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18화
공채로 입사한 직원은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2년까지, 객실부와 식음료부 등지를 돌며 경험을 쌓게 된다. 그녀 역시 객실부에서만 2년을 일했고 연회부와 식음료부에서 1년을 더 머물러 있었다. 좀 더 많은 분야의 일을 배우고 싶었기에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비스업인 호텔리어들이 겪는 일이란 멀쩡한 사람도 화병으로 나가떨어지게 만들 정도였다. 그 갑질의 현장을 글로 쓰자면 두꺼운 일기장 수십 권은 족히 들어갈지 모른다. 최 대리의 뻔뻔한 부탁 따윈 그 앞에 대면 귀여울 뿐이었다.
꾹꾹 참다못해 뇌리에 참을 인 자를 새기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백 오피스에 진입했고, 1년 반 만에 주임을 달며 제 원대한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만두냐고!
“난 이 호텔에 뼈를 묻어야 해. 절대 포기 못 한다고.”
씩씩거리는 수진을 바라보며 웃던 수혁이 문득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까지 이 호텔에 목을 매는 이유가 제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도 본인은 전혀 아니라고만 생각하니 그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 뭐 답은 하나네. 그냥 그거 진심이라고 고백해.”
“지금 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니?”
“왜 꼭 차일 거라고 생각하냐? 혹시 모르잖아. 거기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은근 너한테 마음 있는 것처럼 느낀 적 없냐?”
“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정색하는 반응에 수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너야말로 생각해 봐. 네가 준성이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눈에 차겠어?”
환장하겠네.
수혁은 진심으로 준성이 불쌍해졌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눈만 끔뻑이는 이 여자한테 힌트라도 줘야 제 속이 덜 답답할 것 같다.
“솔직히 준성이 같은 조건이면 그래, 여자 한둘쯤은 우습긴 하겠지. 너한테 말한 적은 없다만 그때 네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 귀찮게 구는 여자들도 많아서 진짜 골치 아팠거든. 근데 그런 놈이, 그 많은 여자는 상종도 않고 굳이 한 여자랑만 친구로 지낸 이유는 뭐라 생각해?”
“그야 공부에 도움 되니까. 나만큼 도움 되는 친구는 없잖아.”
“…….”
그래. 수석 입학자에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결국 수석 졸업까지 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도움은 됐겠지. 그 송준성이 인정한 천재인데 어련할까.
그래도 그렇게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할 이야긴 아니지 않냐.
뿌듯하게 미소까지 짓는 얼굴을 보자니 식도에 고구마가 백 개쯤 낀 것 같다. 수혁은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수진의 철벽을 실감하며 작게 신음했다.
“그리고 딱히 나한테만 잘해 준 것도 아니었다고. 왜 알잖아. 준성이는 원래 사람 좋은 거.”
“그건 아닐걸? 준성이 성질이 얼마나 드러……. 아니, 부드러워 보이긴 하지. 어쨌거나 겉보기엔 젠틀한 거 맞는데, 후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으니 그만해야겠다.
“어쨌거나 그 긴 세월이 지났어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만 알아 둬. 남자는 그러기가 쉽지 않아. 더군다나 송준성 같은 사람한테 친구로 인정받는 건 남녀를 떠나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
“혹시 알아? 너의 길고 길었던 짝사랑이 이제야 꽃을 피울지.”
아주 그럴듯하게 들려온 말이었지만, 현실적인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 설령 준성이가 정말로 날 특별하게 생각했대도 우리가 이뤄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애초에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인데 뭐. 그리고 너 우리 회장님 어떤 분인지 알잖아.”
우아한 외모와 강직한 성품은 물론, 뼈대 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해 왔다는 친정 집안의 이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는 한 회장이었다. 언론 매체에서 비치는 행보와 간혹 멀리서 보게 되는 모습만으로도 그 압도적인 아우라는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다.
게다가 많은 여성 기업인의 최종 목표이자 우상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한정원 회장에게는 몰래 붙여진 별명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시어머니 종결자(終結者).’
한 여초 사이트에서 우스개로 실시한 ‘가장 무서운 시어머니’ 어워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후 생겨난 별칭이었다.
물론 그녀의 세 아들이 모두 미혼인 관계로 실제는 어떤지 소문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어떤 시어머니가 될지는 충분히 유추하고도 남았다. 아마 저처럼 기가 약한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겠지.
“어…… 그래. 그건 좀 신경 쓰일 만하다.”
다행히 수혁은 여자들만의 고민까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래서 결혼까지 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왜 결론은 이쪽이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래. 네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겠고, 그 심정 이해도 가. 그런데 좋아하잖아. 그렇게 미련이 남아서 지금까지 연애도 못 한 주제에 뭘 그리 망설여?”
“그런 거 아니…….”
“아니긴 뭐가? 어차피 인생 한 번뿐인데 뭐 어떠냐고. 어차피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면 그냥 확 저질러 보고 후회해.”
“…….”
“그리고 끝나면 이쪽도 좀 봐 주고.”
“…….”
“결과는 이 오빠한테 꼭 보고해라.”
* *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썩 평온한 인생은 아니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아버지와 전업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 밝고 솔직한 성격과 예쁘장한 외모로 누구보다 눈에 띄던 아이. 주변은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해서 학창 시절엔 쭉 반장 부반장을 맡아 온 아이.
그렇게 누가 봐도 무난해야 할 그녀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부터였다.
― 나 현성인데,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우리 짝꿍 할래?
난데없이 걸려 왔던 한 통의 전화가 그 시작이었다. 어린 마음에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친구와 짝이 된다는 게 그때는 그저 기뻤다.
‘야! 수진이 니가 왜 여기 앉아 있어? 여기 내 자린데?’
‘현성아! 얘 뭐냐? 너 여자랑 짝꿍 하게?’
‘야! 너 뭐야? 누구 맘대로 거기 앉으래?’
그런데 다음 날, 수진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함을 질러 대는 현성과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아이들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봐야 했다.
‘수진이가― 현성이― 좋아한대요―’
‘사귄대―요, 사귄대―요.’
‘시끄러! 니들 조용히 안 해? 아이 씨! 야! 김수진, 너 빨리 안 꺼져?’
당황한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진실은 확인해야 했다.
‘현성이 너 뭐야? 네가 어제 전화했잖아. 나더러 친하게 지내자고 해 놓고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
차분히 따지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현성에게로 쏠렸다. 오오, 우와, 진짜? 놀람 반 장난 반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들려오자 현성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너한테 전화를 해?’
‘어제저녁 8시쯤에 전화해서 우리 엄마한테 나 바꿔 달라고 했잖…….’
‘아 시끄러! 나 너희 집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왜 거짓말이야! 너 씨, 앞으로 내 옆에 오기만 해 봐, 죽었어!’
그 순간 말문이 막힌 수진이 입을 다물자 구경하던 아이들의 눈에도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전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자 반장까지 맡고 있는 수진이 거짓말쟁이라니. 아이들에겐 이것보다 기막히고 흥미로운 사건은 없었다.
‘와, 김수진 이제 거짓말까지.’
‘몰랐어? 쟤 원래 남자들 앞에서만 얌전한 척하잖아. 완전 백여시라니까.’
‘그러게.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지금까지 그럼 착한 척했던 거야? 완전 대박.’
원래 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등 뒤로 키득거리는 말들과 미묘한 눈길들이 오갔다. 멋대로 부풀려 내뱉는 말들이라는 건 자명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정정하거나 두둔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녀를 편들어 줄 사람은 아직 이 자리에 없었다.
‘야, 김미연. 왜 이제 와?’
기다리던 이름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수진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왜, 무슨 일 있어?’
‘수진이가 현성이 좋아한대! 너 알고 있었어?’
그 순간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미연은 저와 같은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사는 친구로 유치원 시절부터 함께한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그러니 그녀라면 당연히 억울한 제 편을 들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던 미연은 이내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푹 수그리곤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어, 알아.’
‘야아, 내가 언제…….’
‘왜, 수진이 네가 그랬잖아. 우리 반에서 현성이가 제일 좋고 멋있다고. 친해지고 싶다고.’
분명 일주일 전쯤,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다. 자신은 축구부의 윤호가 좋다며 그녀에게도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지를 묻기에 유독 제게 친근하게 굴던 현성을 떠올리며 했던 말이었다.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뭐야 또, 또 거짓말하려고! 방금도 거짓말한 거 들켰으면서.’
‘파하핫! 김수진 완전 구라쟁이였네!’
멋대로 지껄여 대는 아이들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술을 깨문 채 미연을 바라보던 수진은 그대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교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깔깔거리며 놀려 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한동안은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생각조차 못 한 상황에 며칠간 열병까지 앓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 부반장이었던 인경이라는 아이가 현성을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수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꼬리를 친 불여우가 된 것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려 애를 썼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그녀를 비웃고 경멸하는 목소리만 더 커져 갔다.
그녀의 아침은 책상의 낙서를 지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실내화가 없어지고, 교과서는 종종 쓰레기통에 들어 있었다. 제 물건이 없어져 찾다 보면 교실 어딘가에 짓밟혀 있는 걸 발견하기 일쑤였다. 짝을 바꿀 때가 되면 아무도 그녀의 옆에 앉지 않으려 하는 통에 선생님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짓곤 했다.
반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쩌다 전달 사항이 있어 나서게 되면 여자아이들은 합창하듯 ‘재수 없어. 토 나와. 꺼져.’ 따위를 외쳐 입을 다물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지나가는 그녀의 발을 걸거나 몰래 밀쳐 넘어뜨리고 웃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