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1화

“그럼, 편하게 식사하십시오. 전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아서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준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나섰다. 이 순간 그를 잡을지 말지, 또 한 번 머뭇거렸을 그들에게 건네는 작은 호의였다.

함께 저녁이나 들자는 모임이었지만, 예의상 이뤄진 초대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 역시 음흉하기 짝이 없는 늙은 여우들과 불편하게 식사를 하는 일에 굳이 더 시간을 들일 마음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서자 김 비서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먼저 퇴근하세요.”

“상무님은요?”

“남은 일이 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자리 빠져나오시려고 그냥 하신 말인 줄…….”

무심코 말을 내뱉던 김 비서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올해 서른네 살의 김문홍 비서는 한 회장의 직속 비서실 출신으로, 3년 전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준성의 타지 생활을 보좌해 왔다. 오랜 시간 함께하며 누구보다 믿을 만한 존재라는 건 파악했지만, 너무 가까이 지내다 보니 단둘일 땐 간혹 지나치게 솔직해진다는 게 흠이랄까.

“불편한 자리기는 했죠. 너무 대놓고 찔러 놨으니 앞으로도 볼만할 테고. 그래도 이젠 바쁘신 회장님 대신 저를 도마에 올려놓게 될 테니 이만하면 효도는 다했지 싶은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내일 뵙죠.”

“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김 비서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든 준성이 조금 망설이다 통화 목록을 열었다.

“하여간 김수진, 넌…….”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도 뜻밖이라 그 순간엔 실감을 못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장 그녀를 불러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건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설마…… 이렇게 여기서 저를 기다린 건 아닌지.

실컷 행복 회로를 돌리던 머릿속은 금세 현실을 되뇌며 이성을 찾았다.

지금껏 연락조차 없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뭘 어쩌겠다고. 과거의 인연이야 어떻든 지금은 오래전에 연이 끊겼던 옛 친구일 뿐이었다. 그렇게나 냉정히 돌아섰던 순간이 제게도 이렇게 생생하니 그녀 역시 잊지 못했을 테고.

모든 조건이 때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데, 머릿속은 자꾸만 다른 가능성들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접근하고 싶어 안달하는 저 자신이 기막혔다.

그래서 한동안은 일에만 몰두하려 애썼다. 급하지 않았던 일정까지 앞당겨 가며 머리를 혹사시켰다.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생각도 지워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회사라는 건, 언제든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것을 우연히 들렀던 직원 식당에서 그 많은 사람 틈에 있던 그녀를 단번에 발견해 버린 뒤에 깨달았다.

그때 저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 걸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뻔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저조차 놀랐는데 그녀는 얼마나 놀랐을지. 마음 같아선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인사조차 한 적이 없는 사이라는 걸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오후의 일정이 이어졌지만, 이상하게 집중이 되질 않았다. 피곤이 밀려들어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하고 휴게실을 찾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너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는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쉬면 나아질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너무 그녀만 생각하다 보니 결국 꿈에도 그녀가 나오나 보다 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고, 눈앞을 얼쩡거리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때만 해도 말이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시끄러웠…….’

정신없이 손을 뻗었다. 기겁하며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가녀린 몸이 품 안에 들어오자마자 훅 풍기던 향기. 10년 전에도 늘 일정 이상 간격을 둔 채 바라봐야 했던 여자가 처음으로 품 안에 들어온 순간, 심장이 미친 속도로 뛰어 댔다.

‘너 제정신이야? 그 꼴로 어딜 나가려고 그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그 와중에도 제 중심을 향해 몰려드는 열기였다. 순식간에 빳빳해진 것이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튀어 올랐다. 그녀의 팔을 움켜쥔 손아귀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어 붉게 익은 입술을 헤집고, 가녀린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제 허벅지를 밀어 넣는 순간을 떠올리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웅크려 앉은 그녀의 머리 위에 시트를 씌우며 탄식했다. 대번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욕정 어린 생각들을 이를 악물며 지워 냈다. 정말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에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이 나사 빠진 정신머리를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잠시만……요.’

그런데 그녀가 먼저 저를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여기 머리카락이 조금.’

‘아.’

그 순간에도 조금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괜히 오기가 생겼다. 저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그녀는 언제까지 저를 모른 척하려는 건지. 괘씸하기도 했다.

‘상황은 좀 이상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건데 따로 할 말은 없습니까?’

그 와중에도 그 시절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예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왜 이리 설레는 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기분 많이 상했다고요. 그쪽 때문에.’

이젠 그런 자신이 서글퍼져서 덧붙인 약간의 심술이었다. 그녀가 제 의도를 궁금해하며 저를 생각하길 바랐다.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씩 인연의 끈을 이어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밤, 또다시 그녀가 제 앞에 나타났다.

몰래 집무실에 숨어 들어와 있던 것도 모자라, 대놓고 제 사진까지 찍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는…… 뭔가 기분이 아주 복잡했다. 이거야말로 꿈인가, 싶었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주, 주무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런 거치곤 손안에 잡히는 감촉이 너무도 현실이었다. 손안의 감촉처럼 훤히 느껴지는 사심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그녀의 진짜 마음이 뭔지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껏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었냐고. 어떻게 이곳에 머물 생각을 한 거냐고.

그 결정에 내 존재가 영향을 미친 게 있긴 한 거냐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왔다.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흔들림 없이 그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섭섭했다.

어느 순간엔 정말 잊었구나, 좋은 추억의 일부가 되었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 긴 세월 내내 오매불망 그녀를 그려 온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정작 그녀를 보고 나니 내내 눌러둔 욕심이 솟구쳤다. 묘한 그녀의 태도에 기대를 하고 있다. 혹시나, 설마 하는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살며 더 크게 마음을 키워 버린 저 자신처럼, 혹시 그녀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이.

‘일단 제대로 된 곳에서 밥 한번 먹죠.’

이미 그녀는 제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 급할 건 없었다.

조금씩 천천히. 눈앞에 보이는 실마리를 당기다 보면 무언가 더 확실한 게 따라오지 않을까.

“그런 거치곤 너무 조용한 것도 같고.”

휴대폰 화면을 지그시 살피던 그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혹시나 그녀에게 연락이라도 오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결과는 역시나다. 그럴 여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뭘 기대하고 실망하는 건지.

허탈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집어넣은 준성이 호텔 입구를 빠져나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빌어먹게 눈에 띄는 샛노란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는 모른 척 지나가려야 지나갈 수가 없다. 곧장 다가가 차체를 두드리자 스르륵 열리는 차창 안쪽으로 익숙한 얼굴이 씩 웃어 보인다.

“오, 준성. 오랜만이다?”

차수혁이었다. 그 순간 준성의 머릿속으로 내내 덮어 둔 미묘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급해서 일단 샤워는 끝냈어. 미안한데 좀만 서둘러 줘. 누구 마주치면 좀 보기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참, 여기 위치는…….’

마치 밀회라도 나누는 뉘앙스였던 그녀의 통화 내용.

― 어, 그래. 준성아. 무슨 일이야? 나? 나야 일하러 왔지.

그리고 그 방을 나와 수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능청스럽게 들려왔던 말이었다. 분명 커다란 쇼핑백을 든 채 호텔 로비를 지나치는 걸 본 다음이었는데도.

정황상, 두 사람이 만났을 거란 것쯤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여전히 그들은 친구였고, 사정이 있어 옷을 구해 달라는 부탁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도 있는 관계임엔 틀림없으니까.

문제는 수혁이 왜 굳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였다.

다시금 밀려드는 찝찝함을 애써 털어 낸 준성이 조금 삐딱하게 섰다.

“쓸데없이 길 막고 있지 말고 차 빼지.”

“매정하게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일할 시간 아니야?”

“해야지. 데이트 끝나고.”

묘하게 싱글거리는 태도와 데이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거슬린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려 했다. 어느덧 그들의 나이도 서른 살이었다. 슬슬 연애와 결혼이라는 말이 인생의 숙제처럼 압박을 가해 올 나이.

“그나저나 준성이 너는 바빠 보인다?”

“그렇지 뭐.”

“그래. 들어가 봐.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해라.”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쭉 친구로 지내 온 사이이기에 알고 있다. 차수혁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쉽사리 머무르지 않았다. 또한, 친구보다 여자를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사람은 뼛속까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죽을 때가 된 거지.

그런 사람이 몇 년 만에 귀국한 친구와 마주쳤는데도 붙들지 않았다. 약간 거슬렸던 예감이 순식간에 ‘석연치 않음’으로 격상되었지만 준성은 내색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서고 얼마간 거리가 멀어졌을 무렵이었다.

“야, 차수혁! 이게 뭐야?”

등골을 짜릿하게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아챘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