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 방 잡을까요?
15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철이 덜 든 녀석들은 가볍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수작을 걸어 대곤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좀처럼 반응을 하지 않자 신 포도를 탐내던 여우처럼 후려치기에 바빴다.
덕분에 좋지 않은 말들이 돌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런 말이 돌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 얼굴만 예쁘면 뭐 하냐고. 성격이 사근사근해야 그 얼굴도 볼만해지는 거지.’
‘뭐, 솔직히 몸매도 쓸 만하긴 하지. 인정할 건 인정. 근데 너무 대놓고 뻣뻣하니까 진짜 매력 없지 않냐? 그런 타입은 줘도 싫더라.’
‘나도. 성격이 그런데 대체 뭔 재미로. 그 얼굴 그 몸매면 진짜 어우…….’
과 MT가 있던 날 밤. 술자리가 깊어지고, 얼큰하게 술에 취한 녀석들은 숙소 구석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그녀를 안주 삼아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그 장소에 들어섰다가 듣게 된 말에 제가 더 불쾌해서 한 소리 하려던 때였다.
덜컹.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당사자가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녀석들이 동시에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때만 해도 그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화를 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녀석들을 휙 훑어보더니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고맙네. 예쁘다고는 해 줘서.’
‘…….’
‘그런데 매력 없다는 건 이해가 안 가는데? 예쁜 것부터가 아주 큰 매력 아닌가? 당장 너희들도 내 얼굴이 예쁘니까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이렇게 관심이 넘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녀의 목소리엔 분노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게 일상인 양 평온하기만 한 말투였다.
‘앞으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 앞에서 내 얼굴 보고 해 줬으면 좋겠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나, 내 성격에 대한 바람직한 충고 정도는 나도 듣고 참고해 볼 의향이 있으니까.’
차분히 말하고 돌아서던 그녀가 문득 멈칫하더니 다시 그들을 바라봤다.
‘아, 그리고 미안한데, 난 너희들이 누군지 전혀 기억을 못 할 거 같거든. 너희들의 매력도 전―혀 기대가 안 되고. 그러니 나한테 말 걸때 자기소개 정도는 꼭 해 주고.’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소리였다. 그렇게 그녀가 문을 닫아 버린 순간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 버렸다. 괜스레 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녀석들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사내새끼들이 변명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입 다물고 있는 꼴이 참 가관이네. 본인 앞에서 못 할 소리는 뒤에서도 하지 말았어야지.’
핀잔하듯 내뱉은 말에 녀석들은 들을 줄 몰랐다느니, 쪽팔려 죽겠다느니 푸념만 늘어놓았다. 지들이 한 말은 생각지도 않고 그녀의 마지막 말에 상처받았다며 징징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당히 제 할 말을 하던 그녀가 떨리는 손을 꼭 말아 쥐고 있었다는 것을. 동그랗게 예쁜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로는 상처받았음이 명백한 모습이었다. 그걸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게 제 눈에만 보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처음엔 몰랐다.
단순한 호감은 순식간에 그녀를 향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점점 더 그녀가 궁금했다. 진짜 그녀를 알고 싶었다. 단단히 둘러친 벽 안에서 홀로 상처를 다스리고 있었을 그녀가 몹시 신경 쓰였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잘 웃어 주고, 부당한 일에도 웬만해선 언성을 높이지 않는 ‘착한’ 사람.
성실하게 맡은 일을 잘하는 것만도 모자라 강제로 떠맡겨진 일조차 내팽개치지 않고 기어이 해결해 버리는 독종.
호감은 가지만, 어딘지 가까이하기엔 힘들고, 별다른 용건 없이 편하게 불러내긴 좀 어려운 존재.
남들이 말하는 그녀는 그러했으나, 그의 눈에 보이는 그녀는 그런 평가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는 소수의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 외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편이었다. 낯가림이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도리어 타인을 대하는 것에 서슴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뭔가를 참고 물러나는 이유는 누군가를 배려한다기보다, 그런 귀찮은 짓을 해서 딱히 얻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각 외로 강단이 있고, 짐작한 것보다 훨씬 무심했다.
그 무심함을 뚫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시도를 했었다. 몰래 그녀를 도우며 관심을 끌어 봤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꽤나 냉정한 그녀는 제 존재마저 크게 의식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저를 향한 지나친 관심과 호의에 익숙하다 못해 무감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저를 밀어내는 것으로 남다른 특별함을 내세워 보려는 이들도 수없이 많았기에 처음엔 그녀도 그런 생각인가, 했었는데 큰 오산이었다.
제대로 그녀의 반응을 끌어낸 건 딱 하나였다.
‘이거 다음 수업은 월요일이거든. 그날 아침까지만 돌려주면 돼.’
제 진짜 목적이 노트가 아닌 저녁 식사였다는 사실을 아마 그녀는 평생 모를 테지.
흔히 호감을 사기 위해 했던 행동들에는 전혀 반응이 없던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에는 흔쾌히 응했다. 그건 꽤나 충격이었다. 그녀가 타인의 도움을 불편해하는 성격이란 걸 그때 알았다. 그 이전에도 그녀를 도우려다 한 소리 들은 기억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파악이 늦었다니. 내가 이렇게나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구나, 싶은 약간의 회의감도 함께였다.
하지만 어울리지도 않게 잔머리를 굴린 결과는 처참했다.
일을 저지른 수혁이 나서서 모든 걸 수습하고서야 간신히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했고, 어렵게 친구가 되었지만, 그마저도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렇게 끝까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우정이라는 이름의 벽에 지친 자신이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으로 다 끝나 버린 일이라 생각했는데…….
“왜 또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단 한 번도 제 생각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는 여자였다. 처음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선함에 끌렸고, 나중엔 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집착이 생겨 버렸다.
그건 손에 넣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아니면 이루지 못한 감정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그녀를 다시 본 순간 제 심장이 다시 크게 뛰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릴 정도로.
“그러니 일단은 제대로 상황 파악부터 해야겠지.”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것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준성이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장 마지막 층에서 내렸다. 해가 훤한 대낮이지만, 그가 들어선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3년 전에 이 집에 들렀던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아직도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만 일어나지?”
손을 뻗은 준성이 침대 위의 인영을 툭툭, 건드렸다. 기다란 형체가 끄응, 하고 신음하더니 몸을 뒤척였다. 쑥 내민 손이 머리맡을 뒤적이며 뭔가를 찾는다. 이윽고 반짝, 불빛이 들어온다. 시간을 확인한 모양인지 남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씨……. 한창 잘 시간에 찾아오는 법이 어디 있냐? 예의도 없는 새끼…….”
“수진이 언제부터 우리 호텔에 있었어?”
“…….”
“그렇게 가까이 지내면서 말 한번 안 했더라?”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잠시간 말이 없던 남자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내가 아는 수진이만 해도 한 열 명은 될 텐데……. 네가 말하는 수진이면 설마, 송준성을 차고 전설의 철벽녀가 되었다는 그 김수진인가?”
“응. 내 친구였고, 지금은 네 ‘친구’인 김수진.”
친구라는 말에 강세를 두자 수혁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하여간 독한 놈이라니까. 헷갈리게 좀 해 놓으려 했더니 어떻게 사람이 속지를 않냐.”
“흔들린 건 맞아. 금방 빠져나온 거지. 네 성격이야 뻔히 꿰고 있으니까.”
시큰둥하게 대꾸한 준성이 팔짱을 꼈다.
“넌 그렇게 뒤로 숨기고 몰래 연애하는 타입이 아니잖아.”
두 사람이 정말 연인이 되었다면 차수혁 쪽에서 먼저 알려 왔을 거다. 평생을 타인의 시선 속에 살았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수혁의 성격상 그렇게 얻어 낸 전리품을 숨겨 둘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녀의 일이 되면 정상적으로 머리가 돌지 않는단 증거였다. 그나마도 오늘처럼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좀 더 늦게 깨달았겠지. 수혁은 그런 장난질로 몇 년은 끌고도 남을 놈이다.
“으휴. 재미없는 놈.”
느른하게 중얼거리던 수혁이 작은 케이스를 집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연스럽게 케이스를 건네는 손길에 고개를 젓자 아차, 하더니 도로 거두고는 말을 잇는다.
“하여간 수진이 일이라면 귀신같이 반응하지.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냐?”
무심히 핵심을 찔러 오는 말에 준성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제 용건은 이게 끝이었다.
“어디 가?”
“그만 일어나라. 가 봐야 해.”
“뭐야, 내 잠만 깨워 놓고 그냥 가시겠다? 점심이라도 좀 사 주고 가든가.”
“일하던 중이었어. 시간 나면 다시 연락할게. 형한테 안부도 좀 전해 주고.”
“웬만하면 형제끼린 알아서 연락들 좀 하시지? 저 봐, 저 봐. 그새 또 일하고 있네.”
퉁명스러운 말에 때마침 휴대폰을 꺼내 메일을 확인하던 준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미안. 급한 보고서 들어올 게 있어서.”
“얼마나 급하길래 이 와중에도 휴대폰이나 들여다보고 있냐? 이제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 들어가는 놈이다, 이거야?”
“후계자는 무슨. 그냥 어머니 일 돕는 거지.”
“그렇다 해도 사실상 너희 집안 사업이 라비타 호텔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네가 떡하니 거기로 떨어졌으니 게임은 끝난 거지 뭐. 권력이랑 동떨어진 외곽에서 영향력 끼치는 우리 사장님이 특이한 케이스고.”
냉정한 분석에 준성은 희미하게 미소만 지을 뿐, 이렇다 저렇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하든 세상이 보는 눈은 그 말대로일 테니까.
“어쨌거나 우리 사장님도 요즘 공사가 다망하시다. 조만간에 병원 한번 모시고 가야 할 거 같아. 소음 땜에 가는귀가 먹는 건지 내 말은 통 안 들으신다니까.”
“글쎄. 형이 진짜 소리가 안 들려서 네 말을 안 듣는 거라고 생각해?”
“나의 실낱같은 믿음마저 박살 낼 셈이냐?”
퉁명스레 내뱉은 수혁이 준성의 어깨에 주먹을 툭, 들이댔다. 둘째 형인 준영은 본사의 임원이자, 현재 국내 최대 클럽인 ‘클럽 라비타’의 사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 준영을 친형처럼 따르는 수혁은 부사장으로서 실질적인 클럽 운영의 전반을 맡고 있다.
“왜, 형한테 무슨 일 있어?”
“뭐긴. 이거지.”
수혁이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번엔 몇 주야? 몇 개월이야?”
“글쎄다. 몇 개월로 끝나야 하는데…….”
“남자라도 만나?”
“그런 거면 말도 안 하지. 내 평생 사장님이 여자로 골머리 썩는 모습은 처음 본다니까. 하긴 뭐, 너나 나나 사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만.”
“…….”
“우정놀음이나 하다 기어이 철벽에 나가떨어진 놈이나, 옆에 들러붙어 10년을 공들였는데 끝내 친구밖에 못 된 놈이나. 허우대 멀쩡한 남자 놈들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너무 웃기지 않냐?”
능청스럽게 이어지는 말에 준성의 미소가 삐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