냥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예의를 갖추고, 해야 할 말만 하며 살면 되는 거다. 다시 우정이니 사랑이니 하는 감정을 나누다 배신당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누군가를 제 영역에 들이는 일만큼 어려운 건 없었다. 아니, 그녀는 그 과정과 끝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 벽을 처음으로 깨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 연희였다.
‘아, 잠깐. 너 이름이 뭐더라. 암튼 수석 입학! 맞지?’
입학하고 나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마침 잘 만났다. 내가 혼자선 밥을 못 먹는 병이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 점심 같이 먹으면 안 될까? 내가 아무리 혼자 잘 노는 사람이라도 밥 먹을 때 혼자인 것만큼은 좀 힘들더라. 너도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서로 좀 돕자고. 응?’
거침없이 속엣말을 내놓고 태양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던 얼굴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했다.
‘아, 생각났다, 이름. 김수진이었지? 난 연희라고 해. 이연희.’
이름을 말해 주기 전부터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170cm가 훌쩍 넘는 키에 늘씬한 체격. 조막만 한 얼굴에 꽉 들어찬 이목구비. 빅토리아 시크릿 무대에 세워도 부족함 없는 핫 바디의 소유자인 연희는 준성과 더불어 진즉에 교내의 유명 인사로 통했다.
‘우리 학교 학식이 그렇게 끝내준대. 오늘은 그것 좀 먹어 보자. 뭐 해? 빨리 가자. 늦겠어.’
연희는 머뭇거리는 그녀를 서슴없이 잡아끌며 당당히 교내 식당으로 향했다. 뭔가 낯선 사람을 향한 거부감이 생겨날 새도 없이 순식간에 휩쓸려 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과 함께하면 피곤한 일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지금껏 친구가 없었던 건, 그저 잘 맞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라는 연희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 조건 없이 서로의 진심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우정도 세상엔 존재했다. 그리고 시간과 우정의 크기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사느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우정은 쭉 지속되는 중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 말이야. 준성이라고.’
그런데 또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줄이야.
그때는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다.
아니, 절대로 연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엉뚱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을지언정 연희와 연적이 되는 일만큼은 겪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말 그대로 관심뿐이었는지 연희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시금 위축되어 버린 그녀는 이후로도 제 마음을 숨기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간신히 긁어모았던 마지막 용기마저 준성의 눈앞에서 흩날리는 먼지가 되는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누구에게나 솔직할 필요는 없는 거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 봐야 결과는 제 약점만 보여 주는 것밖에 없지 않나.
더더군다나 사회에선 제 본모습을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다. 할 말은 하되, 능구렁이처럼 제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이 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고, 지금껏 살아남아 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혹시 알아? 너의 길고 길었던 짝사랑이 이제야 꽃을 피울지.’
한참 동안 꺼진 휴대폰을 노려보던 수진의 입가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누굴 놀리나. 이 날씨에 꽃은 무슨 꽃.”
얼어 죽기 딱 좋지. 휑하니 부는 바람 속에서 부실하게 핀 채 다 죽어 가는 꽃을 떠올리던 수진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마 준성의 앞에 선 제 꼴이 딱 그렇겠지.
그것보다 문제는 그 말도 안 되는 문자와 끔찍한 오타였다.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화르륵 타오른다.
세상에. 그런 문자를 보내 놓고, 연애는 무슨 개뿔이 연애야.
“아…… 창피해서 죽어 버릴 거 같아.”
대체 ‘ㅂ’ 옆에 ‘ㅈ’은 왜 붙어 있었던 거니? 누가 너희들을 그렇게 붙여 준 건데?
누군진 모르겠지만 3대가 저주받았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이 망할 머리통은 벚꽃이 왜 보고 싶었던 거냐고!
괴로움에 못 이겨 발버둥을 치다 맞붙은 책상이 흔들리자 파티션 너머로 최 대리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왜 그래? 수진 씨 무슨 일 있어?”
“네? 무슨 일은요. 아니에요.”
“그런데 뭐야. 왜 이렇게 거칠게 숨 쉬고 그래? 야한 생각이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거 성희롱이다, 이 망할 놈아!
당당하게 외쳐 주고 싶은데 목에선 왜 염소 소리가 나와? 괜히 더 울컥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때마침 옆을 지나던 나 과장이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머, 상무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지?”
순간, 나비처럼 날아간 몸이 벌처럼 최 대리의 책상 앞에 처박혔다. 보는 이는 물론, 저 자신조차 놀랄 만큼 빠른 반응이었다.
“뭐야? 왜 그래?”
“쉬, 쉬잇―”
몸을 낮추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말에 수진은 얼른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왠지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던 최 대리가 곧 징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였다.
“김 주임. 갑자기 이렇게 다가오면 내가…… 허헛, 참. 이런 장난도 칠 줄 알고. 은근 귀여운 데가 있네?”
아니, 됐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닥쳐!
버럭 외쳐 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 낸 수진이 애써 웃으며 다시 입가에 손가락을 세웠다.
“잠시만요. 일단 나중에 설명할게요. 저 지금은 스텔스 모드니까…….”
“스텔스 모드가 뭡니까?”
그런데 등 뒤에서 낯이 익은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들려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목소리가.
끼기긱―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보자 언제 온 건지 준성이 서늘한 기운을 옴팡지게 뿜어 대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요, 김수진 씨.”
단단히 굳은 눈매와 묘하게 다정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절대, 이대로 나가선 안 될 것 같다는 촉이 온다.
“저, 저는 지금 무지 바, 바빠서요. 여기서 이야기하시면 안 될까요?”
“그래요? 곤란하실 텐데.”
“제가 고, 곤란할 일이 뭐가…….”
그 순간, 준성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떠올랐다.
“묘한 이름의 꽃에 대해 설명 좀 듣고 싶은데, 여기서 괜찮겠습니까?”
“있지요! 암요! 여기선 무지 곤란해요, 네! 갑니다.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하하!”
기함하며 일어선 순간,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암전이 내렸다. 아, 맞다. 여긴 회사였지.
‘흐흐흐흐…… 나 어떡해, 엄마.’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물은 왜 나는 거죠?
왜죠?
* * *
‘어떡하지?’
덧없는 질문이 텅 빈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요즘 들어 저 질문을 너무 자주 하다 보니 뇌가 식상해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숙인 채 비척거리다 문득 눈앞을 흘깃거렸다. 적당히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찌르르하다. 그 와중에도 눈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좇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우아하고 날렵한 걸음걸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감색의 슈트 차림과 먼지 하나 없이 번쩍이는 구두. 단정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의 조화는 그야말로 아찔한 뒤태 그 자체였다. 최 대리로 인해 더러워진 시신경이 깔끔하게 정화된다. 이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름 모를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저 온몸에서 폴폴 풍겨 대는 냉기만 아니었다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움찔하며 피해 대는 게 그야말로 빙하를 가르는 쇄빙선이 따로 없다. 우연히 가는 길이 겹치는 양 거리를 두고 따르는 것만도 벅차 황새를 뒤쫓는 뱁새의 심정을 너무 잘 알 것 같다.
‘이번엔 진짜 화났구나.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