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2화

“너 내가 이 차 타고 나오지 말랬지?”

“아니, 왜? 이게 어때서? 다른 애들은 이거 못 타서 난리인데 왜 너만 그래?”

“너무 눈에 띄잖아! 타기도 힘들고! 누가 쳐다볼 때마다 창피해 죽겠단 말이야.”

“어허, 수진아. 너 지금 오빠가 창피하다고 했니?”

“아우! 오빠는 무슨 얼어 죽을. 능글능글 징그럽게……. 꺅! 하지 마, 수혁이 너 진짜!”

어느새 차량 밖으로 나온 수혁이 장난스럽게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하다. 징그럽다며 학을 떼는 소릴 하는 여자의 얼굴도 마냥 싫은 기색만은 아니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친구. 혹은…… 연인으로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담부턴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지 마. 그냥 약속 장소로 바로 가면 될 걸.”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뭐 먹을까?”

“아, 어제 거기 어때? 스테이크 진짜 괜찮던데. 다른 메뉴도 좀 궁금하더라.”

“그래? 그럼 오늘은 시간 별로 없으니까 일단 거기로 가자. 그보다 주말 약속은 안 잊었지?”

“응. 당연하지. 너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괜찮겠어? 일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그래야지. 멀리 운전할 거 생각만 해도 술맛 딱 사라진다.”

짐작조차 못 할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렇지 않게 차에 오른다.

준성은 그런 두 사람을 멀거니 지켜봤다. 시선을 느낀 건지 운전석에 앉으려던 수혁이 흘깃 그를 바라봤다. 그 입가에 장난스럽게 스며든 웃음기가 선명하다.

“……그런 의미였나?”

돌아서는 준성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 * *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수혁이 느긋하게 운전석에 올라타는 동안 수진은 등 뒤를 흘끔거렸다. 미묘하게 느린 타이밍도 그렇거니와 왠지 그의 시선이 뒤쪽을 향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 아니, 그냥. 좀 섬뜩했는데 짜릿하고 재밌네. 잠자는 사자 코털 하나 정도 뽑아 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엉뚱한 소리야?”

묘하게 싱글거리는 수혁의 태도에 다시금 뒤를 바라보던 수진이 멈칫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매끈한 뒤태를 자랑하며 걷는 남자가 눈에 띈다.

“와아, 저 사람 뒤태 끝내준다. 근데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누구지? 혹시 누군지 봤어?”

“이거 봐, 이거 봐. 지금 이렇게 멋진 남자를 옆에 두고 눈이 돌아가?”

“그래, 너 잘생기고 얼굴도 작고 키 커서 비율도 겁나 좋아. 완전 모델이야. 그거는?”

건성으로 대꾸한 수진이 손을 내밀었다. 피식 웃음 짓던 수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후, 그래도 다행이다. 너한테 있어서.”

옷을 갈아입으며 사원증을 잠시 빼놓은 걸 쇼핑백에 그대로 넣고서는 수혁에게 통째로 맡겨 버린 게 화근이었다. 미팅을 나간 자리에서 한참 만에야 목이 허전한 걸 깨달았다.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끝나 돌아온 사무실에서 한참을 찾아 헤매는데, 때마침 연락을 해 온 수혁에게 ‘그거 쇼핑백 안에 있던데?’라는 말을 들었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아니, 이래저래 일이 터져 대니 정신이 없는 게 당연한가.

한숨을 내쉬는 동안 벨트를 채운 수혁이 툭하니 말문을 열었다.

“연희가 올해 안에 돌아온다고?”

“어, 이번엔 아예 들어올 생각인 거 같던데.”

“난 연희만 보면 진짜 정신이 쏙 빠져나가는 거 같다니까. 잠깐 들렀다 가도 그 지경인데 아예 한국 땅에 박힐 예정이라고? 어우, 날 얼마나 벗겨 먹으려 들지 벌써부터 숨이 콱 막히네, 그냥.”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잘해. 혹시 알아? 연희 통해서 겁나 예쁜 외국인 여자 친구라도 소개받게 될지.”

“외국어 울렁증 환자한테 무슨 망발이냐.”

“으이그, 엄살은. 그렇게 자신 없으면 평소에 공부 좀 하든가.”

“어허, 그게 아니지. 난 애국심이 강한 거뿐이야. 결혼도 꼭 우리나라 사람이랑 할 거고.”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 것보다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순정이 얘는 또 왜 이렇게 느닷없이 결혼을 한대?”

“뭐긴 뭐겠어. 혼수 하나 거―하게 생긴 거지.”

“아…….”

어쩐지 핼쑥해 가지고 물만 마시고 있더라니. 입덧을 시작한 거였나 보다.

지방에 있는 공기업에 취직을 하는 통에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동기였는데, 며칠 전 수혁을 통해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어제 수혁과 함께 식사를 대접받고 청첩장까지 받은 참이었다.

“우리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됐구나.”

“그렇지. 우리가 대학 졸업하고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특히 넌 딱 결혼하기 좋을 나이긴 하지.”

“웃겨! 꼭 본인은 아닌 것처럼 나만 물고 늘어지는 건 뭔 심보인데? 그리고 난 지금 내 몸 건사하기도 바빠 죽겠다고. 결혼은 무슨.”

“어머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거 같던데.”

“어우, 말도 마. 어제도 전화 와서는 엄마 친구 딸내미 시집간 이야기 하면서 은근슬쩍 닦달하시는데, 정말. 후, 너도 알잖아. 아빠 정년퇴직하시기 전까진 꼭 결혼해야 한다고. 그래야 지금까지 여기저기에 투자한 돈 다 받아 낼 수 있다나 뭐라나.”

“아이고, 우리 교장 선생님. 안타까워서 어쩌나. 정년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하나뿐인 따님은 종일 일만 하느라 남자 친구 소개 한번을 안 해 주고. 얼마나 애가 타시겠어.”

“진짜 너까지 그럴래?”

키득거리는 수혁을 힐끗 노려봐 준 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말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녀를 재촉하기 위한 방편으로 반쯤 농담 삼아 하는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물론, 그런 말이라도 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보려는 부모님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난임 선고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간신히 얻어 낸 귀한 외동딸이었다. 그런 소중한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님 요즘은 어떠셔? 건강은 괜찮으시지?”

“늘 그렇지, 뭐. 술을 완전히 끊으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몰래몰래 드시는 거 똑같고, 그래 놓고 나더러 죽기 전에 손주 안 보여 줄 거냐고 닦달하는 것도 여전하시고. 앞으로 백 년은 더 사실 거 같구만, 무슨.”

“푸하핫……!”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젓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걱정이 묻어났다. 아버지의 예전만 못한 건강 상태도 기승전‘결혼’으로 가는 단골 소재 중 하나다. 그러나 재작년 겨울, 출근길에 한번 쓰러진 전적이 있기에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는 말이기도 했다.

정말 그땐 얼마나 놀랐는지.

전화를 받자마자 잠옷 바람에 코트만 걸치고서 눈물범벅이 되어 튀어 나갔었다. 지갑을 놓고 나와 택시도 잡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며 수혁에게 전화를 했다.

정신이 나간 채로 내뱉는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수혁은 귀신같이 저를 찾아왔고 곧장 본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분명 밤을 새우고 왔을 텐데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곁에서 저를 다독이며 일 처리까지 맡아 준 그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평생 갚아야 할 은혜였다.

그 일을 겪고 난 후 부모님은 더더욱 그녀의 결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건지, 그 마음은 충분히 알았지만, 그런 것만으로 결혼을 서두르고 싶지 않은 게 문제였다.

“어쨌거나 난 그렇다 치고. 수혁이 너야말로 급하지 않아?”

“물론 급하지. 요즘 본가에 들어가기도 무섭다. 그런데 관심 있는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 남자를 두고도 바쁘다고 전혀 생각이 없다는데, 어떡하면 좋냐?”

“헛소리하지 말고. 네가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란 말이야. 너 진짜 그렇게 살다간 밤길 조심해야 할 거 같다니까.”

“내가 뭘!”

“모르겠으면 지금부터라도 네 연애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 좀 해 봐.”

정말 진지하게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는데, 수혁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거센 배기음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나 엄청 진지한데?”

“됐고, 운전에 집중하세요. 내가 너 연애질하는 거 옆에서 몇 년을 지켜봤고, 몇 명을 얼마 동안 만난 거까지 다 아는데 느닷없이 무슨 헛소리야.”

“느닷없다니. 원래 남자들은 옷깃만 스쳐도 아들딸 계획이 아른거리고 막 그러는데 10년을 같이 있었으면 손자며느리 생각해 볼 때다?”

“무슨 주마등이라도 봐? 진짜로 주마등 보기 전에 앞이나 좀 보라고!”

어이가 없어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하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수혁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짐짓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취향이랄 땐 언제고.”

“그때 이미 해명 끝난 이야기 가지고 또!”

“그래서 진짜 이상형인 준성이가 왔으니 이제 잘해 보려고?”

정말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무, 무슨…… 이상한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준성하고 뭐?”

“왜 말이 안 되는데?”

“생각해 봐. 당장 우리 회사 상무님이야. 그것도 회장님 아들. 상식적으로 그런 사람이 평사원이랑 왜 엮이는데?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 못 살면 그럴 수도 있지.”

기함할 소리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누가 좋다는데?”

“너부터 좋아 죽잖아. 벌써 10년 넘도록 옆에서 보살펴 준 남자는 뒷전이고 다른 남자 생각이나 하는 게.”

“허. 아니거든?”

“아니라는 분이 얼굴 한번 마주쳤다고 기절초풍해선 자는 사람을 깨우질 않나, 얼굴 보고 대화 몇 마디 좀 했다고 완전 넋이 나가 있질 않나…….”

정곡이 찔린 수진이 짐짓 엄하게 눈을 흘겼다. 눈알이 빠지도록 힘을 준 보람은 있는지 수혁이 제 뺨을 긁적였다.

언감생심 꿈조차 꿔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옆에 앉은 이 남자도 같은 부류지만 준성은 좀 더 의미가 달랐다.

“나한테 송준성은 그냥 연예인 같은 존재야. 보면 멋지고, 배울 점도 많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뿐이라고. 그러니까 그냥 바라보는 걸로 충분해.”

“혹시 모르지. 팬이랑 연애하는 아이돌도 있더만.”

아니, 아무래도 비유가 잘못된 거 같다.

“있잖아. 너 어릴 때 위인전 읽어 봤지?”

“이젠 위인까지 들먹일 기세냐?”

“나한테는 그래. 생각해 봐. 이순신 장군님이 아무리 멋진 꽃미남이라 해도 감히 그분이랑 어떻게 연애를 해?”

“…….”

“적어도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어야 뭐라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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