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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7화

아, 이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이냐!

너무나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내린 수진은 이어 뒤따라 내린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만…….”

“…….”

후다닥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내내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그가 불쑥 손을 뻗었다. 언제 들고 내렸는지 커다란 손이 쇼핑백을 쥐고 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상황인지 몰라 바라보고만 있자, 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당장 받지 않으면 큰 후환이 닥쳐올 것 같아 후다닥 그 물건을 받아 들었을 때였다.

“내일 뭐 합니까?”

“네?”

잠시간 그가 뭘 물어보는 건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되물으며 바라보자, 그는 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하듯 눈짓을 했다.

설마 제 일정을 묻는 건 아닐 테지……라곤 생각하지만, 도무지 그것 외에 다른 경우의 수는 떠올릴 수가 없다. 갑자기 심장이 벌떡거리며 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억누른 수진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 뭐. 딱히 별일은 없으니까 아마 종일 집에서 쉴 거 같은…….”

“잘됐네요. 그럼 다음 주 식사 약속은 취소하죠. 대신에 도시락 좀 싸 오세요.”

“네?”

이건 또 무슨 발상의 전환이세요?

보통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면 열에 아홉은 데이트 약속 아닌가?

“월요일 점심시간에 내 집무실로 오면 됩니다. 그럼 다시 연락하죠.”

“아니, 지금 저기 자, 잠깐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고!

요상한 미션을 선사한 준성은 황망하게 굳은 그녀를 두고 휙 돌아서더니 그대로 차에 올라 더 지체도 않고 가 버렸다.

이게 바로 김칫국이나 마신다는 거구나. 심지어 김칫국을 목에 넘길 새도 없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뱉어 낸 꼴이다.

“허…….”

벙찐 얼굴로 멀뚱히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서 있던 수진이 뒤늦게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으로 눈을 돌렸다. 심플한 쇼핑백에 담긴 물건이 영 심상치 않다.

<모두은행 ㅇㅇ지점 오픈 기념>

이 낯이 익은 텍스트가 떡하니 적힌 반찬 통은 뭐다?

“이건 수혁이한테 줬던 건데?”

대략 열흘쯤 전, 본가의 어머니가 보내 주신 김치와 제가 만든 밑반찬을 바리바리 챙겨 준 기억이 난다. 돌려받을 때가 된 것도 맞는데……. 이게 왜 준성을 통해 온 거야?

“아직 다 먹지도 않았네. 대체 이걸 왜…….”

거기다 다른 밑반찬 통은 또 어쨌고.

아, 왠지 더 생각하기조차 귀찮을 만큼 피곤이 밀려든다. 그냥 빨리 집에 들어가 눕고만 싶다.

도어록을 해제하고 문을 열자 작은 원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비척거리며 안에 들어선 수진은 들고 온 짐을 내려놓자마자 침대로 엎어졌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폭신한 침구에 얼굴을 파묻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기가 빨린다는 건가.

“너무 당황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잖아.”

모처럼 퇴근길을 함께했는데 이러기 있냐. 제 새가슴이 유독 원망스러운 날이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몸을 뒤집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첩을 열자 언젠가 찍어 둔 그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찼다. 며칠 전, 그의 집무실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하, 진짜 무슨 사람이 이렇게 생겼니? 대체 전생에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얼굴로 태어나는 건데. 이러니 보는 사람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지.”

무심결에 중얼거리곤 피식 웃어 버렸다. 황망했던 감정도, 온몸이 찌들도록 밀려들던 피곤함도 이 얼굴을 보는 순간 사라지는 기분이니 이것도 병인 듯하다.

“대체 어쩌려고 이래.”

절대 욕심을 부릴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미 들떠 버린 감정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큰일이다. 멀뚱히 화면만을 바라보던 수진이 그의 이름을 호출해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나저나 얘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취향은 알 수가 없으니 물어봐야지. 핑계 대듯 중얼거렸지만,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뭐. 지금은 운전 중일 테니까. 내일쯤 마음이 진정된 후에 물어봐도 되겠지.

그렇게 스스로 변명하면서도 뭔가 아쉽다. 창을 덮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나 생각보다 널 많이 좋아했었나 봐. 많이 보고 싶고 궁금했어.]

아마도 평생 전하기 힘든 말이겠지.

“알아 나도.”

그때도 닿지 못했던 마음인데 미련을 가져 봤자 부질없다는 것도.

그래도 한 번쯤은 상상해 볼 수도 있는 거잖아. 만약, 신이 진짜로 있어서 간절한 소망을 꼭 하나 들어준다면 어떨까. 이런 상상 정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옆에 있고 싶다.”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그를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손끝에 닿는 감촉은 또 어떨까.

그 잘생긴 얼굴을 마주 보다 너른 품 안에 폭 안긴다면.

단단한 팔뚝이 몸을 휘감고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쓰다듬는다면.

보기 좋게 쭉 뻗은 손가락이 제 뺨에 닿고,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을 바라보다 조금 열기가 깃든 음성으로 제 이름을 불러 준다면…….

‘수진아.’

“흐읍.”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위험하다, 위험해. 상상만으로도 협심증이 밀려오는 것 같다.

“하아, 네가 내 심장에 좋지 않은 존재란 건 확실해.”

그 반듯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한 남자를 상대로 뭔 상상이야.

고개를 저으며 뒷골까지 아찔했던 못된 상상들을 날려 보낸 수진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능하다면, 예전처럼 함께하고 싶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떠들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만큼 자주 얼굴을 보던 사이였다.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도 함께 못 했었구나.”

그해 겨울은 내내 지독히 가슴앓이를 했었다. 실연의 아픔이라 하기엔 너무도 하찮게 헤어진 터라 어디다 말도 하지 못하고 홀로 앓아야 했다. 그 아픔은 다음 해 봄. 이른 벚꽃이 피는 시기까지 이어졌었다.

그렇게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삼킨 아쉬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깊게 곪아 흔적을 남겼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외로움이 솟구쳤다. 어째선지 그 이유를 잊고 살다, 어느 해의 연말. 수혁의 앞에서 무심코 이 감정을 토해 놓고서야 깨달았다.

그를 아주 많이 좋아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이별의 상처가 너무 컸던 것 같다고.

그래서 가능하다면 그 위로 새로운 기억을 덮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풍경 속에 그가 함께했으면 싶었다. 쌀쌀함이 남은 봄날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함께 보고 싶었다.

따뜻한 캔 커피 하나씩을 주머니에 담아 둔 채 나란히 벚꽃 비가 내리는 길을 걷다 어느 순간, 그가 다정히 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싱긋 미소를 보인다면…….

“와, 김수진 너 꿈도 야무지다!”

상대는 무려 회장님 아들인데 그런 서민 데이트가 가당키나 해?

턱도 없는 망상에 헛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쾅!

“엄맛!”

느닷없이 현관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소스라쳤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휴대폰이 침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뭐, 뭐야?”

누군가 지나가다 부딪치기라도 한 건가. 잠시간 멍하니 현관을 바라보던 수진이 문득 뭔가를 깨닫고 황급히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어느 순간 밀려든 섬뜩한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

설마.

“……헉!”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있어서는 안 되는 문자 발송 내용이 둥실 떠 있다.

[나 생각보다 널 많이 좋아했었나 봐. 많이 보고 싶고 궁금했어. 사실은 다시 네 곁에 있고 싶은데 힘들겠지?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주말엔 데이트도 하고. 이번 크리스마스도 너랑 같이 지내면 좋겠어. 지금의 넌 뭘 좋아할까? 돌아오는 봄엔 맛있게 도시락 싸서 같이 젖꽃놀이라도 가고 싶ㅍㅍ]

게다가.

[돌아오는 봄엔 맛있게 도시락 싸서 같이 젖꽃놀이라도 가고 싶ㅍㅍ]

뭔…… 꽃?

“꺄아악!”

오, 지저스!

도저히 수습 불가.

* * *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제 마음이 알려지는 것만큼 곤란한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새드 엔딩이 될 게 뻔한 상황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일 1순위가 아닌가!

도전하는 자가 아름답고 아프니까 청춘인 것도 다 남의 일일 때나 해 줄 수 있는 말일 뿐. 현실은 기약 없는 답을 기다리게 되거나, 혹은 처절하게 차이거나. 그 끔직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고통당하는 것도 결국 당사자의 몫이다.

한마디로 제 일이 아니니 그렇게 말하고 웃을 수 있는 거지.

“그래서. 굳이 이 시간에, 느닷없이 날 불러내서 VIP 룸까지 차지하고 앉아 있는 이유는?”

얼음이 가득 든 물컵을 툭 내려놓은 수혁이 팔짱을 꼈다. 멀쩡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은 채 굳어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1분 전까진 죄 없는 테이블을 이마로 찧고 있었던 건 덤이고.

“머릿속 조용해지면 A4 용지 50장 꽉꽉 채워서 써 줄 테니까, 지금은 나 좀 그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니?”

“흠, 그냥 둬도 될 상황은 아닌 거 같다만?”

“……그렇게 걱정 안 해 줘도 돼. 이건 시간이 약이야.”

“내가 걱정하는 건 네 이마에 상처 입을 비싼 테이블이랑, 영업시간 다 됐는데 아직 청소도 못 하고 밖에서 발 동동 구르는 불쌍한 우리 직원이거든? 클럽 물 버리지 말고 다 쉬었으면 빨리 가 봐.”

“뭐래, 진짜!”

발끈하며 몸을 일으키자 시선을 맞추던 수혁이 키득거리며 웃어 댔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앓느니 죽지. 끓는 속을 삭이듯 숨을 내쉰 수진은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힌 잔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래서 준성이 연락은 왔어?”

“연락은 무슨 개뿔!”

주말 내내 꺼진 휴대폰을 서랍에 처박아 놓고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이불을 둘러쓴 채 틈나는 대로 걷어차는 것도 지칠 땐 내리 잠을 잤다.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그러고서 간신히 출근한 월요일이었다. 외근을 핑계로 30분째 클럽 라비타의 VIP 룸을 굳건히 차지하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출근은 했다. 그녀의 사전에 결근이란 없으니까. 비록, 직접 준성을 마주칠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무려 10년 전에 알던 사이라고. 아, 정말! 이대로라면 내가 10년이나 좋아한 줄 알 텐데! 이거 완전 스토커 같지 않아?”

차마 아니라곤 못 해 주는 수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스토커는 아니더라도 저렇게 미련한 여자가 세상에 또 없으리란 건 잘 알겠다.

“어떡하지? 아! 성형하고 개명해 버릴까? 어떻게 생각해?”

“그냥 거길 때려치우는 게 빠르지 싶은데.”

“무슨 소리야! 이게 어떻게 들어온 자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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