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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4화

나름대로 복잡한 여자의 속사정이야 어떻든 또다시 일상은 시작됐다.

“시간이 또 이렇게 가 버렸구나.”

휴대폰 캘린더를 확인한 수진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더위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린 게 엊그제 같은데,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서늘한 바람결에 잘 마른 낙엽 냄새가 묻어나는 계절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빠르다 못해 계절이 일주일 만에 바뀌는 느낌이라던 나 과장의 말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다.

오늘따라 미세 먼지 하나 없이 화창하게 맑은 날씨였다. 출근길, 짙푸른 색으로 물든 하늘은 그렇게나 맑았는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앞엔 맑은 하늘은커녕, 화장실의 단단한 콘크리트 벽뿐이다. 마치 지금의 제 현실처럼.

“……역시 먼저 연락을 하는 수밖에 없나.”

중얼거린 순간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수진 씨. 잘되고 있어? 오늘 벌써 수요일인데.’

방금 전, 직원 식당에서 마주친 홍보부 정지윤 대리의 질문이었다. 먹던 밥을 다 뿜을 뻔했다가 간신히 얼버무리곤 부리나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서 화장실에 틀어박힌 채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기를 30여 분. 도무지 손가락이 떨어지질 않는다.

준성은 여전히 바빴고 열흘이 넘도록 연락조차 없었다. 연락이 없다는 것 자체에 실망하거나 아쉬움을 느낀 건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인연이 될 상대도 아니니 가능하다면 이대로 조용히 멀어지다, 가끔 생각날 때 인사나 주고받는 옛 친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당연히 그의 사진을 홍보실에 넘길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대강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거였다. 그러니 조용히 저만 입 다물고 살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준성의 사진을 찍은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부리나케 찾아온 홍보부의 여자들에게 일진 만난 여고생처럼 휴게실로 끌려간 것도 잠시.

‘상무님이랑 같은 학교 나왔다는 거 사실이에요?’

‘두 분이 친구였다면서요?’

‘아니, 왜 그런 소식을 나한테 말도 안 해 주고. 나빴어, 수진 씨!’

튀어나온 말들에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기막히게도 촉새같이 그 소문을 옮긴 존재는 신 부장이었다. 원래도 그런 인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 없던 정도 떨어뜨리는 데엔 당할 재간이 없다.

‘그럼 그냥 차만 가져다주고 온 거라고요?’

‘네. 아시다시피 부장님이 원래 좀 그런 오지랖이.’

‘그런데 왜 하필 수진 씨를 거기다 보내?’

‘그 시간에 남아 있던 직원이 마침 딱 저랑 나 과장님뿐이라.’

‘무슨 차를 어떻게 드실 줄 알고요. 혹시, 수진 씨 상무님이랑 지금도 친해요?’

‘아, 아니요! 그다지 친하지는.’

‘어머! 그럼 확실히 아는 사이는 맞나 보네, 그렇죠?’

아니, 무슨 질문을 저렇게 하나.

제대로 낚여 버린 수진이 입만 벙끗거리는 동안, 무슨 작당들을 꾸미는 것인지 그녀들은 잔뜩 흥이 올라 있었다. 도무지 말을 제대로 끝마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관을 벗어날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그녀들이 동시에 저를 바라본다.

왠지 그런 기운이 몰려든다. 섬뜩한 망삘이.

‘수진 씨! 우리 좀 도와 줘요.’

‘네?’

‘인터뷰 좀 따 줘요. 응?’

‘알지? 내가 전부터 우리 상무님 특집으로 싣고 싶어 했던 거! 우리의 희망은 수진 씨뿐이야! 부탁해!’

‘그래, 그래. 이 기회에 상무님 얼굴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응? 파이팅!’

“데이트는 무슨 개뿔이 데이트!”

생각만 해도 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분명 못 하겠다고 잘라 낸 것 같은데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그녀들을 원망해 봤자 무얼 하나. 평소엔 냉철하기 그지없는 저 자신인데, 왜 송준성의 일만 관련되면 이토록 무력해지는 건지.

“그래. 해 보자. 해 보는 거야. 뭐 쪽팔릴 일 좀 생긴다고 죽기야 하겠어?”

숨을 들이켠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툭툭, 액정을 눌러 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어쩌다 보니까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게 되네요.]

뭐지. 이 더럽게 흑심 품은 듯한 메시지는.

화다닥 지워 버리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요. 잘 지내셨나요?]

새삼스럽게 잘 지내긴 무슨! 다시. 다시.

[지난번에 뵌 이후로 연락이 없으셔서요. 그때 식사 한번 하자고 하셨는데,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 제가 또 약속을 못 지키면 마음에 걸려서.]

아니, 이건 너무 매달리는 뉘앙스 아니니? 거기다 굳이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은 또 뭔데?

그렇게 뭔가를 쓰려다 다시 지우고 반복하길 서너 번.

“아우! 이게 아니라고, 이게 아니야!”

뭔가 자연스럽고, 별 흑심은 없어 보이지만 상큼하게 반가워 보이는 뭐, 그런 말이란 없는 거야? 어떻게 이리 쥐어짜 내도 떠오르는 단어가 없냐, 이 비루한 어휘력아!

잠시간 제 머리를 쥐어뜯던 그녀가 멈칫했다.

“어차피 생각 안 날 거 생각 안 하고 막 쓰면…….”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시간 괜찮으실 때 연락 한번 주세요.]

뭐냐. 이 개뿔 입에 발린 작별 인사 같은 말은.

“아니야, 아니야. 정말 이건 아니야.”

쿨하게 철벽을 쌓는 뉘앙스에 이젠 제 머릿속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광속으로 지워 버린 수진은 빈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야?”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인지 급격하게 현자타임이 닥쳐왔다.

잠시 삶과 고독, 인생에 있어서 좌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로 넘어가려던 생각을 애써 털어 낸 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누가 뭐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번호도 교환했고, 조만간 밥도 한번 같이 먹어야 하는데 서로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면 좋잖아. 먼저 번호를 가르쳐 준 건 연락을 하라는 뜻 아닌가?”

그린 라이트까진 아니어도 대강 애플 그린이나 민트 그린 라이트쯤은 되지 않겠냐고.

그러니 바쁜 상무님 대신 이쪽이 먼저 인사 정돈 해도…….

드르륵―

“엄맛!”

갑자기 날아든 메시지에 소스라친 수진이 가까스로 휴대폰을 붙잡았다. 이 타이밍은 대체 무엇이니. 하마터면 자음 몇 개 치던 그대로 전송을 누를 뻔했다.

[약속 시간 잡으시죠.]

송준성. 발신자의 이름만 봐도 심장이 울컥거렸다. 아무래도 청심환을 몇 박스 정도 쟁여 둬야 할 것 같다. 마치 제가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듯 보내온 메시지에 아릿한 가슴팍을 한참 문지르던 수진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한 수진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을 했던 게 언제더라. 그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아주 형식적으로 안부만을 묻는 메시지가 두어 번 오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아마도 8년 만에야 다시 보내 보는 메시지였다. 그녀 나름대로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딱히 가리는 건 없습니다.]

돌아온 답변에 그녀 입가로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제 앞에서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학식은 물론, 길거리 분식부터 컵라면, 편의점 삼각 김밥 따위도 곧잘 먹던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뭐든 입에 넣으면 행복했던 저와는 달리 표정이 썩 밝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속으로는 은근 식성이 까다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지.

“그땐 이렇게 엄청난 사람인 줄도 몰랐으니, 뭐.”

어쨌거나 이젠 알고 있으니 제대로 대접을 해야 한다. 굳게 다짐한 순간 머릿속에 비장의 맛집 리스트들이 둥실 떠올랐다. 그래. 내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너희를 모은 거구나! 그중 특별히 맛있었던 집을 떠올린 수진이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어떠세요?]

[6시.]

지나치게 짧은 메시지에 왠지 웃음이 났다.

“꼭 그때로 돌아간 거 같네.”

두근두근.

여전히 뛰는 심장을 다스리며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준성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대체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런 무뚝뚝함이 있기에 의외의 다정함이 더 와닿기도 했지만, 잘 모르는 상대라면 ‘나랑 친해지기 싫은 건가?’ 하고 생각하기에 딱 좋았다.

“이런 건 좀 고치라니까. 여기, 여기 이렇게 이모티콘 하나라도 그려 넣으면 좀 좋냐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그가 반가워 괜히 핀잔하듯 내뱉어 보는 입가로 히죽거리며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냥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들떴다.

* * *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어떠세요?]

한 고급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마지막 메시지를 바라보던 준성이 툭툭, 휴대폰을 두드렸다. 이어 사진첩을 열자 게슴츠레한 표정의 수진이 화면에 가득 떠올랐다.

“이런 것도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확실히 중증인 거 같고.”

계절은 점점 겨울을 향하는데, 마음만은 핑크빛 싹이 움트는 봄이었다. 싱겁게 떠올랐던 웃음은 이내 진지한 눈빛과 함께 가라앉았다.

“하여간 넌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참 알기 쉬운 것처럼 행동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밝고 친절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어떤 벽 같은 게 둘러쳐 있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그건 남자들을 상대로 할 때 더 뚜렷이 드러나곤 했다.

‘김수진? 쟤 그쪽 지역에서 엄청 유명하잖아. 철벽으로.’

‘아, 어쩐지. 잠깐 시간 좀 내 달라고 했는데도 씨알도 안 먹히더라니.’

대학 시절, 처음으로 듣게 된 그녀의 평가였다. 당시 그 이야기를 주고받던 남자 동기 녀석들의 얼굴이며 목소리는 다 잊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기억이 선명했다. 좋지 않은 뉘앙스를 읽어 내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분명 이 녀석들도 뭔가 수작을 걸다 튕겨 나간 거겠지.

그녀는 몰랐겠지만, 사실 입학식 날 당당히 신입생 선서를 하던 그녀에게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강아지처럼 처진 눈에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웃음. 적당히 아담한 체구와 다정다감하면서도 은근 개구진 말투 때문인지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지나치게 예쁜 얼굴과 남달리 뛰어난 성적이 정작 마주하는 남학생들을 좀 위축되게 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만만히 보고 덤벼드는 녀석들이―당시에도 상당히 많긴 했지만― 수도 없었을 거다.

어쨌거나 당시의 그는 그 감정을 단순한 호감이라 여겼다. 평생을 타인의 관심 속에서 살았고, 아쉬운 게 없기에 그의 머릿속엔 자신이 먼저 누군가에게 접근을 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인연이 되면 자연스레 만나지겠지. 그러니 굳이 나서서 먼저 자극한다거나, 기분 나쁘게 질척거리며 상대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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