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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93)

상무님, 방 잡을까요?

10화

“지우겠습니다!”

“아니, 그럴 건 없는데.”

사진첩을 누르려던 손길이 멈칫했다.

“자는 얼굴이 실리는 건 나도 좀 그러니까, 제대로 찍으시죠.”

“네, 제대로 찍어……. 네?”

순간 이 남자가 미쳤나 싶어 빤히 바라봤다. 놀랍게도 그는 더없이 진지했다. 심지어 보란 듯 매무새를 다듬고 점잖게 의자에 기대앉더니 양손을 깍지 끼곤 근엄한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뭐 합니까? 빨리 안 찍고.”

“네?”

“사진 필요한 거 아니었습니까?”

“마, 맞습니다.”

허둥지둥 대답하며 얼결에 사진을 찍긴 했는데 제대로 찍힌 건지는 모르겠다. 액정으로 보는 눈빛마저 왜 이리 생생한지, 도무지 시선을 맞출 수가 없다.

곁눈으로 찍힌 것만 확인하고 얼른 저장 버튼을 누르자마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성실하게도 제가 찍힌 모습까지 굳이 확인한 그가 픽 웃음 짓더니 다시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럼 일단 이쪽도 한 장 받죠.”

“뭐를……. 설마 제 사진을요?”

“그럼 이 자리에 김수진 씨 말고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그, 그건 좀!”

“남의 사진만 가져가고 본인 거는 안 내주는 거, 무지 양심 없어 보이는데.”

“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이건 명백히 들으라는 말이다. 심지어 말허리가 뚝 끊어진 게 반말처럼 들린 건 기분 탓?

그러고 보면 낮에 만났을 때도, 방금 제 손목을 덥석 붙잡았을 때도 뭔가 반말 비스무리한 말을 한 거 같은…….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떡하니 저를 향해 있는 휴대폰과 자못 진지하게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을 의식하니 미치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것도 죽을 맛이다.

“저기, 셀카로 하면 안 될까요?”

그가 선선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돌아선 수진이 셀카 모드로 전향된 화면을 바라봤다. 버튼을 누르는데 느닷없이 수전증이 생긴 건지 촤라락, 연속으로 찍히는 소리가 난다.

“어, 엄맛! 왜, 왜 이래 이거!”

게다가 이상한 얼굴이 떡하니 찍혀 있다!

“그냥 줘요.”

가능하다면 이 손에 든 걸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싶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밀자 사진을 확인한 그가 시크하게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웃음을 참는 듯 슬쩍 치솟은 입가에 수진은 그저 눈물만 삼켰다.

“초상권료는 따로 청구하죠.”

“……네.”

“참고로 제 몸값은 좀 비쌀 겁니다.”

암요. 상무님의 몸값이야 천정부지겠죠.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에 목구멍이 바짝 타들었다. 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입술만 바라봤다.

그래서 대체 얼마를 부르실 건가요, 상무님.

“일단 제대로 된 곳에서 밥 한번 먹죠.”

그리고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기다리는데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시간 나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봐요.”

잠시간 멍하니 서 있다가 눈만 깜빡였다. ……설마 그게 끝?

얼떨떨한 속을 다 읽은 건지 그가 웃는다.

“다음 사보, 기대하겠습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끊어졌다고 생각한 인연과 긴 세월을 돌아 우연히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김수진?’

출근 전날. 김 비서가 전달한 자료들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직원 명부를 무심히 훑어보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이름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실소하며 덮었다. 그래.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니 이젠 잊을 때도 됐다. 평소 같았으면 눈에 띄지도 않았을 무수한 글자 속의 이름 하나. 어디선가 한 번은 보게 되는 흔하디흔한 그 이름을 굳이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거리는 일 따윈 이제 없어야지. 애초에 그녀가 다시 제 눈앞에 나타나는 기적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긴 우리 영업부 예쁜이 김수진 주임입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정말 그녀였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어느 순간 무감해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차분했던 저 자신도. 무덤덤한 태도로 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딱딱함도 뭔가…… 너무 예상 밖이었다. 한순간 일었던 실망감에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진짜 너냐고. 반갑다고.

환하게 웃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던가.

“왜 그러십니까, 상무님? 식사가 입에 안 맞으십니까?”

문득 들려오는 질문에 준성은 힐끗,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기다란 식탁을 두고 주루룩 둘러앉은 임원진들의 표정이 굳어 있다. 그들의 등 뒤로 보이는 풍경은 이들이 단순히 식사나 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것만 같다.

이곳은 호텔 라비타 내부에 위치한 한정식 레스토랑 ‘솔’이었다.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따낸 식당의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

무겁게 움직이던 젓가락을 차분히 내려놓은 준성이 싱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바쁘게 움직이려니 몸이 마음처럼 따라 주질 않는 건지 입맛이 없네요.”

“저런. 그렇지 않아도 너무 강행군을 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좀 더 본사에 계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라든가, 내부 사정이 어떤지 좀 파악하고 오셨으면 힘들지도 않고 서로서로 편했을 텐데, 참.”

“미주 지역 사업 건이 다 마무리된 거나 마찬가지라곤 해도 이미 맡고 계신 일이 있으신데, 굳이 이번 입찰 건의 책임을 맡으시는 것도 모자라 한옥 호텔 추진 사업까지 참여하실 예정이란 건 아무래도 좀 무리한 행보가 아닌지.”

“뭐, 한 회장님께서야 어련히 잘 계산해서 맡기셨겠지만, 면세점 건은 특히나 이미 한 사장님께서 힘을 쓰시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그렇게 끼워 넣어서 젊은 힘까지 빼시는 건 괜한 낭비 같기도 합니다만…….”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한다는 영업부 신 부장의 나이도 오십 대 초반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앞의 남자들은 기껏해야 조카뻘인 젊은 상사 놈의 등장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무슨 말도 제대로 못 하겠더라니까요. 말꼬투리 잡아 가며 어찌나 신랄하게 쏴 대는지, 아주 진땀을 뺐어요.’

‘미국에서 뭘 하고 온 건지 꽤 까다로운 놈이 된 모양이구만. 앞으로 골치 좀 아프겠어.’

‘괜히 그 집안 핏줄이 아니겠지. 이래저래 걱정입니다.’

출근 당일, 고작 하루 만에 퍼져 나간 그의 평판이었다. 그 진원지는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오전 내내 그를 상대하며 진땀을 흘렸을 신 부장일 테고.

본사 근무를 했던 2년을 제외하면, 꼬박 6년을 해외에서 맴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호텔 라비타의 상무 이사라는 직함을 달게 된 건, 해외사업부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지 겨우 이틀 만의 일이었다.

그들의 우려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아직 경험도, 연륜도 부족한 상사.

얌전히 공부만 해 온 백면서생 따위가 앞서서 일을 벌이는 것도 싫겠지만, 그가 등장함으로서 일어날 변화 그 자체가 그들에겐 불안이고 불만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아마 다들 난리가 날 테지. 널 그 자리에 앉힌 것만으로 이미 선전 포고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일 테니.’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 갈 무렵 그의 오피스텔에 나타난 한 회장은 피곤함으로 가득한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걸 아시면서 절 굳이 그 자리로 불러들이신 겁니까?’

‘더 불만을 가져야 하니까. 그래야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놈들까지 못 참고 다 튀어나오지.’

차분하게 내뱉는 말끝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제 아들마저 비정한 전쟁터로 끌어들이려는 어머니의 고뇌가 묻어난 웃음이었다.

한정원 회장.

이젠 그 이름 뒤에 붙는 회장이라는 직함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누군가의 어머니라기보다, 거대한 그룹을 이끄는 회장님으로 사는 게 익숙해진 그녀에게도 긴 시간 동안 쌓인 골칫덩이들이 전하는 무게감을 무시하기 힘들었던 걸까.

‘한동안 네 약점 하나 잡아 보겠다고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거야. 끼어들 틈 따위 보이지 마. 허점 잡히지 않게 잘 처신하도록 하고.’

‘유념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쉬어라.’

흔한 안부조차 오가지 않았다. 2년 만에 겨우 얼굴을 마주 대하는 모자의 대화치곤 지나치게 건조했던 말들 뿐.

그러나 준성은 돌아서는 한 회장을 굳이 붙들지 않았다. 서로가 건강한 것만을 확인했으면 된 거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사려 깊은 막내아들로서의 역할보다, 1분이라도 더 눈을 붙일 시간일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어느 자리에 떨어지건, 맡겨진 일에만 충실할 생각이니까요.”

떨어진다, 라는 직선적인 표현에 배배 꼬여 들던 말들이 쑥 들어갔다.

“이 자리로 내려보내신 분의 체면을 더럽히지 않는 것. 그것이 낙하산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 무슨……. 낙하산이라니. 헛흠. 흠.”

“그럼요. 당치 않죠. 그냥 조금 이르다 뿐이지 언제가 되었든 당연히 오셔야 할 자리고…….”

내처 못을 박아 버리자 그제야 아차 한 건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당황스러움을 얼버무린다. 이젠 본사에서 일하던 시절의 얌전한 막내 도련님이 아니란 걸 그새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압니다. 지금 어떤 미래를 생각하고, 어떤 결과를 걱정하고 계신지는.”

그의 외삼촌이자, 한 회장의 동생인 한정균 사장이 슬슬 야심을 내보이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건 세상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처음엔 한 회장을 도우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점차로 불어 가는 욕심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파벌이 나뉘어 복잡해진 그룹 내부의 사정은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투자의 기본은 분산이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모든 걸 털어 넣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까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버리면서까지 굳이 적대감을 드러내고 소속을 밝힐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어떤 의리보다 실리를 따라 왔기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자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언제든 눈치 빠르게 줄을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확히 그 점을 짚어 내는 말에 그들은 침묵으로 수긍했다.

“비록 경험은 적지만, 옆에서 보고 배운 것은 그 이상이라 자부합니다. 다소 부족해 보이더라도 너그럽게 지켜봐 주십시오. 금방 만족스러운 결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렴 호랑이 밑에서 개의 자식이 나왔을까.

그 누구도 아닌 한 회장의 아들이다. 돌아가신 선대 회장과 병약한 남편을 대신해 여자의 몸으로 HJ그룹을 현재의 자리로 올려놓은 입지전적의 인물. 그런 사람의 핏줄을 이어받고서 약한 소리는 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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