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3화

수혁이 기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난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뿐이야. 내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매달려 가면서 힘 낭비하고 싶지 않아.”

가슴에 꿈을 품고 살기엔 이미 너무도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냥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 가능하다면 전처럼 친구로 지내고 싶고.”

“글쎄. 과연 그게 쉬울까?”

“나도 힘든 거 알거든? 감히 상무님한테 야자 틀 마음은 없으니까, 걱정 마.”

아니, 쉽지 않을 거라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닌데.

제대로 삽질 중인 여자를 측은하다는 듯 흘깃 바라본 수혁이 다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어느 쪽의 착각부터 깨 줘야 하나. 조금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준성이 마지막으로 호텔을 나선 시각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나흘간의 베이징 출장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 딱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오전 중에는 평소처럼 빡빡한 일정을 해치우고, 오후엔 HJ건설 사옥의 회의실에서 사장단과 차담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면세사업부와 면세점 시찰을 마친 시각이 딱 그쯤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서 김 비서에게 남은 일 마무리를 지시한 준성은 손수 차를 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한강을 건너고, 서울 도심지를 가로지른 차량은 어느덧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언덕길을 달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과 웅장한 주택들의 조화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 그에겐 너무도 익숙한 풍경 중의 하나다.

성북동에 위치한 본가로 향하는 길이었다. 모처럼 저녁이라도 함께하자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되도록 시간을 내 보겠다며 짧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은 게 일주일 전의 일이다. 아마 위의 두 형들에게도 똑같은 연락이 닿았을 터.

그러니까, 오늘 모두 모인다면 무려 3년 만에 온 가족의 얼굴을 보게 되는 셈이다.

물론, 그것마저도 힘들 거란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저만치 보이는 익숙한 저택에서 고급스러운 세단 한 대가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제가 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려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옆모습이 익숙했다.

차고에 주차를 마친 그가 넓게 이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서자, 광주댁이 가장 먼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 많았어.”

“고생은요. 아버지랑 어머니는요?”

“교수님은 서재에 계셔요. 회장님은 언제쯤 오실지 대중없고. 따로 연락 없으면 먼저 식사하라 하시던데, 아무래도 늦으실 거 같죠? 곧 저녁 준비 다 되니까, 일단 교수님께 인사 먼저 드리고 같이 와요.”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서른 해 인생을 살며 한 회장을 집 안에서, 제때에 본 기억이 도리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떼던 준성이 지나는 말로 물었다.

“큰형은 방금 나가는 거 같던데요.”

“갑자기 학교에서 급한 연락이 왔거든요. 모처럼 집에 들러서 쉬고 가는 건가 했더니만. 그렇지 않아도 둘째 도련님까지 오늘은 못 올 거 같다고 연락 왔었고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짧게 대꾸한 준성이 2층의 서재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방이 짙은 색의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저 왔어요.”

“살아 있긴 했구나.”

가장 안쪽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은 남자가 불쑥 대꾸했다. 아버지, 송경무 교수였다.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은 남자는 이내 두꺼운 책을 슥 덮더니 가느다란 은테 안경을 슬쩍 내리며 시선을 보냈다. 준성이 책상 앞에 자리한 커다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바쁘게 사느라 별 소식 없으면 더 안심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말은 청산유수지.”

핀잔하는 투에 준성이 멋쩍게 웃었다.

“웃을 때가 아니야. 우리 한 회장님 속이 보통 많이 상하신 게 아닐 텐데. 어떻게 보상할 셈이냐?”

“그렇지 않아도 오늘 뵙게 되면 사과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얼마 전, 갑작스럽게 한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시간 나면 잠시 만나 점심이라도 들자는 말에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한 게 그대로 약속이 되었다.

물론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일정이 바뀌며 예정되어 있던 중국 출장이 당겨져 급히 출국을 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바쁘고 귀한 아드님 얼굴이나 보자며 불러낸 자리가 실은 한 회장과 그 친지들의 모임 자리였다는 건 나중에야 김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

“내색은 안 하지만 많이 곤란했을 게다.”

“일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킨 거니 우리 회장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죠. 설마하니 그런 자리일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더 안 나갔을 거 아니냐?”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준성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럽게 저를 불러내 난다 긴다 하는 집안들에 선보이려는 생각이셨을 거다.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타이밍에 후계자로 언급되는 형제들 중, 가장 그 중심에 가까운 존재. 말하자면, 저는 현재 한 회장이 가진 가장 큰 카드였다. 그런 자리가 결코 가볍진 않았을 터.

“웬만하면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해라. 가뜩이나 준하도 준영이도 속 썩이는 짓만 골라서 하는데 너까지 그러면 네 어미 제명에 못 산다.”

“왜요. 형님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한다는 소리하곤. 누가 한 배 속에서 나온 녀석들 아니랄까 봐 어쩌면 이런 거까지 똑같은 거냐.”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은 말에 웃음기가 묻어 있다. 형제들은 크게 우애 깊다곤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서로에게 악감정 같은 것도 없는 사이였다. 모두가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다 보니 서로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뿐.

어린 시절엔 보통의 형제들이 그렇듯 크게 다투기도 하고 함께 놀기도 하며 나름의 우애를 쌓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기억마저도 희미했다.

“어쩔 수 있나요. 유전자가 워낙 강해야죠.”

툭하니 내뱉는 말에 송 교수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벌가의 독자로 태어났음에도 그는 가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타고난 성정이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데다 잔병치레가 잦아 열정을 보일 만한 체력이 없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이기적이고 나약한 성격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기에만 급급했다. 흥미를 느끼는 일 외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타인을 향한 경쟁심은 물론, 물욕조차 없었다.

세 아들은 그런 송 교수의 성격을 각각 다르게 물려받았다.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큰아들 준하는 그야말로 송 교수의 재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둘째 아들 준영은 잇속이 밝은 조부를 닮아 사업에 소질을 보이긴 했지만, 그 역시도 자유분방한 송 교수의 성격을 물려받은 탓에 엄격한 기업가로서의 삶은 살지 못했다.

정작 그렇게 말을 하는 준성이 그나마 가장 송 교수를 닮지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준성은 누가 봐도 한 회장의 핏줄이었다. 송 교수를 대신해 가업을 짊어져야 했던 한 회장처럼, 그 역시 두 형이 외면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게 욕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을 안다. 이기적인 집안 남자들의 외면 속에서 고독하게 싸우는 어머니의 곁을 지켜 줄 사람이 저뿐이라는 걸 알아서. 그 책임감만으로 모든 짐을 짊어진 것뿐이었다.

하필 그렇게 욕심이 없다는 점만이 자신을 닮아서는.

그게 안타까웠으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는 해야 하기에 묵묵히 책임감을 발휘해 온 막내아들을 그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어쩌면 그런 준성이 한 회장의 곁에 있어 제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겠지. 그 핏줄이 어디 갈까. 어쨌든 준하, 준영이가 저 지경이니, 회장님은 너라도 제때 짝을 지어 주고 싶은 모양이야. 아마 당분간 계속 비슷한 시도가 이어질 것 같구나. 네가 직접 신붓감이라고 데리고 오면 또 모를까.”

나직하게 덧붙인 말에 준성이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 순간 어김없이 떠오른 이름 하나에 또 가슴속이 술렁인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기지 못한다더니. 그새 더 깊어져 버린 감정이 내내 무심하던 표정에 설렘을 그려 내 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아비라고, 그런 준성의 표정에서 무언가 다른 낌새를 느낀 송 교수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왜,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는 거냐?”

“좋은 여자예요.”

“좋은 여자의 기준이 네가 생각하는 거랑 우리 한 회장님이 생각하는 거랑 다를 수도 있단다.”

“분명 어머니도 좋아하실 여자예요. 그 전에 제 여자로 만드는 게 먼저지만요.”

“하하하핫, 저런. 널 마다하는 여자가 다 있단 말이냐? 이것 참, 하하핫!”

“그런 것보다는 좀…… 다른 문제가 있어서요.”

“왜, 설마 유부녀는 아닐 테고. 혹시 애인이라도 있는 여자인 거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동시에 근 2주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된 준성이 슬며시 미간을 접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 네가 그렇게 확신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니. 참 괴이한 경우가 다 있구나. 하하하.”

그러게요. 넘어야 할 산이 꽤 높은 것 같습니다.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모처럼 박장대소하는 아버지의 반응이 낯설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말도 많으시다.

언제나 메마른 고목 같았던 집안 분위기.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건 아버지였다. 전형적인 학자로, 1년의 대부분을 연구실에만 박혀 있던 아버지와 밀려드는 일에 치여 초죽음이 된 채 돌아오는 어머니. 말 한마디 제대로 오가지 못한 환경에서 가족 간의 정이 쌓인다면 얼마나 쌓일 것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환경이 그에겐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판단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엔 이미 이런 삶 자체가 너무도 당연했으므로. 냉소적이고 무심한 성격은 이런 환경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어쨌든 안타깝구나. 생각보다 빨리 며느리를 볼 수 있으려나 했더니만.”

“저 아니라도 먼저 소식이 와야 할 곳이 있잖아요.”

“글쎄다. 원래 이런 일에는 순서가 없지 않겠니. 그렇지 않아도 누가 제일 먼저 사내 노릇 좀 할지 두고 보던 참이다.”

싱거운 말 몇 마디가 더 이어진다. 나직하게 덧붙은 웃음소리에 이제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한다. 이제야 그도 진짜 가족의 정이 그리워지는 건가, 생각하다 쓰게 웃어 버렸다.

“별로 그런 걸로 경쟁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하, 알겠다. 아무튼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다만, 설마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준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단 한 가지. 송 교수가 제대로 물려준 유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발견한 송 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긴. 네 고집에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대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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