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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6화

“관심 없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막상 같이 지내보니까 마음이 그게 아니더라고. 예쁘지, 능력 있지, 거기다 착하기까지 하고. 그 학벌에 그 직장에 그 외모면 헛바람 좀 들이켜고 살 만도 한데 묘하게 결벽증인 게 더 끌려서 말이야.”

“…….”

“하긴 뭐,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트라우마도 생길 만하지.”

“그런 일?”

“아, 넌 몰랐어? 어쩌나, 이걸 말해 줘도 되나 모르겠네. 수진이한테는 큰 상처인데…….”

“장난하지 말고 말해.”

능청스럽게 돌리는 말을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잘라 낸다. 더 놀려 볼까 싶던 수혁은 짐짓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색하긴. 별건 아니야. 초등학생 땐가 같은 반 친구가 좋아했던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놈이 하필 자기한테 관심 보이는 바람에 아주 여자애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됐었나 봐.”

“설마…….”

“응. 제대로 왕따 당한 거지. 엄청나게 시달린 모양이야. 거기다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까지 당했으니 오죽했겠어. 쯧……. 꼼짝없이 당했을 거 생각할 때마다 내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다니까. 그 후로는 뭐, 사람도 못 믿겠고, 이런 일로 관심받는 것도 싫고. 이래저래 훌륭한 연애 고자가 되셨다, 이런 이야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떠오르는 질문을 애써 눌러 참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가 된 것 같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지고 들어가는 듯한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묵묵히 돌아서자 수혁이 피식 웃었다. 아직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도로 내려 둔 채 어슬렁거리며 뒤따르는 걸음이 즐겁다.

여전히 냉정한 놈 같으니.

그래서 더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건 알기나 할까.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하던 수혁이 짐짓 키득거리며 물었다.

“으, 속 쓰려. 너도 라면 먹을래?”

“아니. 됐어.”

“하긴 도련님이 컵라면의 맛을 알기나 하겠냐.”

이런 고급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놈이 누구더러 도련님이래.

어이가 없어 돌아보니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젖힌 수혁이 중얼거렸다.

“오, 아직 수진이표 반찬이 남았네.”

“뭐?”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린 수혁이 보란 듯 조그만 반찬 통을 꺼내 놓고선 능숙하게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우리 수진이가 또 요리를 기똥차게 잘하거든. 덕분에 신세 지고 있다.”

물론 그중 반이 협박해서 뺏어 오는 거란 건 비밀이지만.

성큼성큼 다가온 준성이 살벌하게 굳은 얼굴로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태도에 내가 조금 심했나 싶어 찔끔했을 때였다.

“내놔.”

“뭘?”

“그거.”

준성이 진지한 얼굴로 반찬 통을 가리켰다.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뭐, 이거? 안 되지. 우리 수진이가 날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어 준 거잖아. 그걸 다른 사람한테 줘 봐. 얼마나 섭섭해하겠어?”

“…….”

“아니면 너도 달라고 해 보든가. 해 줄진 모르겠다만.”

준성의 표정이 굳어 갈수록 수혁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정말 이 맛에 놀려 먹는다니까.

언제나 냉정하고 차분한 준성을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화제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하나뿐이다. 피식거리며 더 놀릴 건수를 찾던 수혁이 문득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전화가 걸려 온 참이다.

“준영이 형이네. 잠깐……. 어, 형. 네. 지금 막 일어났어요.”

키득거리며 휴대폰을 집어 든 수혁이 잠시 주방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수혁은 텅 빈 주방에 서 있었다. 꽤 짧은 시간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돌아오니 준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반찬 통과 함께.

“허, 뭐야? 자취남의 비상식량을 훔쳐 가? 에라이.”

어처구니가 없다. 그 송준성이?

“그래, 잘 먹어라. 무지 맛있더라. 라면이랑 먹으면 끝내주거든. 미국에서 스테이크나 썰던 놈 입맛에도 자알― 맞을 거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킥킥거리며 웃던 수혁이 퉁퉁 불어 터진 컵라면을 개수대에 부어 넣었다. 대놓고 긁으려 작정은 했지만 이렇게 나와 주니 더 재미있다.

“어쩔 작정이냐.”

모두가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사실 제가 나선다면 좀 더 쉬운 길로 두 사람을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거까지 내가 떠먹여 주는 건 아니잖아.”

어렵게 얻은 보물일수록 값진 법이다. 물론, 뒤늦게 나타나 아까운 여자 사람 친구를 채 가려 하는 친구 놈에게 약간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끼어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 것 같다.

“그러니 난 구경만 할게. 힘내라, 준성아.”

* * *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과도 어느덧 마무리가 되어 가는 금요일 오후였다. 꿀 같은 주말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기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 때이건만, 정작 퇴근을 앞둔 수진의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아,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결혼식이라잖아. 알지? 이제 김 주임도 그럴 나이라서 이해할 거야. 특히 남자는 말이야 이런 자리에 잘 다녀 줘야 나중에, 응? 평생 독신으로 살 것도 아닌데…….”

주절주절. 켕기는 게 많으면 말이 길어지는 법. 수진은 차분히 눈앞의 상습범, 최 대리를 바라봤다.

단언컨대, 제 인생에서 이 인간만큼 거슬리는 존재는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네. 알았어요. 나머지 정리해서 올려 드리면 되죠?”

신 부장의 시도 때도 없는 헛소리나, 묘하게 제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민 주임의 비꼬는 말투쯤이야 별 타격도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인데, 이 인간의 민폐력은 실제로 피해를 끼친다는 게 문제였다.

맘먹고 캐내면 100%에 가까운 적중률로 저 인간의 구라를 밝혀 낼 수 있을 테지만, 그 과정조차 귀찮았다. 더군다나 거짓임이 밝혀진대도 전혀 반성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뭔가 이쪽이 얻을 게 있을 만한 딜을 거는 쪽이 이득이다.

“대신에 월요일 아침 회의 자료 정리하는 것 좀 부탁할게요. 일찍 나오셔야 해요. 최소 8시까지요. 준비할 거 많아요.”

“그래, 그래. 이렇게 돕고 사는 거지. 고마워! 나 그럼 가 볼게.”

신이 난 최 대리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저 뒤통수를 후려쳐 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저런 막무가내 부탁이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저러는 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하지 않나?

“과연 저 인간이 할까?”

나 과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걸어왔다.

“일요일 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지만 않으면 가능성은 좀 있어요.”

“하여간에 자꾸 봐주지 말라 그랬잖아.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저러는 거 만만하게 보는 거라니까.”

“어쩔 수 없죠. 거절했다가 진짜 결혼식이면 나중에 그 원망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어차피 욕은 최 대리가 먹을 거니까 적당히 해서 보내 버리고 퇴근해. 아니면 내가 좀 도와줘?”

“아니에요. 별거 없어서 금방 끝날 거 같은데요? 걱정 말고 먼저 들어가세요.”

아무려면 한창 손이 많이 갈 네 살 딸아이의 엄마를 빌릴 수야 있나.

그러나 나 과장이 사무실을 나서고 난 후, 자료들을 살피는 그녀의 표정엔 어느덧 시름이 가득했다. 대략의 시간을 감안하자면…….

“후우. 어쩌겠어.”

얄짤없이 야근이다.

엉망으로 꼬인 일을 처리하고, 늦게까지 연락을 기다린 거래처에 사과까지 하고 나니 시간은 11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환승역에서 막차가 끊어질 판이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갈 택시비를 떠올리니 새삼 또 화가 난다.

“아, 이번 달은 지출도 만만치 않은데.”

자발적 지출이 아닌 일에는 정말 10원조차 들이기 싫다. 심지어 최 대리 때문이라니 열 배는 싫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사무실을 나섰다.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은 면해 보려는 마음이 급해졌다.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한 호텔 부지를 빠져나오며 이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걷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스르륵 나타난 낯선 차량 한 대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그녀의 곁에 섰다. 무심결에 바라보자 조수석의 차창이 내려가더니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시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송준성이 왜 또 여기에!

“저, 전 괜찮습…….”

“막차 놓칠 때 된 거 아니까 빨리 타기나 해요.”

이상하게 날이 선 목소리에 움찔한 수진은 주저하다 손을 뻗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준성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차인지 승차감이 기막히다. 소리도 없고.

그래서 열 배는 어색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수진이 애써 입을 열었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느라 힘드시겠어요.”

“네.”

“회사가 이, 일이 참 많은……. 아니,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네.”

시종일관 네, 로만 일관하니 대화가 연결이 되질 않는다. 이럴 때의 그와 제대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능청이 100단이라는 수혁조차 불가능했다. 그 표현대로라면 분명 뭔가가 속에서 틀어져 있는 건데, 그의 성격상 절대 입 밖으로 꺼내 놓질 않으니 주변 사람만 피가 식는 기분이라고 했던가.

‘으, 소문보다 더하잖아.’

냉정할 땐 한없이 냉정해진다는 말은 종종 들어 봤지만, 그걸 제가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의 준성이 얼마나 저를 배려하고 다정하게 대해 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이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으니 대화는 이어 가야 한다. 바삐 머리를 굴려 할 말을 찾아낸 수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저기, 저희 집은…….”

“압니다.”

“아, 네.”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묵묵히 씹어 삼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꺼낼 질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또다시 대화가 끊어져 버리니 이젠 더 꺼낼 말도 없어졌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차 안에서 입까지 다물고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힌다. 저렇게 단답형으로 끊어 버리는 건 대화를 이어 나갈 의지가 없다는 뜻인데.

혹시…… 내가 뭘 잘못했니?

묻고 싶은 질문이 잇새에 머물렀다. 사실 잘못한 게 너무 산적해 있어서 어디서 뭐가 틀어진 건지 감도 안 잡힐 정도다. 새삼 제가 저질렀던 짓들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게 너무도 불길했다.

대체 그중의 무엇이 이 남자의 심기를 이렇게까지 비틀어 버린 거냐고.

본의 아니게 묵언 수행을 하다 못 해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달려서야 간신히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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